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댓바람부터 일기를 쓰고 싶어지는 날이 많지는 않은데 마침 오늘이 그런 날이라 한번 써 본다.
지난 밤, 불을 끄고 방에 들어가면서 '내일 일어날 때 너무 어두우려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집을 떠나는 순간에도 불이 다 꺼진 집안을 어두웠다. 하지가 지난지도 거의 한달 반. 이제야 한참 여름인 것 같지만 해가 짧아져 느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앞으로 세달 정도는 꽤 덥고 건조한 날씨가, 다섯달 가까이는 바닷물이 너무 차갑진 않은 날들이 계속 될거라는 걸 위안삼으며 바다에 도착했다.
6시 15분에 딱 맞춰 도착한 바다는 흐렸고, 난 여전히 잠이 깨지 않았지만 어제 빙수와 함께 한 약속 때문에 서둘러 웻수트를 입고 보드를 내렸다. 모래를 밟자 발이 조금 시릴 만큼이나 차가웠는데 물 속엔 벌써 사람들이 몇 있었다. 독하고 대단한 놈들이다. 하지만 나도 어쩌다보니 이 시간에 물 속에 들어와 있기는 하고....
물은 모래보다 따뜻했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모난 곳 없이 매끈한 수면에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하늘이 비쳐 푸른 빛의 회색 하늘이 하늘부터 바다까지 이어져 있었다. 물에 들어가 그 날의 첫 파도를 기다리는 기분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조금 무섭고 설레고, 주로 어느 곳에서나 가장 겁쟁이 쫄보인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인업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파도를 기다리지만 파도는 나를 한참 지나쳐 멀리 안쪽에서야 부서진다. 조금씩 안쪽으로 이동하며 보드를 돌리고, 뒤를 흘끗거리며 패들 타이밍을 보다가 결국 파도를 놓치거나 가끔 호기롭게 잡고 올라탄 파도에서 와장창 무너져 버리는 일이 대부분 이지만 작년에는 훨씬 더 했다. 그저 두렵고 막막하고 파도를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 뒤로, 더 뒤로 물러서다가 그 날의 서핑을 마치고 돌아온 날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찌되건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파도를 기다린다. 여러 날들을 파도에 (쳐)맞고, 헤쳐 나가고, 그 속에서 구르기도 하며 익숙해진 덕분일까 덜 두려운 마음이다. 가끔은 바다가 나와 친구들의 위해 준비된 놀이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넓고 아름다운 곳에서 부드러운 물 덩어리들이 끊임없이 오고 밀려가는.
오늘의 파도는 생각보다 느렸고, 언제나처럼 나는 파도가 죽는 곳에 있는 편이라 이리 저리 위치를 잡던 중 동쪽 하늘에 붉은 빛이 스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택가 사이로 난 오르막 도로 너머 해가 올라왔다. 처음엔 조그마한 밝은 점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깜짝 놀랄만큼 크고 붉고 완전하게 둥근 태양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맑아질 것 같은 하늘이긴 했지만 이런 일출을 보리라는 기대를 안 했던 터라 새삼스럽게 감동적이었다.
오래된 고방유리처럼 자그마한 볼록거림이 있는 매끄러운 파도는 이제 겨우 뜬 태양에서 쏟아지는 빛을 모조리 반사해버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늘부터 이어진 파다의 어디쯤에 파도가 오는지, 얼마나 크거나 작은 지도 알 수 없었다. 가끔 멀리서 오는 파도 위에 작은 금빛 점들이 점묘화처럼 생겼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파도가 오는구나' 하고 짐작할 뿐.
운 좋게 파도를 잡아 희게 부서진 파도를 뒤고 하고, 청록빛 파도남은 매끄러운 파면을 따라 해변 가까이 닿았을 무렵 돌아본 바다에는 하필이면 큰 셑이 왔고, 끊임없이 오고 부서지고 그 뒤로 또 와서 부서진 물거품들이 정면에서 오는 붉으스름한 태양빛을 받아 금색 복숭앗빛으로 빛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고싶은 풍경이었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이 모든 것들 속에서 함께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른 다시 라인업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쉽도록 아름다운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