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그것은 마법에 가깝지
사는 게 버거워질 때 당신 생각이 나더군
당신이 있어 늘 고마워
-'당신생각' (duet with 강승원), 양희은-
"오, 음악." 덤블도어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멋진 마법이여! 자, 이제 각자의 기숙사로 돌아가 쉬도록 합시다."
어릴 적 해리포터를 좋아했다. 사실 지금도 무척 좋아한다. 위의 인용구는 책을 펼쳐보지 않고 머릿속에서 바로 꺼내 적은 것이다. 원문과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아마 거의 비슷할 것이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10회독 넘게 했고 대사와 상황은 줄줄 외울 지경이다. 해리는 호그와트에 입학해 마법의 모자를 통해 그리핀도르에 배정을 받고 첫 연회를 즐긴다. 연회에는 음악이 뒤따랐고 호그와트 교장 알버스 덤블도어 교수는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작중 덤블도어의 나이는 약 150세이고 호그와트 교장직은 50여 년 동안 맡아오고 있다. 학기 시작 연회에서 음악을 듣는 상황은 50번 넘게 지내 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음악보다 더 놀라운 마법을 매일 접하며 사는 늙은 마법사도 음악을 들으며 운다니. 해리포터 10회독 중 6회독 정도 했을 때 이 사실이 좀 의아하게 다가왔다. 음악이 마법보다 더 놀라울 수 있나? '음악'이라는 말과 '마법'이라는 말을 한눈에 담아보았다. 그리고 한 문장에 담아 말하고 써 보았다. '음악은 마법이다.'
지금 라디오에서는 스탠딩에그의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김이나의 '별이 빛나는 밤에' 프로그램에 선곡된 곡이다. 익숙한 선율과 가사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내가 잘 아는 소리가 들려오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치 오랜 여행 끝에 집에 돌아온 기분이랄까. 여행이 아니더라도 어디 먼 곳을 다녀온 뒤에 집에 돌아오는 과정에서 내게 익숙한 동네의 풍경이 보이는 순간부터 심리상태가 안정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나는 본가가 있는 동네의 큰 병원이 보이는 6차선 도로에 진입하면 그런 기분을 느낀다. 택시를 타고 마지막 좌회전을 기다리는 줄을 서 있다 보면 벌써부터 집 안에 들어간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것. 아는 노래를 들을 때 이런 기분을 느낀다.
오늘은 하루종일 집 안에 머물면서도 어딘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에 동동거리던 하루였다. 해야 할 것은 많은데 시간은 그보다 더 많아서 여유가 생겼을 때는 또 즐기지도 못하고 불안해만 하던 시간이었다. 묘한 긴장이 사라지지 않아 부러 몸을 움직여 주의를 분산시키려 안 해도 되는 청소와 빨래도 하고 장도 봐 왔다. 역시 몸을 움직이니 번잡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여세를 몰아 더 많은 것들을 해볼까 했는데 이 이상 하다가는 해야 할 중요한 일에 집중을 못 할 것만 같았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순간에 긴장의 끈을 가위로 탁, 하고 잘라 느슨하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그것도 늘 듣던, 너무나 익숙한 음악.
오피셜히게단디즘. '히게단'으로 줄여 부르기도 하는 밴드인데 한국말로 '수염 난 남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수염이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도 재밌는 음악을 계속해 가고 싶다는 의지를 담아지었다고 하는 일화는 덤. 이 노래는 희한하게 마음을 울렁울렁하게 만든다. 울렁울렁 이 뭐냐면, 그러니까, 종이를 물에 적시는 것 같달까. 종이를 물에 적시면 빳빳하던 재질이 물컹물컹하고 구불구불하고 부드러워지지 않나. 인트로의 기타 리프가 흘러나올 때부터 해 질 녘 노을과 골목 사이로 사라지던 친구들의 뒤통수가 떠오르는데 노랫말이 속삭여지면서부터는 잔뜩 굳어있던 마음이 그만 부들부들해져 무너져 내린다. 이건 뭐랄까, 마법 같다.
그래, 이건 차라리 마법이다. 내가 오래전부터 찾아 헤매던 마법은 어쩌면 음악이었을지 모른다. 잔뜩 굳어진 마음이 익숙한 선율 하나에 부드럽게 녹아내리던 순간은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그 긴장과 경직된 상태를 망치로 깨부수듯이 없애버린다. 감정은 이성의 영역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무엇이다. 기분이 안 좋아진 이유를 설명하는 방법은 수십 가지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 그 수십 가지의 수수께끼를 전부 풀어서 답을 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들은 기분 좋은 노래 한 곡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어제는 아무 소식 없던 텃밭에 오늘 아침 피어오른 새싹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하루가 오색으로 물든다. 이런 기분 좋은 음악을 수혈하는 일은 마음에 끊임없이 물을 주는 것과 같다. 물을 주면 무엇이든 잘 자랄 것이다. 이미 자라고 있던 나무는 푸른빛을 더할 것이고 땅 속에 깊이 파묻힌 씨앗에서는 뿌리와 싹이 돋아날 것이다. 또, 마음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찐득하고 새까만 암흑 물질을 그 물이 조금은 묽게 희석시켜 줄지도 모른다. 이게 마법이 아니고선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