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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Feb 03. 2020

하나만 챙길 수 없는 코미디 각본에게

영화 <해치지 않아>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치지 않아>라는 코미디 영화를 보고 관객이 웃었다면, 장면의 대부분은 어설픈 동물탈과 동물의 몸짓을 흉내 내는 인간의 유사행위이지 않을까. 어딘가 눈이 몰려 보이는 사자, 열심히 흉내 내는 직원이 오버랩되는 고릴라, 나뭇가지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있는 나무늘보,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콜라를 마셔대는 북극곰까지. 물론 영화는 이 동물들의 탈을 단순한 웃음의 영역으로 밀어 넣지만은 않는다. 탈을 쓴 인간이 관람객들의 시선과 조롱을 감당해내는 장면 또한 그려냄으로써 인간에게 동물원의 동물을 진정으로 볼 권리 있는가를 끄집어내고자 한다. 익살스럽고자 하는 이 상업영화는 그 익살스러움의 괴리감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의 무게마저 견디고자 한다. 그 시도는 과연 성공적이었던 걸까.   



  이 괴리감을 전면으로 세우는 장면이 바로 극의 절정, 동물원이라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실제 곰과 곰의 탈을 쓴 인간이 부딪히는 액션이다. 바로 곰의 머리 탈을, 온갖 스트레스로 자극받은 북극곰이 잡아 뜯어버릴 때 말이다.  우리가 보고 웃었던 우스운 어설픔이 뜯겨 나가고 그제야 버둥거리는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제까지 우리는 왜 '동물원 안의 동물'이라는 유사행위를 보며 웃었을까. 영화 속 동물원 속 동물과 동물원 관람객과의 상하관계는 사실 영화 밖 동물 이미지를 관음 하는 영화 관객들에게도 적용되는 재현이 아니었을까. 인간이 동물을 관음 하고, 간편한 -그야말로 귀여우며 통제 가능한- 이미지를 누릴 수 있다는 권리를 너무 당연하게 전제한 것은 아닌가. 이쯤 와서 생각해본다. 이 글은 영화 리뷰가 아닌 그저 동물권에 대한 옹호만으로 보일까? 내가 직접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래서 사실 영화가 이면에 담고 싶었던 묵직한 메시지와 상반되는, 그의 시나리오가 유도하는 유머의 코드들이다. 리고 그 코드들은 주로 동물탈을 쓴 인간들이 우리 안이 아닌 우리와 동물원의 바깥으로 넘어갈 때 영화가 쥐고 있는 메시지를 이탈한다.

 


  결말부 외에도 영화의 스펙터클을 활용하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동물원 직원들이 동물탈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설프게 고릴라를 흉내 내던 직원 건욱(김성오)은 짝사랑하는 해경(전여빈)의 복수를 위해 편의점에 내려와 난동을 피운다. 결국 이성을 잃은 인간의 모습은 동물과 흡사하다는 것을 은유라도 하듯이 고릴라의 실감 나는 모습과 그에 어울리지 않은 도시의 편의점은 분명 웃음코드로 작동하고자 한다. 결말부 괴리감이 동물탈과 인간 겉모습의 충돌이었다면, 이 영화 초반의 유머는 동물탈과 인간 행위의 일치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 코드는 흡사 민가를 들쑤셔놓는 멧돼지를 연상시키는 그 장면에서, 너무 쉽게 영화 <킹콩>의 이미지를 대입시킨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놓은 포악한 짐승의 성난 이미지만을 취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영화의 인물들이 인간의 시선을 '당하는' 동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그들이 우리 안에 있을 때가 아니던가. 그러나 이들이 우리를 박차고 나와 탈을 쓴 채로 '걸어 다닐 때', 그러니까 고릴라가 편의점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자이언트 나무늘보가 고릴라의 등에 업혀있을 때 동물탈은 관객에게 편안히 웃음만을 안겨다 줄 수 있는 인공의 이미지로 변모한다. <해치지 않아>가 이를 주요한 유머로 작동시키고자 한 과정은 사실상 영화 속 짧게 지나간 북극곰의 분노 장면과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다.


  

상업영화인 <해치지 않아>가 당면한 과제는 애초에 너무 많았다.  기면서 감동까지, 안전한 교훈과 메시지까지 전달해야 하는 한국 영화계의 어처구니없는 흐름 속에서 애초에 종합 선물세트가 아닌 영화를 기대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조차 거리감을 좁히기 힘든 동물의 인용 방식과 그가 자아내는 이미지에 뒷걸음질 치는 <해치지 않아>는 그렇다고 손재곤 감독 특유의 B급 감성을 밀어붙이지도 못한다. 개발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친환경'을 단 손쉬운 결말에 정착하는 이 코미디 시나리오는 끝까지 웃기는 영화도 되지 못한다. 그것이 설령 영화 한 편만의 탓은 아님을 모두가 안다  할지라도 영화의 아쉬운 점을 한 편의 글로 써내는 작업은 여전히 유효하다 믿는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허탈감은 그렇게 설명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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