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성 vs 구체적 현실
탐구자 : 중간대상 경험은 유아기 때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분석가 :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양육 상황에 따라 경험할 수도 있고, 경험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탐구자 : 결국 어머니의 양육태도의 문제일 수 있겠군요. 중간대상 경험을 하고 그 시기를 넘어가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요?
분석가 : 차이의 핵심은, 대상을 상징화하는 경험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성장과정이나 성인이 될 때, 상징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로 나눠지죠. 즉 상징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죠. 상징화된 삶이란, 개인의 일상을 문화, 종교, 예술, 문학, 인문학 등으로 삶의 외연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런 상징적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중간대상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상징화 능력이란 일상적인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죠. 위니캇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중간대상과 문화적 삶과 연결 지어 서술하였습니다.
탐구자 : 어머니라는 존재를 대신하는 사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중간대상 경험은 존재가 물리적 대상에게 발생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차원으로 진입한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분석가 :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이죠. 위에서 말했듯이, 중간대상 경험이 문화적 삶과 연결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겠죠. 곰인형으로 대표되는 보잘것없는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어머니의 존재를 대체하는 개념으로서 물리적 세계의 법칙들을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한 것도 중간대상이죠. 그러한 상징화 능력이 아이의 삶의 질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나 현실을 잘 살아낸다는 것은 힘들고, 한계에 부딪히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한계 상황에서 좌절하고 그냥 무너지기보다는 그 한계를 넘어서고 눈앞에 절망이 찾아와도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쓰게 되죠. 이 과정에서 상징화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는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상징화 능력이 있는 사람은 현실의 한계를 그냥 물리적으로만 보지 않게 됩니다. 상징화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그 한계를 뛰어넘음으로써 삶의 차원을 또 한 번 높은 차원으로 도약할 기회를 갖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상징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물리적 한계에 갇혀 자신의 잠재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채 쉽게 무너져 버리게 됩니다.
상징화 능력을 갖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종교적 신앙으로, 어떤 사람은 도덕적 신념으로, 어떤 사람은 정신성의 고양으로, 어떤 사람은 예술적 감수성으로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서 상징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위니캇은 이러한 상징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계기로서 유아기에 중간현상, 중간 대상 경험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탐구자 : 분석가의 말씀을 듣고 보니, 아이가 유아기에 중간대상을 사용함으로써 상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문화적인 삶을 열어가게 되는 것으로 볼 때, 중간대상 경험은 존재를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신학자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을 다 모아서 최후의 만찬을 하지 않습니까? 거기서 예수님은 성만찬의 예식을 제정하시게 되죠. 그 결과 포도주는 장차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흘리실 피요, 떡은 예수님의 살이 되죠. 가톨릭에서는 화체설을 주장하기 때문에 성만찬을 먹는 즉시 몸 안에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서 떡은 예수님의 살로, 잔은 예수님의 피로 바뀌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해석의 방향이 다릅니다. 성만찬이 행해질 때, 잔과 떡에 예수님이 임재하신다는 임재설과 상징한다는 상징설이 있죠. 구교와 신교는 각각 교리가 다를 뿐, 잔과 떡이 중간대상이라는 의미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탐구자 : 예수님의 십자가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상징되는 일종의 중간대상이 되겠네요.
신학자 : 그렇습니다. 중간대상경험은 나를 다른 존재차원으로 진입하게 해 준다는 탐구자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사실상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돌아가시는 데 있어서 반드시 십자가일 필요는 없거든요. 꼭 십자가가 아니라 일(1) 자로 세워진 나무라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왜 십자가인가 하면, 그렇게 상징화되었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용어 안에 우리의 죄용서와 관련된 모든 개념들이 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십자가가 그런 상징화가 배제되어 있다면, 십자가는 하나의 우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지칭할 때는 십자형의 사형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곧 예수를 상징하는 중간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하면서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예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한다’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똑같은 십자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은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탐구자 : 그 십자가를 지켜보는 로마인들은 사형대에 불과했을 것이고, 유대인들은 구약의 전통으로 ’ 나무 위에서 죽는 것은 저주받은 자다 ‘라는 경멸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겠죠.
신학자 : 그렇죠.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그곳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고, 그 십자가의 속성, 즉 죄인이 오르는 곳이자 저주받은 자가 올라가는 나무라는 구체적인 현실의 시각으로 십자가를 바라본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간대상의 개념도 없고, 어떤 상징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상징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더 높은 차원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예수를 로마인들과 함께 저주하고 조롱하는 차원에 머물러 버렸습니다. 중간대상은 사물의 구체적인 속성이나 구체적인 현실을 넘어서는, 존재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성찬과 십자가라는 중간대상 경험은 보다 포괄적인 중간영역으로 신앙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즉 기도, 찬양, 은사, 설교, 예배 등의 중간영역으로 신앙을 확대해 나가게 됩니다.
분석가 : 유아의 중간대상 경험 역시 장난감으로, 놀이터로, 학교로, 교회 생활, 문화생활로, 창조적 활동 등의 중간영역으로 확대됩니다. 중간대상 경험의 질에 따라 그 이후의 중간영역에서의 삶의 질이 좌우될 수 있다는 겁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중간대상 경험이 부재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분석가 : 중간대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상징화된 삶을 누리지 못하고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탐구자 : 구체적인 현실을 사는 사람은 현실감이 탁월한 사람이 아닌가요?
분석가 : 언 듯 들으면 그렇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 현실에 밝아서 매우 계산적이 되어 인간관계조차도 계산적인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들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의 모습은 상징성이 부족한 사람의 특징이죠.
신학자 : 성경에는 상징성이 부족하여 구체적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입성을 할 때, 그 전날 예루살렘 근처의 마을에 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하루 밤을 묶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보고 죽음을 예감합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매우 상징적인 행위를 합니다. 마리아는 일평생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옥합을 깨뜨려서 그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붓고 온몸을 적십니다. 마리아는 상징화된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예식을 치른 것입니다. 예수도 여기에 감동하여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9)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 중 회계를 맡은 가룟 유다는 이 여인의 행위를 보고 매우 부적절하다 여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태 26:9)고 반문합니다. 가룟 유다는 상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인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두 사람의 삶의 차이를 볼 수 있죠. 마리아는 상징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영적인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매우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분석가 :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선 듯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너무 구체적 계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랑이 두 사람 사이를 상징의 세계로 열어주지 못하고 구체적 현실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해 결국 결혼을 포기하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여자가 생각하기에,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만일 저 남자가 IMF가 다시 와서 직장을 잃게 되면 어떻게 하지?’라든가, ‘남자가 버는 저 월급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지?’ 등등 현실적인 계산 때문에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혼을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예들이 구체적인 현실적 계산 때문에 사랑의 상징성이 지닌 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탐구자 : 어떤 청년이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엄마, 나는 절대 결혼 안 할 거니까 내게 결혼 강요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번 돈으로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나눠서 써야 한다는 것이 나는 용납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물었대요. "너는 지금 여자와 연애도 하고 있잖아."그랬더니 아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결혼을 안 하는 조건으로 연애를 해요." 이러더랍니다.
분석가 : 그 아들이야말로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의 삶을 상징성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하고, 매우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