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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Jul 05. 2023

남편의 슬기로운 의대 생활

수빈이를 알게 되고 얼마가 지나 별의별 핑계를 대며 자주 만나기 시작했을 즈음. 그러니까 연인이 되기는 조금 전, 나는 수빈이가 미국으로 대학교를 가게 될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정이 이루어진 후 수빈이는 다니고 있던 학교의 학점을 왕창 말아먹을 만큼 나와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수업에 안 가기도 하고, 시험은 대충 보고 얼른 나와 나와 서울에서, 일산에서, 지리산에서 놀았다. 


수빈이는 의사가 되는 길을 걷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이미 정해져 있던 길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내비쳤다. 나는 보통의 사람보다 조금 더 자주 병원에 가고 많은 의사를 만나며 자라온 사람이라 내 친구가 의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고 멋있게 느껴졌는데 엄마는 꽤 자주, 많이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의사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나보다는 잘 알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 이후로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3년, 의대 4년. 총 13년의 시간이 흘렀고 수빈이는 드디어 의사가 되려 한다. 그 시간을 모두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것은 아니었지만 첫 7년은 장거리 연애를 하며, 그 후 6년을 한 집에서 살며 수빈이와 함께하고 보니 우리가 스무 살, 수빈이가 막 그 길을 시작할 때 엄마가 걱정했던 것 보다도 더 외롭고 고된 과정이었다고 느낀다. 

수빈이가 학부 생활을 하던 중에도 편지와 블로그 일기로 서로의 일상을 자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수빈이는 진짜 힘든 이야기는 나에게 하지도 않았던 거였다. 그래서 나는 수빈이의 학교 생활이 보람되고, 즐겁고, 낭만적이기만 한 줄 알았다. 아니, 사실은 수빈이가 힘든 내색을 조금 하긴 했어도 그것에 대한 공감을 지금보다 덜 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혼자 유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보거나 들은 것이 없어서 그것이 얼마나 외롭고 혹독한 지 몰랐고 내가 아는 외로움과 어려움에 빗대어서만 상상할 수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은 수빈이가 남긴 글들을 읽으면 자꾸 눈물이 난다. 잘 지내는 내용의 글을 읽으면 그 어린 스무 살 애기가 혼자 그 모든 것을 해낸 게 너무 대견해서 코 끝이 찡해지고,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내용, 학업에 대해 좌절하는 내용의 글을 읽으면 대체 얘는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싶어서 마음이 무너진다. 내가 있어서 견딜 수 있다고, 큰 힘이 된다고 수빈이는 언제나 말했지만, 지나고 보니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그래서 제대로 얘를 위로해 주거나 다독여주지도 못했던 것 같다.


수빈이를 만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이 애의 다정함과 섬세함에 정말이지 깜짝 놀라는 일들이 많았는데 함께 살고 보니 그 섬세한 마음이 불안에 얼마나 취약한 지도 종종 느끼게 된다. ‘나 같은 마음으로 의사가 되어도 될까’ 하는 식의 걱정을 나에게 이야기할 때면 나는 늘 ‘다들 그런 마음으로 의사가 되었을 거야. 사명감과 확신에 가득 찬 사람만이 의사가 되어야 한다면 세상에 의사가 너무 부족하지 않겠어?’ 하는 식으로 수빈이를 위로했지만, 사실 나는 속으로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애야 말로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은 모르는 것 같지만 꽤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 의사가 되지 않으면 대체 누가 의사가 되어야 하는 거냐고. 



자기는 시험을 잘 볼뿐이라고, 머리가 좋은 건 다른 거라고 자주 이야기 했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은 그런 말에 코웃음을 치게 된다. 보통 사람의 머리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수빈이는 박사 과정을 하는 중에도 수도 없이 ‘그만둘까’ 하는 이야기를 했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에 큰 흥미가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이었는지는 몰라도, 박사 학위를 받기에는 부족한 연구라고 자주 이야기 했고 그렇게 얻은 박사 학위를 민망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지만 그것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받을 만하니 받은 것이 아닐까, 많은 학회에 갈 수 있었고 상도 받았는데 그게 정말 부끄러운 결과일까' 의구심도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봐 온 수빈이는 확고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달려가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내가 아는 수빈이는 한 가지 일에도 수십 번 ‘이게 맞나’ 되묻고, 잘하고 있는지, 여기가 맞는지 계속 발아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조금은 불안에 떨기도 하면서 한 걸음씩 꾸준히 내딛는 종류의 사람. 그래서 사실은 정말 멀리까지도 가게 되는 사람이다. 

