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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썰킴 May 18. 2024

슬로리딩의 즐거움(1)

1. 몰입의 즐거움

 전역 후 방을 얻어 학교 주변에서 홀로 자취를 시작하였다. 부모님의 보살핌을 벗어나, 처음 홀로 살아보는 경험이었기에 흐트러지지 말자 매일 다짐했다. 나는 무너진 학점 복구를 위해 매일 도서관에 갔었다. 전공 책을 붙잡고 씨름하던 날이면, 마음 한편에서는 문학이 그리웠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서재에서 야금야금 읽던 소설과 시의 깊고 달았던 맛들이 그리웠다. 딱딱한 공대 전공을 마주할 때면 더욱이나 많이 떠올랐다.     

 

 첫 학기를 전쟁 치루 듯 끝내고, 방학이 시작하던 날 나는 결심했다. 방학 중 재수강 과목의 시험이 끝나는 날부터 원 없이 소설을 읽겠노라고. 기다리던 전공 시험이 끝나고 나는 도서관에 가 천명관의 <고래>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간의 고독>을 골라 방으로 들어왔다. 반년 간 그토록 그리워했던 소설이었다. 희뿌연 노을이 지는 저녁부터, 동이 터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읽었다.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존재 전부를 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음 날 오후가 다 되어서야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책을 덮었다.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읽은 후 나는 흡사 먼 곳에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지만, 그 세계를 다녀왔다는 느낌. 몰입하여 읽지 않은 사람들은 생각조차 못할 내밀한 경험이었다. 내가 다녀온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평행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나는 잠시 살다온 것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머리가 해빙되는 듯 했다.     


 달리기 중 어느 지점을 돌파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경쾌한 느낌이 드는데, 이를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부른다. 나의 머리에서 해빙되는 느낌이 꼭 독서에서도 임계점을 돌파하면 생기는 일종의 쾌감, 리더스 하이readers high의 쾌감이 이건가 싶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책 말고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내 전부를 걸어 독서하는 몰입의 상태에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목적을 세워 필요한 정보만을 취사선택하고, 이야기의 맥락만을 훑고 내려갔다면 전혀 경험하지 못할 몰입이었다. 몰입을 원한다면 주위 둘러보지 않고 번지점프 하듯 책에 나를 내던져야 한다. 텍스트의 열탕과 냉탕에 나를 직접 담그고,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꽃, 나무, 들판, 산, 바다의 형상을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듯 해야 한다.       


 이런 수준의 몰입에는 시간이 걸린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가 나에게 동화되기 위해서는 느리게 읽어야 한다. 인간은 광케이블 섬유가 아니다. 책 한권을 인터넷에서 1초에 다운받는다고 해서, 그 책을 인간이 1초에 읽을 수는 없다. 작가의 언어에 익숙해지고 사고 구조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 사전 준비 작업이 끝나야 한 작가의 작품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독서의 즐거움은 속도와 반비례한다. 느리게 읽자. 즐거움의 너비와 폭, 깊이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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