삶의 성숙을 위한, 노예도덕에서 주인도덕으로(2)

니체의 인격 발달 3단계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노예 도덕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주인 도덕으로 발달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니체의 핵심 논지는 노예도덕을 따르는 사람들이 인격발달의 3단계 과정을 거쳐 주인도덕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노예도덕을 따르는 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주인도덕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가득 찬 책이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니체는『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 부분에서 <인격발달 3 단계>를 제시한다.


첫 번째, 낙타의 정신


낙타는 순종하는 동물이다.

낙타는 사막에서 사는 동물이다.

사막은 죽음의 장소이지만, 사람 외에 사막을 가로지를 수 있는 동물은 낙타뿐이다.

낙타는 길고 긴 사막을 여행할 때 짐을 싣고 가는 상인들의 행렬에는 반드시 필요한 동물이다.

낙타의 등에 나 있는 두 개의 혹은 물주머니로서 한번 물을 섭취하고 나면 한 달 이상 물을 먹지 않아도 된다. 낙타는 힘도 좋기 때문에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으며, 양순하므로 주인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없다.

낙타는 주인이 짐을 실을 때까지 기다리고 주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이처럼 낙타는 자기주장이 전혀 없는 동물이다.

그래서 주인을 기쁘게 해 줄 뿐, 자기 스스로 만족스럽지는 않다.

오직 순종만이 미덕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정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순종의 미덕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이 생물학적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로 발달(이것은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사람은 생물학적 존재로 태어나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적 존재로 변화된다)하면서 사회가 그 일원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제도와 도덕 및 관습, 그리고 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단계는 전통과 수용된 가치의 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특징이다.

니체에 따르면 노예 도덕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부담을 받아들이도록 사회에 의해 길들여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개성을 포용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에서 스스로를 자제한다. 낙타의 영혼은 이러한 짐의 무게를 의심하지 않고 무기한으로 기꺼이 짊어진다.


이런 것들은 나름대로 권위를 가지고 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순종은 보통 엄마에게서 배운다.

엄마의 도덕과 아빠의 도덕이 다르다.

보통 엄마의 도덕은 지키지 않으면 큰일 나는 일이 발생한다.

엄마는 ’ 뜨거운 것 만지지 마라 ‘ 하면서 아기에게 실습까지 한다.

처음에는 실제로 불을 가까이 가져가서 뜨거운 맛을 보여주면서, 그다음에는 ‘이비야~ ’ 하면 아기는 뜨거운 맛을 봤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질색을 하며 피하게 된다.

이처럼 엄마가 정해주는 도덕은 거의 평생 간다. 즉 생물학적 경험을 가지고 사회적 관계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순종의 미덕이 좋다 하여 계속 짐만 지고 가면 인격이 무너진다.

낙타는 낙타만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종만 하면 되지만 사람은 순종의 미덕보다 더 큰 공격성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다.

아기는 타고난 공격성을 순화하기 위해 낙타의 순종이 필요하다.

이 순종을 잘 배우면 사랑의 에너지와 마구 섞여 있는 공격 에너지를 잘 솎아낸다.

자녀가 가지고 있는 공격성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이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갓 태어난 아이는 공격성 그 자체인데 부모는 이를 공격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쁘고 귀엽다고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 척키‘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부모는 아기의 공격성을 매우 성가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기는 공격성으로 울고, 공격성으로 젖을 빤다.

엄마는 이를 칭찬해 주고 공감해 주고 예뻐해 줌으로써 아기의 공격성은 순화되어 간다.

엄마가 이를 못 견디고 짜증 내고 윽박지르면 아기는 ’ 내가 뭘 잘못했나?‘라고 생각하면서 자발성을 억제한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면서 공격성을 억압하게 되고 순응적인 성격이 된다.


이진우 교수는 니체의 인생강의에서 낙타의 정신을 ‘중력의 정신’이라 했다.

그 정신에 해당되는 조동사로 must 또는 should를 꼽았다.

must는 법과 관련되어 있다면, should는 도덕과 관련된다.

구약성경에서 부모 공경은 must에 해당되는 것으로 부모공경의 율법을 어기는 사람은 동네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으로 넘어오면 부모 공경은 should로 바뀐다. 어쨌거나 must/should의 중력 정신은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규율사회를 이끈다.


두 번째, 사자의 정신


니체가 제시하는 인격발달의 두 번째 단계는 "사자 정신"이다.

이 단계는 사회적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려는 의지가 특징이다.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은 노예의 도덕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의 부담과 수용된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인격 발달의 두 번째 단계에서 사자 정신은 진정으로 독립적이 되고 사회적 규범을 따름으로써 얻을 수 없는 자기 인식을 성취하고자 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


도덕적 판단은 과연 도덕적인가? 내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약해서인가 아니면 선을 추구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내가 정체성 확립을 위해 방황하던 고교 때 나 스스로에게 던진 여러 가지 의문을 대변해 주는 질문이다.

그동안 착하게 살아온 것이 억울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나는 사자의 단계로 넘어갔다.

오랫동안 억압된 것이 올라와 낮에는 공격성으로 표출되었다면 밤에는 가위눌림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나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반항과 공격성 표출을 시작했다.

이처럼 낙타 단계에서 넘어온 사자는 억압되었던 공격성을 표출한다.

