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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Dec 27. 2021

그러니 소원 빨리 말해 봐.

일 초만 더 생각해볼게요

겨울에 태어나서일까 정말 더위를 끔찍하게 타는 반면 아무리 추워도 목도리 하나면 너끈히 버틸  있는 열기를 쥐도 있기도 하다. 겨울에는 내가 좋아하는 달콤하고 따뜻한 음식도 많이 먹을  있는 데다가 온 세상이 생크림 케이크처럼 하얀 눈으로 덮이는 모습을 질릴 때까지 바라볼 수도 있다. 이래도 겨울을 사랑하지 않을  있을까. 그이의  해가 어땠는지와 무관하게 서로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수고했고 고생했다는 안부 인사를 전하고, 내년에는  좋은 일만 가득할 것이라는 축복을 주고받을  있는 12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최근 의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코로나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연말에 한 번은 봐야지, 라는 이야기가 오고 간 오래된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였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엄마가 해 주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친구는 평생 친구니까 잘 만나야 돼. 그 이야기를 듣고 어렸던 내가 알고 있던 엄마의 친구분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친구라는 건, 내가 나중에 커서 결혼을 해서 애를 낳고서 나만큼 키워놓고서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친구라는 말이지. 학업 스트레스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고민과 더불어 여기서 어떤 친구를 만날 지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안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정말 아이가 하나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 서른을 앞둔 지금 고등학교 친구에게 소원팔찌라는 것을 선물로 받았다. 그것도 세 개나.






소원팔찌의 존재는 익히 알고 있었다. 손목에 차고 다니다가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재는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것이기도 하고, 개성 있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디자인 때문에 내 주변에도 소원팔찌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소원팔찌를 끊어먹었고 내심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 사람들도 몇몇 보았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소원팔찌를 해 준 친구는 몇 주 전 각자가 좋아하는 색깔을 슬쩍 물어보면서 디자인과 색깔을 골랐다고 이야기했다. 스스로 나름대로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바퀴를 넘어 두 세 바퀴를 돌려서 물어본 탓에 무언가 선물을 고려하면서 묻는다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반갑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내가 평생 좋아해 왔던 빨간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팔찌였기 때문에. 소원팔찌 포장지에는 색깔별로 어떤 소원이 해당되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동봉되어 있었다. 내 팔찌들의 메인 컬러인 빨강은 돈, 사랑, 열정, 힘, 욕망이라는 소원을 관장하는 색이었다. 내가 평소에 바라 마지않던 소원들과는 조금 동떨어진 주제이긴 했지만 기분이 좋아지긴 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가이드라인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올해의 끝에 세 개의 소원팔찌가 생겼다. 달리 말하면 갑자기 빌어야 할 소원이 세 개나 생긴 것이다. 아니, 같은 상황도 이렇게나 부담스럽게 해석을 할 줄이야. 하지만 나는 웬만한 상황은 부담스럽게 해석하는 왜곡된 자동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내친김에 세 개의 소원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다. 마침 시기도 연말이니 내년에 어떤 일이 생기면 좋을지 세 개 정도 고민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싶다. 팔찌도 하필이면 딱 세 개를 주다니. 알라딘이 된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세상 절망스러운 refrise를 불렀는데 갑자기 램프요정 지니가 나타나서 너 나 같은 친구 없을걸? 하면서 one wish or two or three? 를 물은 기분이 든다. 소원을 어떻게 비는 것이 좋을까. 내가 올해 가장 못했던 것, 아쉬웠던 것을 딱! 반전시켜서 내년의 소원으로 삼을까? 하지만 그러면 2022년은 단지 2021년의 못난 부분을 극복하는 한 해로 흘러가게 된다.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바라 마지않던 것을 다 끌어와서 그중에 세 개를 골라볼까? 하지만 30년을 살아도 못 이룬 것이 1년 안에 될 리가 없잖아. 게다가 그런 것들은 대부분 내 의지와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일 가능성이 높다. 알라딘, 세 개의 소원을 앞둔 알라딘은 어떻게 소원을 빌었지? 정말 어리석게도 며칠 전 딱 한 번 만난 여자를 다시 보려고 소원들을 소진했다. 멍청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 멍청함을 발휘할 만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소원 빌기도 어렵구나. 세상에 쉬운 것이 없네. 첫 번째 소원은 소원을 잘 빌게 해 주세요,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 오늘 점심 메뉴로 무엇을 먹을지, 그 음식을 가장 잘하는 곳이 어디인지 정하는 것도 사실은 쉽지 않다. 모처럼의 여유가 생긴 하루를 어떤 일들로 채워 나갈지를 고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들을 모두 마친 뒤에 해가 저물고 그날의 마지막 식사를 할 때 즈음 그날 하루가 내 마음속에 어떤 느낌으로 자리하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색깔일 수도 있고 소리일 수도 있고 감촉일 수도 냄새일 수도 있다. 나는 소원팔찌의 붉은색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고 오늘 마신 와인의 주황색 라벨 컬러가 무척 마음에 든다.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여전히 재즈 캐럴을 즐겨 들으며 짧았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랜다. 첫눈이 온지는 오래되었지만 잠깐 장 보러 나갔던 새 내렸던 눈을 맞고 겨울의 냄새를 맡으며 이것을 올해의 첫눈으로 삼자고 마음대로 다짐한다. 아직 하루가 다 저물지 않았지만 이런 재료들이 어떻게든 어우러져서 12월의 어느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다시 고등학교 때로 잠시 돌아가 본다. 3년 내내 우리 반 급훈이 뭐였는지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1학년 때 우리 옆 반 담임은 내가 좋아하던 철학 과목 선생님이었고 그 반 급훈은 지금도 생각이 난다. “행복은 우리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사건을 어떻게 재배열할 것인지, 어떤 소원과 소망을 정해두고 바라며 살아갈 것인지 얼마든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데서 행복은 벌써 시작된다. 소원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내가 만들고, 내가 파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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