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지구대 경찰관의 평범한 하루 >
[앞으로 할 일의 절차, 방법, 규모 따위를 미리 헤아려 작정함. 또는 그 내용.]
'계획'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다. 개인적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계획이라는 단계를 거치곤 한다. 계획 세우기에 때로는 강박적이기까지 한 내가 그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니.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미리 어떤 준비를 한다거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없는 일.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다.
경찰 업무 중에서도 특히 지역경찰은 계획과는 거리가 멀다. 112신고 접수 후 현장에 도착하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김없이 현장을 마주해야 한다. 그 전에는 그저 한 두 마디의 무전을 듣고 현장을 그려볼 뿐이다. 하지만 현장은 늘 예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언제나, 항상, 어김없이, 평소처럼'이라는 말과 같다.
그날 밤 역시 아무런 계획도 없는 우리에게 기다렸단 듯이 Code 1(긴급) 신고가 접수됐다.
[집에 아이가 혼자 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신속히 출동 바랍니다.]
긴급 출동 신고이니만큼 당연히 현장 대처 계획을 세울 시간 따위는 없었다.
‘아이가 잠이 들었나? 아이라면 몇 살 정도인가? 강제 개방이 필요한 상황인가? 신고자와 아이는 무슨 관계지? 아이가 누군가로 인해 문을 열 수 없는 상황은 아닌가?’
늘 그렇듯 현장에서 마주할 각종 변수들의 가설 설정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리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119에 공조 요청을 한 후 신고에게 전화를 걸었다.
“출동 중인 경찰관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랑 딸이랑 둘이 사는데 오늘 퇴근이 좀 늦었어요. 집 열쇠는 화분 아래 놓고 다녀요. 열쇠가 없는 걸 보니 딸이 집에 있는 것 같긴 한데 문을 안 열어주네요. 전화도 안 받고요.”
신고자인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딸은 대학생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에게는 다 큰 딸이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걱정됨이 당연했다. 전화통화로 대략적인 내용을 들었지만 여전히 현장 상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렇다고 경찰관이 현장 대응 계획을 세우고자 신고자와 전화통화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다. 신고자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경찰관과 전화통화가 길어질 경우 불안감만 커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이렌을 울리며 힘껏 순찰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았고 신속하게 현장에 도착했다. 신고자의 집은 다세대 빌라 3층이었다. 1층에 있는 신고자로부터 추가 내용을 듣고 가설을 설정했다.
< 가설 1. 딸은 깊게 잠이 들어 초인종 소리와 휴대전화 벨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상태 >
< 가설 2. 딸은 집 안에 있지만 신변에 이상이 있어 문을 열 수 없는 상태 >
1번 가설은 신고자에게 고지할 가설, 2번 가설은 우리가 대비해야 할 가설이다. 신고자에게는 가장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다.
“선생님, 따님이 아마 깊이 잠들었나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바로 확인해볼게요.”
“그렇겠죠? 별 일 없겠죠? 늦은 시간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주사를 놓으며 아프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간호사들처럼, 때로는 우리 역시 대상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한다. 이 거짓말이 현실이 되면 본전이고 진짜 거짓말이 되는 순간 받아야 할 비난과 질타는 물론, 그에 대한 책임까지도 당연히 우리의 몫이다. 신뢰와 책임이 동반되는 말을 뱉을 때에는, 스스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신고자와의 대화 분위기와는 달리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만약 2번 가설이 현실이 되는 순간, ‘위험방지’ 사건은 곧바로 ‘강력범죄’ 사건으로 전환된다. 상황실에 무전을 통해 119 공조 요청과 함께 추가 경찰력의 지원을 요청했다. 현장은 늦은 밤 고요한 주택가였기 때문에 잠들어 있는 주민들이 놀라지 않도록 조용히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5층 빌라 건물 중 신고자의 집은 3층이었고 외벽에 창문이 있는 방이 신고자의 딸의 방이었다. 소방관들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라펠(Rappel) 하강(*출입구 위쪽으로 로프를 고정하여 하강하거나 내부로 진입하는 방식, 앱 세일 이라고도 한다.)으로 3층 창문을 깨고 내부로 진입했다. 소방관들이 출입문을 열어줄 예정이었으므로, 우리는 신고자의 집 현관문 앞에서 대기했다. 방검복을 착용한 채 각자 플래시, 삼단봉, 테이저건 등 경찰 장구를 소지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였다.
얼마 후 창문을 깨고 들어간 소방관들이 현관문을 열어주며 밖으로 빠져나왔고, 우리는 바톤을 이어받듯 신속히 내부로 진입했다. 가장 먼저 대상자의 안전을 확보하고, 혹시 모를 침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모든 방들을 면밀히 수색했다. 빠짐없이 내부를 확인한 우리는 깨져있는 외벽 창문을 향해 밖에 있는 119 구급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부에 대상자 외에는 없습니다. 구급대원 분들은 대상자의 상태 확인 부탁드립니다.”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분명 신고자의 딸은 자기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도, 전화를 걸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소방관들이 창문을 깨고 방에 들어오고, 경찰관들이 방에 불을 켠 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조차 반응이 없었다. 119구급대원이 그녀의 혈압과 맥박을 체크한 후 말했다.
“일단 혈압과 맥박 모두 정상이고, 특별한 이상은 없긴 한데… ….”
“얘야! 아빠야!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어느 새 딸 옆으로 온 신고자가 누워있는 딸의 어깨를 수차례 흔들었다.
“어… …? 아빠… …?”
그녀는 처음으로 몸을 뒤척거리더니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119구급대원도 안심한 듯 말했다.
“따님이 술을 좀 많이 드신 것 같습니다. 다른 이상은 없으니 저희는 먼저 철수하겠습니다.”
“네? 술이요? 아… 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그녀의 아버지의 인사를 끝으로 119구급대원들은 먼저 현장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이 여성은 우리가 안 보이는 걸까?’
아무리 술에 취해 잠이 든 상태라고 해도 난데없이 자기 방 안에 119와 경찰이 우르르 몰려 와 있는데 어떻게 놀라는 기색 하나 없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신고자는 여전히 딸의 방 안에 서 있는 우리를 보고 허둥지둥 말했다.
“이런, 아직 계셨군요. 경찰분들도 이만 가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이만 철수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신고자와 인사를 나누고 그녀의 방에서 나가려는 순간, 그녀의 한 마디 덕분에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걱정스런 마음과 찝찝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저기, 경찰 아저씨. 죄송한데 나가실 때 불 좀 꺼주실래요?”
어느덧 자정이 넘은 시간, 우리는 소방관들과 구급 대원들에게도 인사를 전하고 다시 순찰차에 올랐다. 차에 타자마자 눈 녹듯 긴장이 풀리며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침대가 아닌 차 안이라도, 1시간이 아닌 단 10분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신고자는 딸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에 단잠을 이룰 것이다. 신고자의 딸 역시 내일의 숙취가 깰 때까지 달콤한 꿈을 꾸며 잠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부녀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그 밤을 지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잠들어서도, 지쳐서도 안 된다. 우리가 앞으로 맞이해야 하는 밤은 지금보다 더욱 뜨겁고, 더욱 치열한 밤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세수라도 하며 다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지구대로 복귀하던 중 무전이 울렸다.
[술집에서 남성 6명이 싸우고 있다는 집단폭력 신고입니다. 관할 순찰차 긴급출동 바랍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는 치열한 밤을 맞이하러 간다. 당신의 편안한 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