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의 고요한 핵, 여성적 요소
탐구자 : 위니캇은 여성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느낌 외에도 ‘자기 발견’을 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자기 발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분석가 : ‘두 번째 스무 살’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하노라가 오랜동안 남성적 원리에 휘둘려서 남성적 대상관계를 하게 됩니다. 어느 날 하노라는 삶이 허무하고 공허하며 뭔가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인생을 새롭게 살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에 포기했던 대학을 도전하여 아들이 다니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전개해 나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새로운 존재감을 얻게 만드는 것이 바로 ‘여성적 요소’입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여성적 요소를 가지고 관계를 맺는 방식과 남성적 요소를 가지고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게 되겠군요.
분석가 : 그렇죠. 남성적 요소를 가지고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은 사실적 관계에서 객관적 차원, 그리고 권력체계 속에서 힘의 논리를 의거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렇지만 여성적 관계 맺음의 방식은 존재론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관계 능력을 말합니다.
신학자 : 기독교 신앙에서 ‘회심’을 경험하는 순간, 그것은 ‘여성적 요소’가 작동할 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어머니인 모니카의 헌신적 기도와 인내심 있는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줍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방식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여성적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내 안에 계시면서도 내 인격을 침범하면서 자기를 주장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 안에 숨어 계시면서 수줍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 중, “나 자신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은 존재의 깊은 심연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야 말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과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분석가 : 여성적 요소는 매우 연약하여서 상처받기 쉽고, 병에 쉽게 노출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여성적 요소는 외부적 상황과 심리적 상황이 어긋날 때 상처를 받게 하고 몸의 병, 마음의 병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탐구자 : 여성적 요소가 들어오는 타자성과 남성적 요소가 들어오는 타자성은 존재론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분석가 : 여성적 요소로서 타자성은 개별존재의 단위를 획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남성적 요소로서 타자성은 개별존재가 사회적 존재로 변환되는 데에 필요한 요소를 획득하는 데에 필요한 것입니다. 전자는 두 존재 간 ‘융합’을 경험하면서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성(sameness)라는 자기의 한 요소를 획득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후자는 ‘동일시 identification’라는 정신기제를 사용하게 됩니다. 전자는 위니캇이 ‘일차적 동일성’이라는 ‘자기 동일성 identity’를 확보하면서, ‘인격의 고요한 핵’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됩니다. 위니캇은 이 동일성 identity이야 말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의 기초라고 말합니다. 위니캇은 이 ‘인격의 고요한 핵’은 결코 침범할 수도, 침범해서도 안 되는 인격의 중심에 해당되는 것으로 강조합니다.
탐구자 : 만일 그 ‘인격의 고요한 핵’에 침범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분석가 :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남자는 존재와 인격이 분리가 자유로운 ‘분리형’이지만, 여자는 존재와 인격이 분리가 잘 되지 않는 ‘일체형’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남자는 몸과 마음이 따로 분리될 수 있지만, 여자의 몸은 곧 마음입니다.
탐구자 : 저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아내는 남편이 그 여자에게 마음을 줬는가에 초점을 맞추지만, 여자가 바람을 피우면 남편은 아내가 몸을 줬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해요.
분석가 : 그 말은 남자는 몸을 줘도 마음을 안 줄 수 있지만, 여자는 몸을 주면 당연히 마음도 함께 준 것이 되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여자의 ‘인격의 고요한 핵’은 몸 그 자체에 있습니다. 남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남자들이 여자의 몸을 침범하는 것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인격의 고요한 핵'을 침범하면 당사자 여성은 존재 위기를 당하지만, 침범하는 남성 역시 자신의 여성성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탐구자 : 20년 전에 당했던 성적 침범 사건에 대해 남자는 이미 까마득하게 잊어서 기억을 더듬어 봐야 하는데, 여자는 평생 상처로 안고 살아가면서 2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여자들이 미투 운동을 하는 것이고요. 그렇게 보면, 조선 시대의 여자들이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은장도를 품고 다니는 것은 단순히 체면 문화라는 차원으로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분석가 : 조선시대에는 여자에게 있어 정조는 바로 생명이자 인격 최후의 보루이죠. 위니캇의 표현에 의하면, 조선시대 여자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곧 ‘인격의 고요한 핵’을 지키는 일입니다. 남자는 장난 수준에서건, 일시적인 충동을 참지 못해서건, 상습적으로 일어난 일이건, 성적으로 여자를 침범하면, 여자에게는 ‘인격의 고요한 핵’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적 사건을 일으킨 남자는 그 사건을 기억 속에서 쉽게 지울 수 있을지 몰라도, 여자의 삶은 바로 그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삶은 파괴되고 복구 불가능 상태로 무너져 버리게 됩니다.
탐구자 : 남자에게는 인격의 핵을 침범당하는 일이 없을까요?