오늘날 낙타의 미덕인 순종이 아버지의 도덕이라면, 사자의 거친 공격성은 아버지를 거스르는 아들을 도덕이다.

아버지가 must와 should를 강조하며 순응을 강요한다면, 아들은 아버지를 거슬러 아버지가 싫다는 것은 다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의 도덕인 사자 단계에 걸맞은 조동사는 ‘can’이다.

즉 can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아버지와 아들 간의 세대차는 서로 극복할 수 없는 분명한 시대정신의 차이가 있다.

일본처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다 가는 앞을 내다볼 수가 없다.

유교적 가치관에 아날로그적 사고에 매몰된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여겼던 must와 should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아들에게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may 또는 might의 가치에 불과하다.

can의 주체는 성과사회를 만들어 ‘할 수 있는 자’가 그 사회를 주도한다.

아들은 아버지 도덕인 must/should 정신에 의문을 품고, 디지털 시대의 경쟁력으로 채워진 성과사회의 가치가 can의 능력을 장착하여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는 데에 있음을 자각한다.

아버지 도덕은 ‘예’가 미덕이었지만, 아들 도덕은 ‘아니요’가 미덕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여

의무에 대한 신성한 거절을 가기 위해

사자가 되어야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셋째, 놀이하는 어린아이의 정신


어찌하여 약탈하는 사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결이요 망각이며,

새 출발이요, 유희이며,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의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자의 공격성은 No! 의 용맹스러운 부정이라면,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의 창조적 놀이(유희)는 ‘신성한 긍정’이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요구하며, 세상을 등진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같은 책).


그래서 이 단계에서 발휘되는 조동사는 will이다.

스스로 의지를 발견하고 발휘하게 된다. 그런데 의지를 발휘하는 주체의 중심점이자 존재의 출발점은 I am(내가 있다)이다. I am은 나의 ‘동일성’으로서,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도 일평생 ‘동일한 나’로 확인하게 해 주는 존재 중심점이다. (그림 그릴 것)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첫 장에서 ‘어린아이’를 언급함으로써, 이 어린아이가 나중에 초인이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훗날 초인이 될 만큼 유능한 ‘어린아이’의 조건은 바로 ‘놀이하는’ 아이이다.

아이는 놀이에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 조직력, 판단력, 정치력, 관계성, 추진력, 인내력, 순발력 등 초인이 되는 데 필요한, 또는 인생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다 배운다.

아이가 나중에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꼭 골목대장 자리를 고수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놀이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 그 놀이를 전반적인 흐름과 전체 판세를 읽어내는 능력을 배운다.



놀이가 사라지는 우리 사회의 현실


어느 TV 프로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생 23명 중 3명이 번-아웃이고, 16명이 직장경력 16년 정도의 스트레스 상태이라고 한다.

그런데 직장인 70%가 번아웃 상태임을 감안하면, 초등학생 70%가 번아웃이라는 말이 된다.

유니세프에서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이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웰빙이 다른 나라 아이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 원인으로 학업 스트레스 지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 영유아도 10명 중 3명이 우울증이라는 통계도 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스트레스가 높은 이유 중에는 단연 대한민국 전체가 오랫동안 앓아 온 ‘입시 공화국 증후군’을 꼽을 수 있다.

엄마 아빠가 이미 겪어 온 스트레스가 관계를 통해, 그리고 부모가 보여주는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녀에게 대물림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치유책으로 놀이가 제시되지만, 그 놀이조차도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으로 습득되기 때문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이나 걸릴 법한 소화불량, 두통, 소아 당뇨, 탈모 등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인제대 일산백병원의 박은진 교수는 아이들의 스트레스는 잠, 식사, 불안증세, 짜증, 두통, 집중력 저하 등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아동기에 이런 부작용은 자신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것은 유치원 시기에 놀이가 평생을 좌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동기의 스트레스는 평생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3세까지 뇌 발달이 급속하게 이루어지지만, 그 이후에도 뇌는 청소년기까지 계속 발달해 간다고 한다.

뇌가 발달해 간다는 것은 뇌세포와 뇌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가 어떤 경험을 할 때마다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동기에 누적된 스트레스는 뇌세포 안에 그대로 잠재되어 있어 일평생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성인이 되면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해지거나, 또는 정서조절능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놀이는 나와 나, 자아와 자기를 교류한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말했듯이, 놀이 안에서 세계의 변형이 일어나며, 자아도 놀이적 변형을 경험한다.

자아는 놀이를 통해 세계를 자기화하고, 그 결과 세계를 해석하는 주체가 된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세계를 상징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놀이를 잘하는 아이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놀이 세계는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장이 된다.

리쾨르의 말을 풀어보면, 위에서 니체의 정신발달 단계에서 어린아이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 즉 어린아이 시절의 놀이 경험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된다.

놀이는 시간적으로 일평생에 영향을 미치지만, 공간적으로 온 세계 그리고 온 우주가 놀이의 장과 겹친다.

리쾨르가 ’ 놀이를 통해 세계를 자기화‘한다는 말을 보면, 내가 앞으로 살악야 할 세계를 얻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아동기에 놀이 세계에 흠뻑 빠져 보는 것이다.

놀이를 하는 것은 노예도덕에서 주인도덕으로 넘어가는 중간영역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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