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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락 Aug 17. 2023

14. 철없다.

여행도 출장도 아닌 입원이지만,


철없다
: (사람이나 그 언행이) 사리를 분별할 만한 지각이 없다.


늦잠을 잤다. 피곤한 건 아닌데, 그냥 며칠간 병원 침대에서 잔다고 생각하니 괜히 더 미적거리고 싶었다. 웬일로 초저녁부터 일찍 잠들어 밤새 푹 자고 일어난 우래기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잘 놀고 있었다. 이렇게 3박만 잘 버티면 된다.


노트북, 선풍기, 레몬사탕… 전날부터 슬기로운 입원생활을 하겠다고 부산을 피웠다. 우선 임신 때 발이 퉁퉁 부어 구입했던 크록스에 지비츠를 달았다. 뭔가 유치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무슨 일인지 꼭 하고 싶어졌다. 콘셉트는 웃는 모습이 예쁜 ’쿼카‘. 동생 A가 응원의 의미로 선물해준 쿼카 담요와 쿼카 스트레스볼까지 아주 완벽한 셋뚜셋뚜!!


- 태교하는 동안 ’쿼카, 쿼카‘ 노래를 부르며 동물 사진을 많이 봤었고, 그 덕에 우래기는 웃는 모습이 참 이쁘다. (응?) 죽기 전에 그와 꼭 셀카를 찍으리라.


문제는 내 크록스는 일반 지비츠를 달 수 없는 형태였다. 블로그를 검색해 지비츠의 뒷면 단추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는 답을 얻었고, 그렇게 한참 씨름한 결과 겨우 완성이 되었다.

쿼카는 아들을, 구름은 나를 의미했다. 자르고 넣고를 반복하는 걸 지켜보시던 엄마가 아이스크림과 분홍별똥별을 집어 이것도 달라며 내미셨다. 그 두 개는 엄마와 아빠를 의미하는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애도 아니고 뭘 그런 걸 다느냐고 타박하시던 아빠에게, 엄마는 “입원하는 동안 재밌고 싶다잖아~”라며 되려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엄마는 나의 완성된 신발을 물끄러미 보시고는 크록스를 사달라고 하셨다.

“그래, 엄마! 아빠꺼랑 우래기 것도 사자. 아빠는 뭐 달면 싫어하실 테니까 하나만 달아주자. 나 퇴원하면 사러 가! 지비츠도 예쁜 거 진짜 많아! 나도 원래 다른 거 생각했었는데 배송이 느려서 바꿨어~ 엄마는 더 이쁘게 해줄게!“


점심을 먹고 빠트린 짐은 없는지 살펴본 뒤 마지막으로 우래기 어린이집 준비물을 챙겼다. 수, 목, 금, 세 벌의 외출복과 세 개의 기저귀 주머니. 어려운 건 아니지만 매일 챙기기에 엄마가 번거로울까 싶어 미리 세팅을 해놓고 싶었다.

“엄마, 여기에 물통만 아침에 챙겨줘! 내일은 낮잠이불 갖고 가야 하니까 그것만 보내면 돼.“

알아서 잊지 않고 보내실 텐데, 이런 게 노파심이라는 걸까.


낮잠시간이 되어 졸리다고 잠투정하는 우래기를 붙잡고, 몇 번이고 인사를 했다.

”우래기! 엄마 잘 다녀올게! 세 밤만 자면 엄마 치료 잘 마치고 올 거야.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잘 놀고 있어! 사랑해!“

아는지 모르는지 이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아이에게서 ”응!“ 소리를 한 번 듣고, 엄마와 포옹을 했다.

“잘하고 와, 우리 딸! 사랑한다!”

“응, 엄마! 잘하고 올게! 사랑합니다!”

한마디라도 더하면 눈물이 흐를까 무서워 둘은 서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엄마도 서로의 눈에 눈물이 고인 걸 알고 있었다.


병원에는 아빠와 둘만 가기로 했다. 아직도 내가 어떤 치료과정을 거치는지 머릿속에 입력이 안 된 아빠는 운전하시며 다시 물어왔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마치 의사라도 된냥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6번 선항암하고, 수술하는 거지. … 그때 안 나타나면 완전관해. 아빠도 완전관해 주문을 외워. … 그 후로 표적이 14번인 거야. … 아니 아니, 수술도 표적도 무조건 하는 거야. 암세포가 어디에 떠다닐지 모르니까.“

치료 흐름을 알게 되셨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앞으로 시골집에 자주 내려가 좋은 공기 마시며 요양하라고 하신다.




병원에 도착해 입원 수속을 마쳤다. 2인실뿐이라는 데 불만은 없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조용하면 좋을 것이었다.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처럼 생긴 종이팔찌를 팔목에 둘렀다. 병원 안에서의 신분증이다.


6층은 간호간병통합병동이라 보호자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빠는 엘리베이터 유리문 앞까지 함께 해주셨다. 포옹을 나누고, 안녕을 했다. 아빠는 집안일도 잊고 아기도 잊고, 우래기는 엄마랑 아빠가 잘 볼 테니 치료에 전념하라고 하셨다. 나는 ‘네, 즈이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는 들어가서 간호사실을 찾으라고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찌르셨다.


꼭 공항에서 헤어지는 느낌이었다. 가발이지만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샌들을 신은 채로, 한 손엔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손을 흔들고, 간호사 스테이션을 찾았다. 마침 배정받은 병실 바로 옆이었다. 조금 소란한 느낌이 나긴 했지만, 생활은 편할 것이었다.


들어가서 환복 하라는 안내를 받고 들어선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금방 오겠지만, 일단 혼자이다. ‘공항놀이’에 이은, ‘호텔놀이’를 한다. 환복 후 간단히 병실 서랍장에 짐정리를 했다. 아, 내일의 일은 내일 생각하자. 당장은, 놀러 온 기분이다. 광복절, 혼자만의 시간이라니, 친구 T의 말처럼 이것이 진정한 ‘광복’이로다.


간호사 선생님으로부터 입원 생활 및 케모포트 삽입 관련 설명을 들었다. 똑같은 내용이 담긴 서면을 주지만, 서명은 태블릿 PC에 한다. 좋은 세상.

오늘은 항생제 반응 검사 외에 할 것이 없다. 내일 아침 과장님 회진이 있으니 자리를 지킬 것, 케모포트 삽입은 정해진 시간이 없이 부르면 가는 시스템 - 한두 시간 걸리는 시술이라 늦은 오후가 될 수도, 식사는 일반식 모두 가능.


이제 나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송혜교 주연의 ‘더 글로리’를 보며 밤을 맞이하면 된다. 나의 시청 계획을 들은 모두가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아직 못 봤냐고, 진짜 좋은 드라마라고, 즐거운 시간이 될 거라고.


나의 치료 과정도 진짜 즐거우면 좋겠다. 힘들어도 병이 다 낫는 즐거운 시간.


밝고 명랑하게!

나의 첫 항암 입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23.08.15. 화요일.

철 좀 없으면 어때.

나, 지금 되게 행복해, 연진아.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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