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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락 Aug 15. 2023

12. 밀다. (1)

push 아니고 shave.


밀다
1. (사람이 물건을) 행위자 쪽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힘을 주다.
2. (사람이 수염이나 털을) 말끔하게 깎다.


쉐이빙은 언제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한 주제이다. 안 빠지는 경우도 있다지만, 그건 덜 빠지는 것이지 아예 안 빠지는 걸 뜻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빨리 해치우자!’


하긴 해야 하는데 언제가 좋을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카페에 쉐이빙 시점을 찾아보았다. 보통 첫 항암을 하고 정확히 14일 되는 날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다는 글이 많았다. 3주 간격 중 2주가 지난 시점이니 컨디션이 조금 돌아오는 때로 추측되었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빠질 그즈음 밀라는 의견도 있었고, 그때쯤이면 긴 머리가 엉켜 힘드니 미리 가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리고 종종 밀지 않고 슥슥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두 겪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에 걸려 한 움큼 빠지는 머리칼을 보고 싶지 않았고, 듬성듬성 머리칼이 빠진 정수리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항암 반응이 어떨지 모르고 사람마다 후유증이 오는 시기도 다르다는데, 머리는 빠져가고 혹여 미용실이나 가발가게에 갈 수 없는 상태라면 매우 번거로울 것 같았다.


무엇보다 머리가 긴 상태에서 빠지기 시작하면 두피에 통증이 온다고 했다. 미리 밀었던 분들은 이를 느끼지 못한 듯하여, 나는 첫 항암 전에 머리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발과 모자를 고민하다가 통가발은 덥고 자꾸 모자를 찾게 된다는 글을 읽고, 나는 가발이 달린 모자를 사기로 했다. 해당 지점에 쉐이빙 예약을 했다. 인터넷으로 버튼만 누르면 자동예약이 되었다.


내 마음은 몹시 덤덤했다. 처음엔 어색할 수 있지만, 치료를 받다 보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 머리가 있고 없고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댓글을 읽고, 이런 걸로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저 건강해지기 위한 일일뿐이다.


엄마와 도착한 매장은 아주 넓고 쾌적했다. 매니저님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확인했다. 항암가발 매장이니 마냥 밝을 수는 없을 터였다.

한쪽에 마련된 커튼 속 거울과 미용실 의자가 보였다. 가발을 고르려면 어차피 머리를 밀어야 하니,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잠깐만요! 이 머리로 가발 만들 수 있죠? 그럼 잘라서 저 주시겠어요?”

엄마는 딸의 긴 머리칼이 숭덩숭덩 잘리는 게 아까운지 본인 가발을 만들어보겠다며 머리칼을 달라고 하셨다. 나는 그걸 왜 가져가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실랑이가 싫어 그러시라고 했다.


매니저님은 단단히 묶은 머리채를 잡고 머리끈 위를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한참 자른 것 같은데 툭, 하고 떨어져 나오질 않았다.

“머리숱이 진짜 많으시네요.”

“아, 네.”

조금 뒤 분리된 머리칼 뭉치는 지퍼백에 담겨 엄마의 가방으로 들어갔다.


‘음~ 칼단발도 나쁘지 않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높이가 제각각인 머리칼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귀를 겨우 덮는 짧은 단발인데도 이만큼 오는 데에는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까.


‘지이이이잉-’

이발기에 전원이 들어왔다.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이발기의 차가운 날이 두피에 닿았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자 금세 가볍고 시원해졌다. 왼편의 민머리가 다 드러났을 무렵, 나는 그제야 거울 속 내 얼굴을 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23.08.10. 목요일.

머리칼은 push 아니고 shave.

아이돌은 NewJeans 받고 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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