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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랑이 Apr 13. 2020

오늘 헤어졌어요

출판 계약을 해지하며


2018년

그는 그동안 자신에게 찾아온 과분한 인연들을 모두 떠나보냈다.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껴왔기에, 새로운 만남의 기회가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향해 먼저 내밀어준 손길들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그에게는 그 따스한 손길들을 잡을 용기가 없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기고 준비가 된다면, 반드시 새로운 인연이 찾아올거라 믿었기에.


    그 동안 일기를 쓰듯 혼자만의 노트에 글을 써왔다. 그러던 중 용기를 내어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예상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며 공감해주었다. 다른 플랫폼에서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브런치라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따스하고, 예의바르고, 교양미가 물씬 풍겼다. 그 때까지 그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짧은 댓글 하나하나에 인품이 느껴졌다. 덕분에 혼자 끄적이던 글을 브런치에 공개하고, 구독자들과 소통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그러던 중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brunch] 작가님께 새로운 제안이 도착하였습니다!' 라는 제목의 메일을 받았다. 출판사로부터의 도서 출간 제의였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여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답장을 했다. 물론 내 뜻은 '거절'이었다. 이후 몇 차례 다른 출판사들로부터 출간 제의를 받았지만 내 뜻은 변함이 없었다. 출판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조건 만족스럽지 않아서? 모두 아니다. 그저 책을 출간하여 '작가'라는 호칭을 얻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나도, 그리고 내 글도 말이다. 그래서 그 소중한 제안들을 모두 내쳐버렸다. 본의 아니지만 건방지게.








2019년 4월
 
"우리 한 번 만나 볼래요?"
살랑이는 봄 바람이 마음을 간지럽혔기 때문이었을까. 그동안의 과분한 인연들을 매몰차게 내쳐왔던 그는, 이번에는 왠지 모를 끌림을 느꼈다. 그녀는 꽤나 유명했다. 그 역시 그녀의 이름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런 그녀가 왜 그를 찾아왔는지. 그래서 물었다. 그의 물음에 그녀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당신의 진솔함과 담백함, 그리고 스스로를 낯설게 보려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그는 무슨말인지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스스로도 잘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봐주는 그녀가 좋았다.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고 용기도 없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새롭게 찾아온 소중한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5월의 녹음이 드리우기 전, 봄 바람 살랑이는 4월, 그는 그녀와 만나보기로 했다.


    몇 차례 출판사들로부터 출간 제의를 받은 후 약간의 기대감과 자신감이 생긴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쓴 글이 책으로 나올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작가로서의 출간을 꿈꾸기 시작했고, 이 꿈을 머릿속으로 구체화해갈 무렵, 어느 대형 출판사에서 제의가 왔다. 출판 업계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이름을 들어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출판사였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정식으로 출간 계약을 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당시 계약 조건은 초임 작가로서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뭐가 좋은지 나쁜지도 몰랐기 때문에 계약 조건에 매료되지는 않았다. 그저 책을 출간하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길 꿈꾸던 무렵, 생각보다 빨리 꿈이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루하루가 마냥 설레고 즐거웠다.






2019년 8월

그는 그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서로의 일상이 바빳기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연락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안부를 물었고, 끝에는 언제나 서로를 생각하는 다정한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어요."
그는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자신을 모습을 다 보여주었고, 그녀는 그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또 다른 제안을 하였다.
"우리가 만난지 1년이 되는 내년 4월, 그동안 당신이 보여주지 않았던 모든 모습을 제게 보여주세요."
그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작업은 이메일을 통해 진행됐다. 그동안 브런치에 게재한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내면 편집자는 수정방향을 잡아주었다. 그렇게 한편 한편 퇴고를 거쳤다. 퇴고란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기존에 써놓은 글을 수정하는 시간은 새로운 글을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써놓은 원고를 모두 편집자에게 냈다. 계약서에 2020.4까지 모든 원고의 제출이 명시되어 있었다. 서면상의 정식 계약으로 계약 조건이 이행되지 않을 시 언제든지 계약은 해지될 수 있었다.






