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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Mar 31. 2023

봄이 오면 기다리는 것

그런데 내가 뭘 기다리고 있었더라

겨우내 방 안에 늘어선 화분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흙으로 빚은 여러 개의 화분들은 찬 겨울 방 안의 무겁고 싸늘한 공기에 그만 바짝 얼어버린다. 화초들은 말 그대로 얼음덩어리. 일 년의 주기 안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풀들도 겨울잠을 잔다는 말을 믿게 된다. 사실 이 말은 내가 방금 막 만들어냈다. 누군가가 먼저 쓰고 있었다면 아마도 우린 말이 잘 통할 것 같군요. 아무튼 식물들은 마르거나 시들어 죽지는 않지만 더는 성장하지도 않는 시간을 약 석 달 동안 보내게 된다. 지난 겨울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줄기와 이파리 사이에서 무언가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솟아나길 바라며 흙과 텅 빈 줄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시간이 길다.










3월을 맞이하여 몇 개의 파종을 했다. 코로나에 걸려 자가격리를 했던 작년 3월 초에는 집에서 굴러다니던 바질 씨앗을 솜발아시켰다. 그리고 격리 해제된 후 흙을 사다가 심었다. 올해는 바질도 바질인데 좀 다른 것들도 키워보고 싶어졌다. 우선 2월에 서울식물원 씨앗도서관에서 대여해 온 벌개미취 씨앗을 심기로 했다. 씨가 그리 작지는 않지만 무척 얇고 좀 기다란 느낌이 든다. 초등학생 때 마루로 된 교실 바닥을 만지다보면 종종 손톱 밑에 박히던 가시가 연상되는 생김새이다. 두 번째로 로즈마리를 골랐는데 작년에 파종하고 남은 씨앗들이 잔뜩 있어 좀 심어보기로 했다. 발아율이 50%밖에 안 되는 까다로운 녀석이고 작년에 뿌렸던 씨앗 중 딱 반절에서 본잎까지 봤다. 그러나 전부 가을부터 시들시들하더니 모두 죽어버려 남은 게 하나도 없어 올해 재도전해보기로 했다. 둘 다 솜발아를 굳이 할 필요는 없다고 해서 바로 작은 화분에 여러 개를 빙 둘러 얹고 흙을 살살 털어 위쪽을 덮어 주었다. 싹이 날 때가지 흙이 마르지 않게, 그러나 너무 축축해져서 씨앗이 썩어버리지는 않게 수분 관리를 해 주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창가에 조심스레 올려두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 오늘은 싹이 트지 않았나 하고 매일 아침마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작은 화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흙더미 위를 노려본다. 물을 막 뿌린 배양토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라 기대감을 더한다.







그런 아침이면 기대감에 벅차올랐다가 곧바로 실망감을 느낀다. 자고 일어났는데 어제 밤까지만 해도 없던 싹을 발견하는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그런데 그 기대감이라고 하는 것이 꺼지는 순간 그렇게 허무하고 아쉬울 수가 없다. 필요한 조건만 모두 충족이 된다면 싹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일텐데 마치 오늘처럼 내일도, 모레도, 다음주도 영영 아무 일도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영원히 아무것도 없는 이 순간에 박제되어 머물러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그리 낯선 감각이 아니다. 이 감각은 기대감에 뒤따르기 때문에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깊숙이 내 몸을 관통한다. 설레하면서 동시에 실망하고, 앞으로도 계속 멈춰있는 채 전진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은 반드시 틀렸으면 하는 자기충족적 예언이 된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굽이치는 레일의 맨 위 꼭지점으로 차르륵하고 올라가서 아래로 곤두박질치기만을 벌벌 떨며 기다리는 그 찰나의 몇 초를 길게 늘여 보내는듯한 기분이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비단 새싹만은 아닌 것 같다. 단지 새싹뿐이라면 이렇게나 높은 기대와 깊은 실망감을 느낄 리가 없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것은 비단 새싹 뿐만이 아니다. 몇 개의 메일링 서비스를 구독하고 있다. 메일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세대를 아우르는 트렌드나 누군가의 일상과 루틴, 자기 일에 열심히 매진하는 모습, 멋진 공간에 대한 소개. 어떤 메일은 매일 오고, 어떤 메일은 매 주 오며 불규칙하게 필자가 원하는 때에 보내주는 메일도 있다. 불규칙한 메일 가운데서도 비교적 자주 보내주는 것이 있는 반면 한 계절에 한 두 번 정도, 잊을만 하면 보내주는 것도 있다. 매일 도착해서 별로 놀랍지도 않은 메일이건 어쩌다 한 번 와서 매번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지는 메일이건 아무래도 좋다. 요즈음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는-이리 사소한 것도 일과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다면-구독 전용으로 분류해둔 메일함을 매일 뒤적거리며 새로고침 하는 일이다. 혹시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소식은 없을지, 새로 오는 것은 없는지 기대하면서 메일함 옆의 숫자가 (1)로 늘어나진 않나 꼼꼼히 체크한다. 그러다 시계를 보면 이미 늦은 오후이고 정말 그렇게 중요한 메일이라면 진작에 도착해서 다 읽어봤겠지, 할만한 시간이 눈앞으로 지나간다. 그래, 중요한 소식이라면 이렇게 늦게까지 도달하지 않아 사람을 애먹일 리는 없겠지. 







기다림이 뭐길래.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극적인 기다림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그 자리에 서서 옴짝달싹 못하고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바라고 또 바라는 일인 것 같은데. 나는 지금 가지고 품고 있는 것들 중에서는 그 무엇도 없애뜨린 게 없는데도 마치 오는 길에 중요한 걸 흘리고 질질 우는 애처럼 굴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아니, 그보다는 매일을 새롭게 떠나보내는 중인가? 씨앗처럼 언젠가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올만한 미끼들을 흙 위든 물 속이든 허공이든 어딘가에 잔뜩 뿌려둔 뒤에 그것들을 분실한 셈 치고 되돌려받기만을 간절기 바라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싹이 나든 잔뜩 불어 부피가 무럭무럭 커지든 제비 입에 물려 내 손안에 떨어지든 뭔가를 되찾을 수 있겠지. 현재의 성과와 소득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만 같은 시간을 어떻게든 긍정하려면 내가 무언가를 잃어버렸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은 앞으로도 내 것이 아니어도 괜찮지만 잃어버렸다면 반드시 되찾아야 하니까. 내가 이렇게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걸음을 달리는 것은 그것을 찾아내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소식 없고 변화도 없는 현재의 일상을 그런대로 긍정할 수가 있게 된다.







무엇인지 모를 잃어버린 그것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약속을 누구와도 한 적은 없다. 그런데 어쩐지 꼭 지켜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든다. 해도 잘 비치지 않는 척박한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들은 나와 약속한 적이 없지만 자기들끼리 몇 날 며칠부턴 고개를 들어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자!고 다짐이라도 한 듯 3월만 되면 일사불란하게 싹을 밀어올린다. 혼자만의 보물찾기를 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경건해진다. 너희들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였어도 포기하지도 않고 봄만 되면 다시 만나자는 지난 겨울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내고야 마는구나. 이제부터는 나도 같이 약속해. 우리 열심히 고개를 밀어올려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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