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진리
바로 위에서 언급한 ‘진리가 여자라고 가정하면...’ 이 말은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에서 서문의 서두를 장식하는 유명한 명제이다. 니체 이전까지는 남자가 진리였다. 남자가 진리라면 세계는 평화와 번영이 넘쳐나야 했다. 그런데 진리가 남자인 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그 결과 질시와 반목으로 투쟁과 경쟁으로 생존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은 남자의 속성인 이성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이다. 그래서 니체의 책 제목 중 ‘선악의 저편’은 남자 세계가 아닌 여자의 세계를 가리킨다. 니체의 사고 전환은 세계 갈등의 역사를 여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취지로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진리가 여자라면...’하고 가정해 본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진리는 남자다’는 명제보다는 ‘진리는 여자다’라는 명제가 더 맞다. 천지창조의 마지막 퍼즐이 여자 창조인 것을 보면, 여자는 진리의 정점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을 깨닫기까지 인류는 수천 년이 걸렸다. 여성 개인도 이것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며, 부부 관계에서 수많은 사건을 겪어야 겨우 알 수 있다. 그런 깨달음은 극소수의 특정한 부부에게 만으로 한정된다.
부부싸움을 보면, 젊을 때의 싸움과 중년기의 싸움의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젊을 때는 남편이 아내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 윽박지르는 소리로 아내를 질리게 만든다. 그런 아내는 끽~소리 못한 채 15~20년을 지낸다. 남편은 아내를 제압했으니 자신의 이분법에 근거한 언어습관이나 태도가 진리인 줄 착각한다.
철학이 그랬다.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소크라테스 이래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슬픔과 기쁨, 흑과 백 등 이분법적 사고체계가 만들어져 2500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었다. 니체가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을 무너뜨렸다. 진리의 주체를 남자에서 여자로 바꾼 것이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건전하게 지탱해 오던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남성적인 거대담론, 즉 역사, 신, 이데올로기, 이성, 효 등 대신 미시 담론이 팽창해 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나 역사, 합리성, 보편적 진리를 찾기보다는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페북 같은 SNS에서의 사적 일상 이야기(미시 담론)에 귀를 기울인다. 이성보다는 감정, 남성보다는 여성이 존재 주체의 자리에 서 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결혼 15년까지는 남편이 진리의 주체 자리를 꿰차고 앉아 거대 담론(남성적 권위주의, 훈계 등)으로 집안을 장악한다. 중년기에 이르면, 남편은 너무 오랫동안 아내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거대 담론만 쏟아냈다. 이제 진리의 주체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왜 바뀌게 되느냐 하면, 그동안 남편이 저질러 놓은 비리가 너무 많아서다. 중년이 된 아내는 그동안 남편이 저지른 비리에 대한 빅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아내는 ‘지금-여기의 감정’으로 덩어리로 된 빅데이터를 하나씩 분화하여 남편 앞에 들이민다. 그 분화된 데이터 안에는 남편의 주워 담을 수 없는 분노 (때로는 폭력)와 그로 인한 아내의 고통과 눈물이 담겨 있다. 중년기에 남편은 자신의 폭력적 언어와 이분법적 태도로 상처받아 처절하게 울부짖는 아내를 이길 수 없다. 이겨서도 안 되는 싸움이다. 아내의 고통과 비명으로 나타나는 ‘지금-여기의 감정’은 남편의 비리를 바로잡는 진리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어느 가정이든 중년이 되면 진리는 여자가 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나이 50이 넘어서도 여전히 아내에게 큰소리치는 남편이 주변에 있다면,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이 좋다.
‘진리가 여자’라는 것을 아는 것도 대단하듯이, 여자가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아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자각은 세월이 흐른다고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남자는 보통 ‘진리는 남자’인 줄 알고 사회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결국 자기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꽝!’이라는 사실을 알면 다행이다. 남자는 성배를 찾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 영웅의 행로를 추적해 가려한다. 그 과정에서 남자는 온갖 무용담을 만들어가면서 자기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남자는 강제로 끌려간 군대에서조차도 온갖 무용담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안에서도 성배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존재다. 남자는 성배를 찾으러 다닐 때마다 성취의 결과물이 있으나, 만족은 없다. 사회적 성취를 운동선수의 트로피처럼 장식장을 가득 메운다 해도, 남는 것은 마음에 공허와 허무뿐이다.
사람은 양성적 존재다. 사람은 자기 성(性)만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이성이 이면 인격으로 존재한다. 남자 안에는 ‘여성성’, 여자 안에는 ‘남성성’이 있다. 남자가 사회적 성취로 자기만족을 구했지만, 그 성취를 위해 애쓴 만큼 내면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 허무로 가득 찬다. 허무와 공허로 가득 찬 남자의 내면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여성성’이다. 이처럼 남자는 자신의 여성성을 찾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그 나이에 이르렀다 하여 모든 남자가 여성성을 찾아내는 것도 아니다.
중년기에 이르면, 극소수 남자만이 여성성을 통한 자각할 수 있다. 그런 경우란 남자가 오직 자신의 여성성을 투사할 수 있는 아내와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때이다. 남자가 성배를 찾기 위해 외부 세계에서의 성취를 위해 한없이 주유하다가 극소수의 남자만이 자기 내면에 있는 여성성과 아내와의 관계에서 발견하는 여성성을 통합해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찾아야 할 진정한 성배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She][He][We] 시리즈를 쓴 로버트 A. 존슨(Robert A. Johnson)은 여성은 성배를 찾기 위해 외부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여성에게 성배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자도 내면의 여성성을 찾고, 여자도 자신의 여성성을 회복하는 일이 각자의 과제라면, 여성성이야말로 모두의 존재로 통하는 공통 코드인 셈이다. 그래서 니체는 ‘진리가 여자라면...’라는 명제를 만들어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자가 아니라 여성성이 진리인 것이다. 여성성이야말로 온 세상을 치유하는 ‘치유적 언어’ 요, 온 우주에 편만하게 퍼져 있는 ‘우주적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