분석가 : 남자들 중에는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자마자 자살하는 경우에서 우리는 인격의 고요한 핵이 침범당한 경우를 볼 수 있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수치심이 건드려진 것 정도로 여기지만, 당사자는 ‘인격의 고요한 핵’을 침범당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가끔씩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는 오히려 자신의 ‘인격의 고요한 핵’을 침범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시도하는 자살일 수도 있습니다.
탐구자 : 혹시 여성적 요소가 들어오는 기간에 남성적 요소가 들어 올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요?
분석가 : 어머니가 존재론적 공감을 해 주지 못할 때, 또는 어머니가 아기의 존재를 삼킬 때, 아기에게는 남성적 요소가 여성적 요소가 들어갈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또는 여성적 요소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남성적 요소를 받아들여서 빈 공간을 채우게 됩니다.
탐구자 : 그때는 아기에게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 것 같은데요?
분석가 : 위니캇에 의하면, 여성적 요소가 들어오는 시기가 첫 1년 이며, 남성적 요소는 여성적 요소가 존재 동일성으로 안착한 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성적 요소가 안착하는 시기에 여성적 요소 대신 남성적 요소가 들어가면,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기면서 그 아이는 앞으로 힘겨운 인생을 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아기는 어릴 때부터 성적으로 조숙해지며, 공격성의 중립화를 이루기가 힘들어 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아이는 매우 성적으로 살아가게 되고, 분노에 차서 늘 공격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존재를 세워주는 여성적 요소의 부재로 아기의 존재는 안정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유아기 초기에 여성적 요소를 충분히 채운 아기의 ‘자기’는 평생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의 바탕을 잘 만들어낸 것입니다.
탐구자 : 유아의 자기 안에 남성적 요소가 들어오는 경우는 어머니가 충분히 공감을 해주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어머니가 여성적이지 못하고 남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면 유아의 자기 형성에 문제를 낳지 않을까요?
분석가 : 위니캇은 어머니의 표상으로서 ‘젖가슴’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유아는 처음에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접하기 이전에 먼저 젖가슴과 융합을 하게 됩니다. 만일 어머니가 남성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위니캇은 그런 어머니의 젖가슴을 ‘활동적 젖가슴’이라 부릅니다. 여성적 젖가슴은 ‘있음’인데, 남성적으로 행동하는 젖가슴을 ‘활동적’이라는 수식어와 결합하여 그렇게 부릅니다.
유아는 그런 젖가슴을 ‘침범하는’ 젖가슴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유아는 어머니의 존재 안에서 ‘통합되지 않은 상태로 있음’을 충분히 경험해야 하는데,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늘 행위하는 ‘활동적인 젖가슴’을 경험한다면, 아기는 ‘있음’의 토대를 획득하지 못해서 안정감을 갖지 못하고 방어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때 아기는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어 몸이 늘 긴장하게 됩니다. 자기 동일성인 ‘나는 있다’를 획득하지 못하고 ‘...처럼 존재하고’, ‘...처럼 행동하는’ 등, 유아기 때부터 거짓 자기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위니캇은 강조합니다.
탐구자 : 최근에 사회적 사건을 발생하는 것들 중에, ‘여성혐오’, ‘남성혐오’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혹시 이런 여성적 요소와 남성적 요소와의 관계에서 그 근원을 따져 볼 수 있을까요?
분석가 : 참자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상대의 성을 그렇게 비하할 필요가 없죠. 위니캇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여성적 요소를 줘야 할 때 남성적 요소를 주게 되면, 아기는 ‘시기심’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시기심은 멜라니 클라인이 말하는 보편적인 시기심과는 달리 상대의 성에 대한 시기심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여성혐오’ ‘남성혐오’는 상대성에 대한 일종의 ‘시기심’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시기의 유아가 가지는 시기심은 바로 그런 시기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기 안에 있는 이성(異姓)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라면 ‘여혐’ ‘남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탐구자 : 자기 안에 있는 이성이라 함은, 여자 안에 있는 남성성, 남자 안에 있는 여성성을 의미하는 거죠?
분석가 : 그렇습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아기도 여성적 요소를 받아들일 때는 그 요소가 반드시 어머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 수 있겠고, 또 남성적 요소를 받아들일 때도 그것이 꼭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 수 있겠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직접 여성적 요소를 아기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여성적 요소를 자신 안에서 잘 발현할 수 있도록 잘 돕는다는 것은 어머니가 공감적이고 따뜻한 품을 제공하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아기가 상대적 의존기에 접어들면서 남성적 요소를 받아들일 때는 마치 외부로부터 오는 것처럼 경험하면서 마치 천둥 치거나 번개가 때리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아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제2차 성징이 나타날 때 성적 본능이 마치 외부의 강도가 침입해 들어오는 것, 또는 천지개벽이 나는 것으로 느끼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위니캇은 유아에게 남성적 요소가 들어올 때는 유아는 본능이 들어오는 경험을 번개나 천둥이 치듯 몸을 흔들어 놓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마치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처럼 자각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성적 요소나 남성적 요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어머니와 아버지를 매개로 발현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