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경길엔 언제나 밤이 찾아왔다. 차 뒷좌석에 기대앉아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항상 고속도로, 국도 그 어디쯤이었다. 양옆으로는 구멍 난 듯한 어둠 아래 거대한 산의 그림자가 차들의 별빛 행렬을 엄호 중이었다. 유독 어릴 때부터 어둠을 무서워했던 나는 주위가 어두워지기만 하면 온갖 상상을 작동했다. 귀신, 사고, 테러, 재해, 외계인의 침공... 그중 1위는 갑자기 호랑이나 들짐승이 나타나 덮치는 상상. 이어 드는 생각은 '우리 차는 정말 안전하다'는 믿음이었다. 현대기술의 산물인 자동차에 사고로 통칭되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내게 차는 안전한 곳이었다. 아늑한 온도와 엔진의 진동이 불러주는 자장가, 깨는 순간 갖은 짐을 들고 추위를 향해 문을 열어야 하는 고됨 직전의 포근함까지... 그렇게 나는 언제나 조수석 뒷자리의 딸내미였다.
면허 취득을 가장 먼저 제안한 건 엄마였다. 하지만 차도 없고(살 계획도 없고), 뚜벅이 여행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데다 운전을 하게 되면 그 어떤 분위기에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을 손해라고 여겼던 나는 몇 해가 지나서야 생각을 바꿨다. '내년엔 운전면허학원 비용도 오르고 더 어려워진다'는 반복되는 속설에 해가 바뀌기 전 12월, 인근의 학원으로 향한 것이다.
노란 봉고차를 타고 도착한 학원은 아담한 버스 터미널을 연상케 했다. 조용하지만 어수선한 분위기 속 나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당도한 수강생들과 피곤한 낯빛으로 삼삼오오 모여 믹스커피를 홀짝이는 강사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능한 날은 이것뿐이니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라는 식의 뚝뚝한 설명을 귀담아듣고 50만 원을 건네자 수업, 주행부터 시험 일정까지 속전속결로 배정받을 수 있었다. 당일치기 안전교육에 이어 주차 게임에서나 보던 도로맵 위에서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방지턱은 둔덕을 지르밟는 것이요, 후진은 성난 뒷걸음질이었다. 행여 주행차를 다치게 할세라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시험 직전의 마지막 일정은 도로주행, 일 때문에 오후에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고 남은 시간은 새벽뿐이었다. 강사님도 나도 피차 개운하지 않은 어스름한 시간 우리는 학원 근처 도롯가에서 자리를 바꿔 앉아 연수에 나섰다.
필기와 주행을 하루에 해치워야 하는 결전의 날이 왔다. 단시간 파고들며 공부한 결과 필기 94점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받아 들고 이번엔 주행 시험대에 올랐다. 십수 년간 수도 없이 걸어 다녔던 익숙한 동네를 이제는 차로 헤집을 차례였다. 긴장하며 요동하던 앞사람의 탈락을 지켜보고 뒷사람의 관찰을 견디며 가야 할 때와 멈출 때를 준수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차를 제자리에 세웠을 땐 87점이었고 시험관은 나지막이 합격을 알렸다.
"(브레이크) 미리 밟아야지." "그게 아니지."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라니까." "천천히 밟어 천천히!!" "좀 더 속도 내고." "뭐 하냐? 환장하시겄네."
시속 60 도로 위, 엄마와 동생을 뒷좌석에 태우고 아빠에게 첫 주행연수를 받으러 나온 날이었다. 세 살부터 살아온 이 오래된 신도시에서 유모차를 탔고 자전거를 배웠으며, 버스와 지하철에 올랐다. 드디어 자동차 핸들을 손에 쥐게 된 순간, 아빠의 채근과 질책이 30초에 한 번 꼴로 쏟아졌다. 전방과 후방, 사이드미러까지 신경 쓰느라 사시가 될 지경이었다. 노여움 뒤는 눈물. (운전) 안 하겠다며 도롯가에 차를 멈춘 뒤 언제나 그랬듯 조수석 뒷자리로 돌아갔다. '가족끼리는 운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던 통설만 확인한 하루였다.
의기소침한 채 면허를 장롱으로 반납하려던 나를 다독이며 북돋워준 건 역시나 엄마였다. 물론 엄마도 내게 "뭐 하냐"고 자꾸 물었지만, 마트로 쇼핑몰로 병원으로 은행으로 카페로... 목적을 두고 한 번 두 번 시동을 걸며 조금씩 감을 찾아갔다. 덤프트럭과의 동행과 고속도로를 썩 선호하진 않아도 무면허에 머물렀다면 갈 수 없었을 이곳저곳을 유람했다. 가끔씩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 앞차를 들이받고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리는 '꿈'을 꿨지만, 꿈은 꿈일 뿐이었다. 몸이 익힌 감각은 순서를 외지 않아도, 좌우를 구분 짓지 않아도 견고하게 자동화를 이뤄갔다.
