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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락 Aug 10. 2023

9. 다행이다-

더 이상의 나쁜 이야기는 없어서.


다행하다 [多 많을 다 / 幸 다행 행]
: (걱정되거나 좋지 않던 일이) 심하지 않거나 뜻밖에 잘 풀려 마음이 편하고 흡족하다.


아침에 눈을  떠 식탁에 앉았다. 아빠는 내 양쪽 어깨를 두드리며 ‘우리 딸, 좋은 꿈 꿨나?’라고 물으셨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며칠 전부터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몹시도 덤덤한 밤을 보내었기에 웬 꿈 얘기를 하시나 했다. ‘응, 아빠. 나 괜찮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선, 설마 무슨 일 있겠냐며 스스로를 달래었다.


두근거릴 정도의 떨림은 없었더라도 왜 무섭지 않겠는가. 전이가 쉽다는데, 통증이 없어서 모른다는데, 사람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인데. 이따금씩 어깨가 결릴 때, 옆구리가 쑤실 때, 겨드랑이가 저릴 때, 팔꿈치가 시릴 때… 육아 때문이라고 여겼던 이런저런 통증이 혹여 나쁜 세포가 자리 잡아 생긴 것이었을까 싶어 무서웠다.


병원에 갈 시간이 되어 아빠에게 우래기를 맡기고 엄마와 집을 나섰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엄마는 암 선고를 받으신 적이 있다. 다행히도 ‘오진’이었기에 엄마는 암을 앓으신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덕에 암 선고에서 오는 공포와 두려움은 누구보다 잘 아신다. 엄마는 그때 삶을 정리하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알게 되었고, 남편보다 어린 자식들을 걱정하느라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우래기를 보며 느낄 감정을 떠올리며 어쩌면 나보다 더 슬퍼하고 계셨다.


병원 대기실에서 엄마의 초조함이 전해져 왔다. 대기환자들이 빼곡히 앉아있는 대기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람구경이었다. 조금 어색한 머리칼을 보며 가발임을 눈치채고, 마른 목선에 까칠한 피부를 보며 병세를 느꼈다. 단발머리를 한 사람은 머리가 꽤 길었으니 치료를 끝낸 지 몇 년은 지났을 거라 추측하고, 바짝 붙은 머리칼을 보면 그래도 치료 다 마치고 제법 자란 거겠다,하며 속으로 부러워했다. 그리고 중년 여성의 백발 스포츠형 헤어스타일을 보고는, 엄마에게 ‘멋있다.’라고 속삭였다.


그러다 그 여성을 비롯해 아들로 보이는 젊은 남성과 대기실에 앉아있는 몇몇 어머니들이 보였다. 우래기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훌쩍 자라서 엄마 병원 가는데 같이 가자고 따라나설 우래기를 떠올렸다. ‘엄마보다 큰 키, 듬직한 어깨, 우래기도 저 남자처럼 엄마 가방을 들어주려나?’ 상상만 해도 좋다.


내 이름이 불리고 진료실 옆 의자에 앉았다. 벽에 등을 대고 앉으니, 모든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젊은 환자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지만, 내 또래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 젊은 사람은 대부분 보호자였다. 조금 쓸쓸해지는 기분이었다. MRI 찍던 날도 그랬다. 벽면에 붙은 의자에 2,3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길래 ‘아이고,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아프면 어떡한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일 뿐이었다. 할머니 환자 분이 촬영실에서 부축을 받고 나오자 젊은이 두 어명이 보호자라며 벌떡 일어났고, 젊은 환자 분이 있긴 했지만 나머지 분들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내 차례가 되고, 의사 선생님에게 최종 진단을 듣고, 앞으로의 치료 순서와 방법이 정해졌다. 전이는 되지 않았다고 하니, 그동안의 쑤심과 결림은 단순 근육통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그 녀석만 잡으면 된다.


나쁜 놈인데 그놈만을 잡는 약이 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 말 중에 ’역설적으로.‘라는 말이 어찌나 맘에 들던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위기에 부딪쳤지만,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무섭지만 기뻤고, 두렵지만 홀가분했다.


이 놈에게 써 볼 수 있는 약이 무려 3가지이다. 얼마나 많은 연구와 임상을 거쳐 걸러진 결과물일까. 예전보다 나아진 약물을 써 본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셋 중에 하나는 내게, 그놈을 없앨 수 있는 마법의 약이 되어줄 것이다.


올 겨울이 되면 모든 치료와 수술이 끝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거라 생각했지만, 치료기간은 생각보다 길게 나왔다. 그래서 조금 아득해졌다. ‘내년 여름? 한 바퀴 돌고 여름?’ 표적치료 때엔 머리칼이 나온다고 했지만, 어쨌든 경제활동을 위한 업무 복귀는 더 늦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치료 수순이 정해지자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3주에 한 번씩, 8월 중순부터 세어보니 선항암은 11월에 끝난다. 그럼 12월 중에 수술을 할 것이고, 1월부터 14번의 표적치료를 하면 다시 8월이 된다. 1년. 금방 갈 거다. 시간은 빠르니까.


케모포트를 심으면 주사 맞는 순간이 힘들지는 않다고 했다. (주사 맞은 후가 문제겠지.) - 수술은 항암에 비하면 껌이라고 했으니, 난 잘 견뎌낼 것이다. (수술이 쉬우면 항암, 너란 녀석은 대체…) - 표적은 항암에 비하면 나을 거라 했다. (그렇게 믿자. 의심치 말자.) - 2주 후, 제일 어려운 것부터 시작한다. 먼저 맞는 매가 낫다. 롤러코스터를 타고나면 바이킹은 껌일 거다.


전이가 아닌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콧노래가 나왔다. 집에 도착해서는 아빠에게 결과를 전하고 다행이라며 춤도 췄다. 엄마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내가 임신 때 엄마가 날 보던 눈빛이다. 언니 때나 나 때 모두 입덧을 심하게 겪느라 식사를 거의 못 했다는 엄마는, 먹덧을 한다며 밥을 밀어 넣는 딸을 보며, ‘넌 뭘 먹네?’하며 물끄러미 바라보셨었다. 딱 그때의 눈빛이었다. 어이없음과 경이로움이 뒤섞인-.


저녁에 만난 큰 이모와 막내이모에게 엄마는 ‘쟤는 초긍정이야.’라고 내 상태를 대신 설명하셨다. 우래기랑 놀아주느라 못 들은 척했지만 엄마에게도 나의 긍정의 기운이 느껴졌나 보다. 그렇담 다행이다.


암이지만,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고. 전이가 안 돼서 다행이고. 나쁜 유형이지만, 전용 치료법이 있어서 다행이다. 서울에 살아 다행이고. 병원이 가까워서 다행이다. 아기가 어려 어쩌나 싶었지만, 나중에 엄마가 힘들어하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 다행이고. 민머리 헤어스타일에 놀라지 않을 거라 다행이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보니 이 모든 것이 다행이다.

다행인 일들 뿐이다.


초긍정의 기운이 나를 감싼다.



23.08.01. 화요일.

기분 좋은 8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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