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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Nov 29. 2021

구슬처럼 동글동글 쏟아지던

나는 아직 서투른 마음인가 보네

혼자 사는 사람에게 과일은 사치라고들 말한다. 나무 한 그루가 일 년 내내 최선을 다해서 피워낸 과육은 똑 따자마자 빠른 속도로 물러가고 썩어가기에 빨리 먹지 않으면 냉장고 안에서 잊힌 채 쉽게 시들어버리게 마련이다. 게다가 다른 모든 식재료가 그렇듯 과일은 많이 살수록 저렴하고, 적게 살수록 금값이 된다. 그래서 과일은 쉽게 먹기가 어려워 아껴먹게 되었고, 역설적이게도 아껴먹을수록 더 많은 과일들이 썩어 나서 쓰레기장으로 보내야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수박은 혼자 먹기 정말 어려운 과일이다. 혼자서 한 번에 절대 해치울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한 번 개봉을 하면 칼날이 스치고 간 안쪽의 과육이 공기 중에 노출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세균 감염이 될 확률이 높아져서 최대한 빨리 먹을 수밖에 없다. 혼자 몸으로 수박 하나를 쪼개 먹는 것은 거의 도전에 가깝다. 수박을 혼자서 먹는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수박은 늘 누군가와 함께 먹는 과일이었다. 그게 누가 됐든.








수박화채는 어린 시절에 어느 무더운 여름 학교에서나 먹던 간식이었다. 그것도 마지막 교시가 체육시간인 어느 여름 땀을 뻘뻘 흘리고 흙먼지를 휘날리며 교실에 들어와 집에 갈 준비를 할 때 즈음 종종 먹을 수 있던 별미였다. 화채를 준비해 주시던 분들은 같은 반 친구들의 엄마들이었다. 한창 잘 먹을 나이의 아동 청소년들을 맛있게 먹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양의 수박과 탄산이 필요했을 텐데, 그것들을 전부 이고 지고 학교까지 올라와서(학교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언덕이나 산 위에 서 있나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나누어 먹였던 마음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손이 많이 가고 품이 많이 드는 만큼 엄마 마음이 한 움큼 들어간 간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정성이 담긴 화채를 많이 먹고 어른이 되어서 남을 위해 화채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갔다. 대학교 새내기 때는 축제 기간에 친구들 손에 이끌려 주점기획단이라는 TF팀에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화채 파트를 맡아서 동기들, 선배들과 함께 어떤 구성으로 화채를 만들지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거친 후 딸기와 후르츠칵테일 등이 들어간 화채를 만들어다 팔았다. 그 화채에 수박이 들어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무거운 수박을 나르고 칼로 썰어서 손질하는 것이 귀찮아서 뺐던 것 같기도 하다. 후르츠칵테일은 맛을 위해, 딸기는 비주얼을 위해 넣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해 사회학과 주점 화채는 무척 시원하고 달콤했지만 수박 큐브가 빠져서 어딘지 허전하게 느껴졌다.






