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기획 발상
영화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봉준호 감독을 비롯, 90년대 초반 영화를 사랑했던 영화인들의 회고를 담은 다큐멘타리다. 이혁래 감독은 “인생에 큰 도움은 안 되지만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목적의식 없이 진정으로 즐기는 일은 30년전이 아니라 지금도 공감하지 않을까요”라며 기획 의도를 밝혔다.
기획이란 틀을 짜고 중심을 세워 주변으로 펼치며 윤곽을 그리는 일이다. 중심 개념을 부각시킬 기능과 역할을 배분해서 단계적으로 실행한다. 컨텐츠를 기획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주제를 정하고 전후로 이야기를 이어붙이면 한편의 영화가 되고 광고가 된다. 훌륭한 기획자는 생활속의 어떤 순간을 영감의 원천으로 끌어온다.
이 영화에 등장한 봉준호 감독이 그랬다.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관심이 많았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부터 설국열차와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가진자와 못 가진자가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삶의 모순이 관심사였다. 그는 거기에 몰두했고 다양한 색깔로 드러냈다. 설국열차에서는 열차 속의 수평적 세상을 통해, 기생충에서는 지상과 반지하와 동굴속의 수직적 공간 구성을 통해 드러냈다. 이게 하루 아침에 뚝딱하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일상의 관찰력이 발휘됐다. 한강변을 걷다 다리위로 올라가는 괴수의 환영을 보고 백주대낮의 습격을 그린 영화 ‘괴물’을 만들었다. 막걸리 몇잔만 걸치면 버스안에서 몇시간이고 벌어지는 노인들의 춤판이 삽입된 ‘마더’의 한 장면도 그렇게 나왔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다른 이들의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장면을 찍고 싶다’는 집착을 느꼈고 지금도 ‘그런 작고 자질구레한 집착때문에 영화를 계속한다’라고 고백했다. 관심에 몰입을 더해 그가 집착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결국 우리네 인간의 삶이다. 그러니까 기획은 사람을 관찰해서 사람을 표현하는 일이다. 기획자의 일상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사람에게서 배우는 일이다.
광고기획자로 30년 넘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박은빈은 17년전에도 삼성생명 광고 촬영장의 한 귀퉁이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려 노력한 음전한 친구였다. ‘무인도의 디바’가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혼신을 다해 연기할 것이다. S-Oil 광고에서 차승원과 손예진을 누르고 주연의 역할까지 따내며 쵤영장을 휘잡은 싸이 박재상은 프로다운 면모가 지금도 그때같다. 최근 공연이 끝났음에도 스탭의 실수로 노래가 다시 흘러나오자 어떻게 했을까? 인생은 원래 이렇게 다시 시작되는 거라며 다시 공연을 펼쳐 관객을 열광시켰다.
모델이야 잠깐이라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연도 있다. 광고 출세작일수도 있는 ‘좋은기름이니까, S-OIL’캠페인을 함께 만든 에스오일의 선진영 전무다. 그는 실행이 불가능한 아이디어를 제안한 우리의 실수를 차분하고 배려깊은 의사결정으로 만회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회사를 퇴사한 뒤 쓴 책을 들고 찾았을 때도 반갑게 손을 잡아끌어 자신이 아는 대형 서점을 소개해 준 일도 있다. 아직도 자신의 생각에 갇혀 남의 말을 끊으며 예단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그와 자주 만나 진지하고 온화한 말과 태도를 새기다보면 가랑비에 옷이 젖듯 닮아가길 기대해본다. 사람이 선생인게 기획자 뿐이랴. 누구든 그렇다. 언제든 어디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