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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는 가족, 용서 불가능한 전쟁과 용서가능한 전쟁

가인과 아벨


전쟁 중에 가족 간의 전쟁이 가장 무섭다. 

가인과 아벨 간의 싸움이 그 기원이다. 

가인과 아벨의 싸움은 성경의 창세기 4장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형제간 갈등이자 비극적 사건이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은 각각 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두 형제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으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시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셨다. 

이는 가인에게 큰 분노와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님은 그에게 감정을 다스리라는 경고를 주셨지만, 가인은 이를 무시하고 결국 들판에서 아벨을 살해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단순한 형제의 다툼을 넘어, 사람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질투와 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상징적 이야기로 해석된다. 

가인은 하나님께 벌을 받았으나, 그에게는 또한 보호의 표식을 주어 다른 사람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면서도 여전히 보호하시는 은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이복형제간의 전쟁이다.

아브라함의 이복형제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의 다툼은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전쟁으로 남아 있다. 

이들의 전쟁은 하나님이 세계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중에 미리 세팅해 놓은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이 미리 세팅해 놓았다 해도 그 책임은 그들 자신에게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쟁이 영구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구약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중이다. 


왜 예수가 그렇게 중요한가?  


왜 예수가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는, 


첫째, 이웃의 개념을 바꿔 놓았다. 

신명기 20장 10~17절을 보면, 전쟁 매뉴얼이 나와 있다.

이스라엘은 가까이 있는 이웃, 7 족속은 남자든, 여자든, 가축이든 성읍에서 호흡 있는 자를 원수로 보고 하나도 살리지 말고 진멸시킬 것과 멀리 있는 이웃 민족은 남자만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랐다. 

가까이 있는 이웃일수록 원수인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의 개념을 바꿔 놓았다. 

사마리아 인은 여리고에서 강도당한 유대인을 나귀에 실어 여관에 거하게 하고 치료하게 하며 여비까지 주었다.

그리고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둘째, 원수의 개념을 바꿔 놓았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그 원수가 누구인가? 

물론 이웃 중에도 극도로 증오할 만한 사건에 연루되면 원수가 될 수도 있지만, 구약처럼 더 이상 이웃 자체가 원수가 될 수는 없다. 

예수는 '원수는 가족이다'라고 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태 10:34-36)


용서가 전제된 원수


구약의 원수 사이에는 진멸이 있을 뿐 용서란 찾아볼 수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바로 옆에 붙어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만, 그들은 서로 용서할 수 없는 원수지간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관계는 또 다른 형제간의 원수지간이다. 

남과 북이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분단과 적대 관계가 이어진 점에서는 중동의 형제 민족 갈등과 유사성을 갖지만,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중동의 형제는 용서가 불가능하지만, 남북한은 용서가 전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으로 넘어오더라도 그들을 적대적으로 여기는 남한 사람은 거의 없다. 

총을 들고 대치했던 북한 군인이라 해도, 무기를 내려놓고 남으로 넘어오는 순간 남한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국경을 넘는 어떤 탈북 군인이 위험에 처할 때, 남한 사람들은 그들이 안전히 휴전선을 넘을 수 있기를 모두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본다. 

북한 체제의 고위층이나 보위부 간부였던 사람도 국경을 넘는 순간 남한 국민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주체사상을 만들었던 황장엽 씨 역시 국경을 넘은 순간 그의 과거 행적이 용서받고 남한 국민으로 수용된 바 있다. 

이를 두고 이의를 제기하는 남한 국민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가족 간의 전쟁 


가족 간에도 두 가지 형태의 갈등이 있다.

구약적인 싸움, 즉 용서가 전제되지 않은 갈등과 신약적 싸움, 즉 용서를 전제로 하는 갈등이 있다.


용서가 전제되지 않은 부부싸움

부부 싸움을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만, 어떤 부부는 싸울수록 관계가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한 번씩 싸울 때마다 파괴적으로 싸운다. 

한번 싸울 때마다 화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남이 되어가는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그들의 싸움은 용서가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말은 이혼이다.

부부간에 그렇게 파괴적으로 지속적으로 싸워 서로 화해할 능력이 없다면 서로를 위해, 그리고 자녀를 위해서라도 이혼하는 것이 낫다. 

그렇게 이혼한 후에도 여전히 상대방 탓을 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반성할 능력이 없다면, 절대 재혼해서는 안 된다.



용서가 전제된 가족 갈등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답시고, 미워하던 사람에 대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미워해야 한다. 


사실상 가장 어려운 것이 원수 되는 것이다.

끝까지 미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끝까지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다.

그래서 가족 간에 중요한 것은, 사랑과 미움을 통합하는 것이다.  

원수는 누구인가?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원수는 곧 가족이다.

원수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다.

대개 그중 가장 큰 원수는 부부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평생의 작업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가장 미운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고,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가장 미운 사람이다. 

서로 미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는 부부는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관계이다.


갈등이 멈춘 부부는 더 이상 사랑도 미움도 기대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끝까지 싸울 수 있는 부부는 끝까지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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