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계약을 해지하며
2018년
그는 그동안 자신에게 찾아온 과분한 인연들을 모두 떠나보냈다.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껴왔기에, 새로운 만남의 기회가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향해 먼저 내밀어준 손길들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그에게는 그 따스한 손길들을 잡을 용기가 없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기고 준비가 된다면, 반드시 새로운 인연이 찾아올거라 믿었기에.
2019년 4월
"우리 한 번 만나 볼래요?"
살랑이는 봄 바람이 마음을 간지럽혔기 때문이었을까. 그동안의 과분한 인연들을 매몰차게 내쳐왔던 그는, 이번에는 왠지 모를 끌림을 느꼈다. 그녀는 꽤나 유명했다. 그 역시 그녀의 이름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런 그녀가 왜 그를 찾아왔는지. 그래서 물었다. 그의 물음에 그녀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당신의 진솔함과 담백함, 그리고 스스로를 낯설게 보려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그는 무슨말인지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스스로도 잘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봐주는 그녀가 좋았다.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고 용기도 없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새롭게 찾아온 소중한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5월의 녹음이 드리우기 전, 봄 바람 살랑이는 4월, 그는 그녀와 만나보기로 했다.
2019년 8월
그는 그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서로의 일상이 바빳기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연락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안부를 물었고, 끝에는 언제나 서로를 생각하는 다정한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어요."
그는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자신을 모습을 다 보여주었고, 그녀는 그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또 다른 제안을 하였다.
"우리가 만난지 1년이 되는 내년 4월, 그동안 당신이 보여주지 않았던 모든 모습을 제게 보여주세요."
그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으니까.
2020년 1월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그녀와 약속한 해가 밝았다. 그녀가 허락한 시간은 약속을 지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와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힘들어했다. 물론 그동안 그녀가 요구한것들이 딱히 어려운것들은 아니었다.
"한식은 양이 너무 많아요. 양식은 어떤가요?"
"가끔은 스릴러 영화말고, 로맨틱 코미디는 어때요?"
"당신은 진지한 모습보다 유머러스한 모습이 더 매력있다는걸 잊지 말아요."
그는 그녀의 취향을 존중했고, 그 역시 그녀로 인해 하루하루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요구가 점차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가끔 너무 이성적이에요. 조금 더 재밌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 생각은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지 않을거에요. 다시 생각해봐요."
취향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성향마저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조금씩 지쳐갔고, 그녀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이별의 순간 또한 가까이왔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2020년 4월
그와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어느 카페에 마주 앉았다. 그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녀로부터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네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할지도 몰라요."
불행 중 다행으로 그에게도 갑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역시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결코 오늘의 만남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확실히 매듭을 지어 그동안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와 그녀는 그동안의 짧은 안부를 묻고, 누가 먼저라 할것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때까지 약속을 지키기는 어렵겠죠? 만약 그렇다면 저도 어쩔 도리가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그에게 결론에 대한 선택권은 없었다.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할 미련이나 의지가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1년 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서로에게 좋았던 추억만 간직하자며, 서로가 그리워지는 날이 오면 꼭 다시 보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