어른이 되어 열심히 화채와 그 밖의 것들을 제 손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버텼다. 그러다 나이를 좀 더 먹고 학생에서 사회인이 되어 다시 막내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 첫 사회생활에서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는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때 되면 맛있는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생신을 맞으면 생일상을 차리고 간식을 썰고 차를 우렸다. 계절이 바뀌면 그 계절에 맞는 과일을 쟁여뒀다가 썰어서 내드렸다. 간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아무래도 겨울이었다. 큰 쟁반 두 개에다가 귤을 스무 개쯤 아무렇게나 쌓아 두고 명랑한 목소리로 “귤 드세요~”라고 외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힘든 계절은 단연코 여름이었다. 무거운 수박을 낑낑대고 옮겨다가 제일 큰 식칼을 가지고 블라우스 앞섶에 달큰한 수박 물을 튀겨 가면서 수박을 조각내는 일은 너무 귀찮고 힘들었다. 행여 큼직한 식칼이 엄지손가락을 도려내기라도 할까 봐 벌벌 떨면서 수박을 썰어 어른들에게 대령했다. 얼른 끝내고 싶어 두꺼운 수박 껍데기를 썽둥썽둥 자르던 내 손놀림을 보고선 같이 수박을 썰던 언니가 “예진아 나 무서워…….”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늘 받아먹기만 하던 온실 속의 화초가 험한 세상에 나왔는데 아직 별 능력이랄 것도 갖추지 못했고 너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이거라도 하거라, 하고 하게 된 일이 여름내 수박을 썰어대는 일인가 싶기도 했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이런 거라도 해야지 어쩌겠어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여자애 둘이 낑낑대며 수박을 반으로 가르고 잘 익은 뻘건 과육을 어떻게 하면 먹기 좋게 조각낼까 궁리하고 있던 차에 지나가던 제일 큰 ‘어른’이 보다 못해 들어왔다. 이건 그렇게 썰어서 되는 게 아니지. 이리 줘 봐라. 아가씨들 잘 보세요. 하고선 한쪽 손을 주머니에 비집어 넣고 나머지 손으로 칼자루를 대충 쥐고 슥슥 칼질을 몇 번 하니까 수박 과육은 예쁜 화채 조각들이 되어 도르르 굴러 떨어졌다. 이런 방법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렇게 잘할 거면 처음부터 당신이 직접 하지 그랬어요, 라는 투정이 목구멍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그래도 여긴 한국이잖아, 제일 어린 사람이 제일 궂은일을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지금은 육체노동을 하느라 조금 짜증 나서 볼멘소리가 하고 싶겠지만 어른들이 썰어준 수박을 받아먹는 것도 얼마나 불편하겠어. 그래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밖에 없다면 이거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싶은 마음으로 남은 시간들을 보냈다. 결과적으로는 덕분에 화채를 손쉽게 썰어 먹는 방법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래서 1인 가구이면서도 과감하게 수박을 사 먹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쉽게 해 먹을 수 있다면 그만큼 더 자주 먹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수박 한 통쯤은 쉽게 해치워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얻은 노하우로 여름내 화채를 맛있게 잘 해 먹을 수 있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수박에 가로 세로줄을 그으면서 네모진 수박조각을 대접에 쏟아낼 때 남모를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쏟아낸 수박에 블랑 맥주를 부어 두 배로 맛있게 먹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름밤을 시원하고 알싸하게 보내고 있던 차에 아주 예전에 먹던 수박이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밥을 먹고 나면 늘 사과나 배를 깎아서 주셨지만 여름 한정으로 수박을 썰어 주시기도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꼭 수박을 동그랗게 잘라서 주셨다. 동그랗게라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스쿱으로 아이스크림을 동그랗게 퍼서 주듯이 움푹 파인 동그란 숟가락으로 수박을 ‘퍼서’ 주셨다는 뜻이다. 할머니가 수박을 해 주시는 날이면 수박을 먹기 전부터 벌써 재밌는 구경이 난다. 잘 익은 수박 한 통을 반으로 잘라서 숟가락으로 동그랗게 삭삭 퍼서 그릇에 똑 떨어뜨리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대접 위로 알알이 떨어지는 빨갛고 동그란 수박들은 꼭 한 알씩 따다 담은 포도송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박을 다 푸고 나면 대접은 꼭 매끄러운 보석이 가득 담긴 크리스털 보석함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 동그란 수박들을 포크로 집어서 먹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할머니는 음식을 할 때 꼭 이렇게 보기도 좋고 먹기에도 편하게 해서 주셨다. 수박을 푸는 장면을 신나서 구경하는 우리들을 보던 따뜻한 눈빛도 생각이 난다.






수박을 잘라먹다가 잠시 행복한 기억을 꺼내 들여다본다. 기억을 끝까지 재생하고 나면 다시 내가 먹던 수박 그릇으로 눈을 돌린다. 분명 어디서 배운 솜씨로 기가 막히게 썰어다가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좀 서툴러 보인다. 열심히 잘라서 혼자 다 먹어 보겠다고 내놓은 수박인데 왜 이렇게 비뚤비뚤 못나 보이는지 모르겠다. 할머니가 만들어 줬던 수박은 맛있게 먹고 많이도 웃었으면서 왜 할머니의 수박 만드는 솜씨는 하나도 닮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당신의 손 끝에 담긴 마음을 더 많이 들여다보고 더 열심히 받아뒀어야 했던 것일까? 네모나고 서투르게 잘라먹는 수박을 보면서 저 모서리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저렇게 벼려져 왔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구슬처럼 동글동글하게 쏟아지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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