운전 인생 최대의 고비가 찾아왔던 그날은 엄마, 동생과 함께한 강릉 여행 2일 차였다. 경포대 일대를 돌아다닌 첫날은 화창한 날씨와 푸르게 눈부신 바다, 맛있는 음식이 술술 넘어가는 완벽한 하루였다. 이튿날은 비 예보가 있었지만 그 때문에 여행의 속도를 당기거나 늘릴 순 없었다. 체크아웃 전 숙소 루프탑에서 편의점표 달디단 커피와 수박(바 맛) 시럽음료를 마실 때까지만 해도 하늘은 멀쩡했고, 되려 걱정스러운 건 수개월 전 화재로 거뭇거뭇해진 솔숲의 안위였다.
여유로운 해안도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접어든 시내, 운전은 쉽지 않았다. 신호보다는 눈치껏 가야 하는 길이 너무 많았다. 신도시의 비단결 같은 도로교통에 익숙했던 나는 타지에서 왠지 모를 운전 텃세를 느끼며 핸들을 꼭 붙잡았다. 설상가상으로 날은 우중충해지고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배가 아파왔다. 10년 넘는 삼성의 충성고객으로서 삼성디지털프라자 찬스를 쓰고 나서야 내비의 고삐를 집으로 돌렸다. 강릉 IC로 빠지는 길, 강릉교도소 표지판을 본 동생이 물었다.
"범죄자가 교도소에 수감되면 원래 살던 전세, 월셋집은 어떻게 돼?"
자취와 거취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대학생의 순수한 질문이었지만 앞으로의 운행에 걱정을 미리 몰아쉬던 나는 '교도소'라는 세 글자에 한껏 예민해졌다. '이 길에서 잘못되면 그 수감자는 내가 될지도 몰라....'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주행은 딱 10분 정도였다. 강릉을 벗어나자마자 평창 대관령의 안개가 급습했다. 어디에 특수효과팀이라도 있는 건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였다. 비상등을 (간절하게) 깜빡이며 안전거리를 최대치로 확보한 채 조금씩 나아갔다. 시력도 멀쩡하고 밤도 아닌데 겨우겨우 짚어 걷는 듯한 기분. 당황스러웠다. 차키로 편하게 문을 잠그고 50미터를 걸어갔다가도 '정말 제대로 잠갔는지' 다시 돌아가고, 뽑은 플러그가 '다시 꽂혀' 있을 것만 같고, 재차 확인 후 작성한 서류도 다르게 썼을 것만 같은 나였다. 내가 바로 앞에 있던 차를 보지 못하거나 다른 차가 우리를 보지 못할 것 같은 망상까지!
안개가 걷히며 앞서가는 차들의 모습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안개가 퇴장하기 무섭게 폭우가 하늘을 꿰찼다. 횡성쯤에 다다르자 비가 미치게 쏟아졌다. 안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싶게 와이퍼 속도는 빨라지고 1차선의 차들이 스칠 때마다 위험 신호가 진동과 함께 계속해서 전해졌다. 도로를 찢으며 나아가는 기분. 수륙양용차도 아닌데 이대로 가는 게 맞나 싶고, 머릿속에는 '빗길 교통사고' 여섯 단어로 가득했다. 살면 다행이고 아니면 모든 걸 잃는 도박의 굴레 속에서 나는 운전자도 사람도 그저 아니고만 싶었다. 돗자리를 펴고 앉은 경포대 해변, 명경막국수에서의 알찬 점심, 홀로 거닌 선교장, 세 모녀 강릉 여행을 기념하는 유쾌한 저녁과 이른 아침 숙취를 삼킨 채 강행한 경포대 산책의 순간이 와이퍼 구호에 맞춰 깜빡였다.
멈춘대도 답 없는 고속도로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도 가도 못하는 정신을 붙들고 조금씩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요란한 운행이 끝을 보일 무렵, 비보다 조금 먼저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꺼진 시동과 함께 차 안에도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고 그제야 어깨가 내려왔다. 긴장하며 어찌나 힘을 줬는지 어깨부터 허리,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혼자가 아닌) 가족을 태웠다는 사실은 나를 더 두렵게 했지만 동시에 책임감도 쥐어주었다. 흔들거리는 배 위에서 노를 쥔 채 얼어붙은 나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엄마와 동생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내 뒤에서 멀찌감치 간격을 유지하며 꽤 먼 길을 함께한 하얀 트럭 운전자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예기치 못한 하늘의 장단에 모든 전의를 상실했던 여정. 운전(자)의 자격을 잃은 것 같기도, 허들을 쓰러뜨리지 않고 무사히 왔으니 이제야 진짜 자격을 얻은 것 같기도 하다.
에필로그
고속도로 위에서 시속 20을 웃도는 아다지오 주행의 결과는 일반적인 도착시간으로부터 불과 15분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