2020년 1월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그녀와 약속한 해가 밝았다. 그녀가 허락한 시간은 약속을 지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와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힘들어했다. 물론 그동안 그녀가 요구한것들이 딱히 어려운것들은 아니었다.
"한식은 양이 너무 많아요. 양식은 어떤가요?"
"가끔은 스릴러 영화말고, 로맨틱 코미디는 어때요?"
"당신은 진지한 모습보다 유머러스한 모습이 더 매력있다는걸 잊지 말아요."
그는 그녀의 취향을 존중했고, 그 역시 그녀로 인해 하루하루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요구가 점차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가끔 너무 이성적이에요. 조금 더 재밌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 생각은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지 않을거에요. 다시 생각해봐요."
취향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성향마저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조금씩 지쳐갔고, 그녀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이별의 순간 또한 가까이왔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퇴고의 대부분은 분 줄이기였다. 내 글은 다른  에세이들과 달리 각각의 에피소드들의 분량이 과하다 하여 이를 줄이는 과정을 반복했다. 글쓴이 입장에서는 남들이 보기 좋든 싫든 내가 쓴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내새끼 같이 소중했기 때문에 이를 버리기란 결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문단을 통째로 드러낼때는 아쉬움에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편집자의 모든 초점은 독자들에게 맞춰져 있었다. 독자들이 읽기 편한 분량,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묘사, 독자들의 성향에 맞는 글까지. 결국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쓰고싶은 글이 아닌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글을 쓰고있었다. 출판사는 상품을 요구하는데, 나는 작품을 쓰려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온도차였다. 내가 솔직하게 쓴 글이라 해도 독자들이 느끼기에 가식적이라면 내용을 바꾸거나 아예 배제해야했다. 솔직하게 보이기 위해 솔직함을 감추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계속됐다. 글의 형태를 바꾸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사고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게 두려워졌고, 이내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즈음이다. 책을 출간하여 작가라는 호칭을 얻는 것이, 어쩌면 또 다시 꿈으로 남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








2020년 4월

그와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어느 카페에 마주 앉았다. 그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녀로부터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네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할지도 몰라요."
불행 중 다행으로 그에게도 갑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역시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결코 오늘의 만남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확실히 매듭을 지어 그동안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와 그녀는 그동안의 짧은 안부를 묻고, 누가 먼저라 할것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때까지 약속을 지키기는 어렵겠죠? 만약 그렇다면 저도 어쩔 도리가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그에게 결론에 대한 선택권은 없었다.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할 미련이나 의지가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1년 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서로에게 좋았던 추억만 간직하자며, 서로가 그리워지는 날이 오면 꼭 다시 보자며.


    편집자는 계약서상 명시된 날짜를 언급했고,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 안에 모든 원고의 제출이 어렵지 않겠냐고 물었다. 담담하게, 아니 뻔뻔하게 어려울 것 같다고 대답했다. 계약해지로 인한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 해는 피차 마찬가지였기에 그 무게를 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약을 이행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계약해지라는 안타까운 결론에 이른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명 아닌 변명처럼 그동안 글을 쓰며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왜 계약서상 명시된 날까지 원고를 제출할 수 없었는지 편집자에게 다 털어놓았다. 편집자는 그런 나의 변명과 응석마저 귀담아 들어주었다. 작년 이맘때 처음 만나 함께 꿈을 펼치기로 한 그 날처럼.


    그 동안 부족한 나를 작가로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던 편집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서 애써 괜찮은 척, 쿨한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약해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계약해지서에 서명을 하고, 선지급된 계약금 반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계약해지서는 등기로 발송될것이며, 그동안의 모든 원고는 앞으로 출판사와 상관없이 활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편집자는 마지막까지 아쉬운 기색을 내보이며, 추후 출판과 관련하여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연락해도 좋고 기회가 되다면 다시 한 번 함께 책을 만들어보자고 하였다. 아름다운 이별 따윈 없다지만, 우리의 마지막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나의 1년간의 '작가 도전기'는 아쉽게도 실패로 끝났다.





일단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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