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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 Aug 02. 2023

2021년 4월 28일

나는 아빠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야, 큰일 났다. 너네 아빠 암이란다. 의사가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데 이거 어떻게 하냐.”     


 어느 날 셋째 큰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이혼하고 가구 공장 사업에 실패한 우리 아빠는 오빠와 나를 엄마에게 보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빠의 5형제는 모두 고향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첫째 큰 아버지는 시골에서 크게 사업했던 할아버지의 재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 그 지역 여러 채의 건물을 두고 세를 받아 살고 있다. 그 지역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다 아는 부자이다. 첫째 큰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할아버지가 계셨을 시절의 그 집을 지키고 집안의 중대한 일들을 모두 관리한다. 아빠의 5형제들은 나이를 먹어도 모든 일을 맏형에게 의지하고 맏형을 가장 무서워한다.     

나는 이혼 가정의 아이이기 때문에 명절이면 아빠 쪽의 시골을 갈지, 엄마 쪽의 시골을 갈지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사실 그다지 고민되지는 않았다. 친가는 심심했지만 부자인 첫째 큰 아버지는 항상 내게 용돈을 두둑이 쥐여주셨다.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인 큰 아버지가 무섭기도 했지만 초등학생인 나에게도 몇 십만 원이 되는 돈을 척척 주셨으니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항상 친가로 향했었다.     


 둘째 큰 아버지는 고향에서 컴퓨터 사업을 하셨다. 그러다 미국 간호사로 취업이 되신 큰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5형제 중 가장 가정적인 남자이다.      


셋째 큰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이다. 아내와 자식 둘, 그리고 물려받은 재산까지 모두 미국으로 보내고 힘든 서울살이를 하다가 우리 아빠를 따라 시골로 내려와 아빠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넷째 큰 아버지는 본인 건물 2층에서 당구장을 운영했다. 십 년 전 이혼을 한 뒤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물려받은 건물을 팔아 그것으로 아직까지 먹고 사신다.      


이 형제들은 맏형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첫째, 둘째 큰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이혼을 하거나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이 형제들은 명절이면 할머니 시절부터 큰 집에서 오랫동안 일한 가정부 아주머니가 해주는 반찬을 집어 먹으며 시답잖은 정치 얘기를 떠든다. 명절이면 큰집은 국회가 되었다.      



 다시. 아빠와 함께 살던 셋째 큰 아버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우리 아빠가 암에 걸렸다니, 믿기지 않았다.     


“아파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큰 병원으로 가보래.”

아빠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를 끊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 외래를 예약했다.     


 서울의 대학병원 담당 교수는 아빠에게 입원 후 검사를 진행할 것을 권했고, 입원해 검사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아빠의 건강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대장암을 진단받고 항암치료, 수술을 진행하면서도 암은 빠르게 전이되었다. 걸어서 서울로 올라왔던 아빠는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었고, 극심한 통증을 조절하려 마약성 진통제를 지속적으로 투약받다 급기야 섬망 증상까지 왔다.     



“조용히 하고 들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고 그래.”


“내가 어디 갇혀 있어.”     


 어느 날 아빠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의 아빠가. 내가 암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마주친 환자들 중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빠. 이 사람들은 아빠 도와주는 분들이야. 아빠를 해치려는 사람은 없어. 여긴 병원이고, 저 사람들은 아빠 치료해 주는 의료진이야. 아빠는 지금 아파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뱉어내며 꾹꾹 눌러 말했다. 아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검지를 입으로 갖다 댔다. “조용히 말하라니까. 아니야. 저 사람들 나를 해치려고 그래.” 아빠의 행동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야만 했다. 그 길로 멀리 도망갔다.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에 사는 친구에게까지 멀리 도망갔다. 도저히 이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ㅇㅇㅇ님 섬망 증상 때문에 밤마다 너무 힘들어요. 오늘 밤에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 우리 병원 인계 시간이면 내가 수없이 해 온 말이었다. 환자의 섬망 증상에 돌보기 힘들다고 불평하던, 못난 나에게 하늘이 벌이라도 내리는 것일까. 우리 아빠가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빠의 암세포는 빠르게 전이되어 아빠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빠의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빠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었고, 의료진이 예후가 좋지 않음을 경고했음에도 난 아빠가 죽는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괜찮아지겠지. 수술하면 나아지겠지. 항암치료를 하면 괜찮아지겠지.’     


부끄럽지만 마냥 더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정말 멍청하게도 우리에게 시간이 더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빠와 사랑한다는 말조차 나누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 아빠는 대장암을 진단받은 지 3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홀로 병실 침상에 누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빠의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했다. 명절이면 식구들에게 딸이 큰 병원에 간호사로 취직했다고 자랑했던 우리 아빠였다. 그러나 정작 나는, 나의 일터에서 내가 돌보았던 환자만큼도 아빠를 돌보지 못했다. 아빠의 병 앞에서 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빠와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아빠를 홀로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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