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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Dec 13. 2020

유서를 보내는 법

아니, 일단 쓰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


모 교수님이 강의 도중 재밌는 일화를 이야기해주셨다. 사실 전공자들끼리 얘기할 때나 빵 터지는 종류의 재수 없는 농담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교수님이 학생 때 후배와 필드트립을 가야 했는데 그 후배의 룸메이트를 통해 그가 컴퓨터에 유서를 작성해두고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은 사색이 되어서 미친 듯이 그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질 않다가 한참 뒤에야 연락이 되었다.


“너 어디야? 왜 전화를 안 받아?”
“네? 저 아버지 태우고 운전 중이었어요.”

운전? 죽겠다고 유서를 쓰고 나간 사람이 아버지와 같이 있어?
 
“너 임마 그, 컴퓨터에 유서 쓰고 간 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 형 그거 성격심리학 과제...” <좌중 웃음>


다음부터는 성격심리학 과제로 유서쓰기 내줄 때 꼭 제목에 ‘성격심리학 과제’라고 써붙이도록 제안해야겠단다. 나는 성격심리학 시간에 꿈 일기 쓰기나 본인의 mbti 유형을 활용한 보고서 작성하기 이런 걸 했었는데(지금 생각해보니 교수님이 융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어쩌다 성격심리학 시간에 유서쓰기를 시켰던 걸까. 과제를 내 준 교수님은 어떤 의도였을지 잠시 생각해봤다. 유서를 쓰면서 학생의 내면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길 바라셨던 걸까.










유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는 몇 년이 되었다. 대학생 때 꼭 성격심리학 수업이 아니어도 다른 여러 강의에서 유서를 쓰게 시킨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나도 한 번 써 볼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뜻 손이 가질 않아서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 유서는 어느 정도 분량으로 쓰면 되는 걸까? 나는 남겨줄 유산도 없고 누군가에게 죽기 전에 꼭 말해야 하는 절절한 진심 같은 것도 아직 없(다고 생각하)고 법적인 분쟁에 있어 내 의견을 분명히 밝혀두어야 하는 지점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유서엔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까? 이런 것들이 하나도 감이 잡히지 않았음에도 막상 ‘유서’라는 빈종이가 머릿속에 들어오고 나니 20대가 다 가기 전에 한 번쯤 무언가 끄적여보고 싶게 생겨선 내내 둥둥 날아다녔다. 내 유서에 무엇이 적힐지 궁금했다. 그리고 누구에게 가장 말을 많이 하게 될지.






그러다 대학원에 와서 명상과 상담 시간에 드디어(!) 유서는 아니지만 자신의 비명碑銘을 적어보라는 교수님을 만났다. 길어봤자 폭이 좁은 다섯 줄짜리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남들의 비명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버나드 쇼처럼 웃기게 적어볼까?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 순간 난 이미 따라쟁이가 된다. 엄마가 썼던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비명도 생각났다. 내가 떠올리기 어려우면 다른 사람이 되어 날 본다고 생각하고 써 볼까? 하지만 남들이 내 인생을 어떻게 다섯 줄로 정리하겠어.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그 차이를 구분하는 지혜를 주소서.”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도 생각났다. 내가 이 지혜를 얻고 죽었다고 가정하고 적어볼까. 하지만 이것도 내 마음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이 기도문이 내가 원하는 내 삶의 마지막 모습에 가장 가까워 보여서 여기에 퍼스널라이징을 조금 더해서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업시간에 썼던 이 비명은 이사하면서 버렸다. 쓰레기통에 넣기 전에 버릴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심사숙고해서 적은 건데 아깝지 않아? 하고. 하지만 진짜 비명을 적어야 할 때가 된다면 내 삶과 생각은 또 바뀔 것이고 내가 썼던 비명이 정말 내게 오래 남는 의미를 담았다면 버린 뒤에도 기억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그대로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도 내가 뭐라고 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비명을 질렀던 종이가 두꺼웠고 펄이 들어간 인디핑크 색깔이었던 것만 생각난다. 이렇듯 언어는 너무나 덧없고 허무하다. 하지만 바로 그 언어가 내가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꾹꾹 눌러 유서를 쓰고 딱딱하고 차가운 돌을 파 내어가며 비명을 기록하는가보다.





그래서 돌고 돌아 유서에 대체 뭘 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교수님들은 유서나 비명을 적어보며 학생들이 자기 삶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들을 하나씩 찾아보면서 내가 어떤 가치에 전념하며 살아왔는지 생각해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유서는 글이고 더 정확히는 편지라고 생각한다. 편지에는 필연적으로 받는 이가 있어야 한다. 받는 사람이 누군지부터 정하면 거기에 뭘 쓸지도 자연스럽게 생각나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마지막 말을 전하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내 말을 다 하기로 결정한다면 유서의 분량은 책 한 권이 되어버릴 것이다. 내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말을 해주고 싶은 사람, 지금으로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냥 나 자신이었다.





 유서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 정확히는 ‘죽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이 편지를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죽은 나에게 살아있는 오늘의 내가 어떻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유서를 써서 살아있는 내일의 내가 읽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지금 미리 유서를 써 둔 뒤에 죽은 다음에 태워달라고 하는 것도 목적을 완수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죽은 사람에게 무엇을 보내거나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그것을 태우는 것은 인류 역사상 유구한 전통이다. 하지만 그것은 태우는 물질이 산 사람에게 있어 진귀한 것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이미 죽고 사라진 세상에서 내가 나에게 쓴 편지가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서를 받는 이에게 어떻게 부치면 좋을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지평 너머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서의 최종 목적지는 수신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유서를 쓰고 남기고 떠나는 이는 유서의 출발지이자 목적지일 수도 있겠다.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유서가 눈 앞에서 날아다니는 모습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끊임없이 그 위에 무언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유서는 완결 짓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멈추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 삶이 그러하듯이.




*천희란, “자동 피아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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