본인이 세상 살기에는 힘들지 몰라도 이 애와 손 잡고 발맞추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파트너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믿음직스럽다. 하지만 때로는 파트너의 입장이기 이전에, 이 애의 행복을 너무 바라는 마음이 자꾸 일렁거려서 '그냥 우선 너무 걱정 말고 질러봐, 잘 되겠지. 망해도 뭐 어때' 하고 부추겨 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나와 보리구름이 역시 수빈이의 섬세함과 사려 깊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수빈이가 의대 3학년을 시작할 때, 걱정이 되는 마음도 컸다. 분명히 넓은 관점에서 길게 보면 수빈이는 좋은 의사가 될 거라고 믿지만, 몇 주 단위로 여러 과들을 돌며 매번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일해야 하고 처음 하는 것들을 배우고 평가받으며 2년을 보내는 건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런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수빈이는 모든 과를 잘 다녔다. 몸이나 마음이 유난히 더 힘들어서 고생을 한 과들이 있긴 했지만 그런 과를 다니면서도 거의 늘 병원에서는 시간이 너무 빠르고, 정말 힘들지만 아주 재미있다고 말했고, 드문 케이스의 환자를 보게 되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쁨과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죄송함이 섞여 마음 복잡해했다. 

모든 과의 첫 주는 ‘정말 말도 안 되게 피곤하다’면서도 마지막 주에 이르러서는 ‘이거 할까….’ 하는 고민을 할 만큼 정말 모든 과에서 배우고 일하는 시간을 충실히 보내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자랑스러웠고, 수빈이가 의사가 되어서 너무 많이 불행하지는 않겠구나 싶어 다행스러웠다. 


수빈이가 시험에 스트레스를 받긴 하지만 공부하는 것 자체는 좋아하는 것을 알았고, 시험을 보는 것도 수빈이 주변의 ‘천재 의대생’ 수준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잘 해내는 것도 알았으니 그 걱정은 적었다.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라면 즐겁게 일하고 그 사이에서 인정을 받는 것도 한동안 보아 왔으니 그저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길 바랐다. 

걱정되었던 것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환자를 만나는 일에서 수빈이가 혹시 주눅 들고 상처받지는 않을지 하는 것. 사람을 대하는 일은 모두 쉽지 않지만 큰 병원에서 만나게 되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더 그럴 것이었다. 오래전 엄마가 동생과 삼촌을 간병했을 때, 엄마가 항암치료를 하러 수 차례 입원했을 때 옆에서 지켜보며 병원 생활이 사람을 얼마나 소진시키고 곤두서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았다. 

그런 병원에서 정식 의사가 아닌 그 일을 배워가는 학생이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이해뿐만 아니라 배우는 이의 단단한 마음 역시 필요할 것 같았다. 수빈이가 이곳에 자신이 있어도 되는 곳이라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느끼게 될까 궁금했다. 


하지만 수빈이는 병원에서도 훌륭히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스스로를 사회성이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고 하고, 내가 보기에도 다수의 사람과 있을 때보다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이 보이는 수빈이지만 의외로 병원에서는 환자 만나는 것이 수빈이에게 에너지를 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마음을 쓰느라 애가 닳고, 퇴근 후 집에 와서도 차트를 꼼꼼히 쓰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공부하느라 완전히 방전된 채 침대에 눕지만 환자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환자가 어떻게 나아졌는지 이야기를 할 때 수빈이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수빈이가 자신이 담당했던 모든 환자들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많이 슬퍼했던 순간들과 의사가 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애를 쓰느라 녹초가 되기도 했던 밤들도 옆에서 지켜보았다. 무엇인가에 분노하기도 했고, 의료인으로서 좌절을 느끼는 것 역시 보았다. 그리고 또 수빈이가 얼마나 환자들에게 사랑받고, 신뢰받고, 동료들로부터 인정받고, 덕분에 맘껏 배우고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받았는지도 들었다. 

어떤 사람이던 마음을 다해 소통하고 맡은 일에 잔꾀 부리지 않으며 보낸 시간 덕분에 수빈이는, 많은 격려와 축하를 받으며 이곳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아니 슬기로운 의대생활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던 2년이었다. 

매치 결과를 받은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아 실감도 다 나지 않는 지금, 수빈이가 ‘정말 열심히 해야지’ 하고 다짐해도 분명 지치고, 번아웃이 오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시기가 오겠지만 그 시기 역시 잘 헤쳐 나갈 것 같다.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건 수빈이의 장기이자 특기이고, 그런 수빈이를 다독이고 맛있는 걸 먹이는 게 특기인 나와, 수빈이를 쿨쿨 재우는 게 특기인 고양이들도 함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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