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어긋냄'에 관한 어떤 책 소개, 아차산, 믿음이니 사랑이니 하는 얘기를 각각 따로 듣다가 10년 전에 본 이 영화가 생각나 옛 글을 뒤적였다. 강산이 한 번 변한 오래전 과거에 쓴 글이고 그 뒤 홍상수 영화가 많이 나와 고치거나 부연할 게 많지만 그러기엔 시간도, 의욕도 부족하다. 부족한 대로 옛 글을 올려본다.
각각 4개의 단편이 모아진 장편이다.
1. <주문을 외울 날 >-진구의 이야기
이선균-진구, 문성근-송교수
2. <키스왕>-송교수, 진구, 옥희 각자의 이야기
이선균-진구. 정유미-옥희. 문성근-송교수
3. <폭설 후>-송교수의 쓸쓸한 이야기
(문성근, 정유미, 이선균)
4. <옥희의 영화>
같은 장소에서 각기 다른 남자를 시간의 차이를 두고 만난 '옥희'의 이야기, 혹은 옥희의 영화.
옥희-정유미. 문성근-늙은 남자. 이선균-젊은 남자
같은 배우가 각각의 옴니버스에서 같은 직업군으로 나오지만 꼭 같은 사람의 얘기 같지는 않고,
1인 다역의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 건가? 싶다가 다른 꼭지에서의 대화를 보면 시공간이 약간 차이 날 뿐 결국 같은 내용이다. 듣(보) 다 보면 저마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각자의 기억과 입장, 시간에 따라 그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고 대화자는 같은 사람인 듯 아닌 듯 그려진다. 각자의 일상도 얼핏 비슷하지만 시간의 순차적 흐름 없이 왔다 갔다 한다.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그리면서 '누구에겐가'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얘기다.
'반복과 우연, 그 반복 속의 작은 차이'를 어떤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차용해서 풀어놓는 게 홍상수 영화의 반복적 주제다. 옥희의 영화는 특히 시간과 공간에 더 집중한 영화다.
홍상수의 주인공들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곳은 현재 자신이 발 붙이고 사는 공간은 별로 없다. 다른 어떤 곳으로 가야 된다. 강원도(강원도의 힘), 춘천/경주(생활의 발견), 통영(하하하), 북촌(북촌방향), 아차산(옥희의 영화)등의 특정 공간이 있고 겨울과 여름의 '계절'이 있다.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 한 토막을 호출하기 위해 미래의 공간으로 간다. 그곳은 안동이니 경주니 북촌이니 통영 같은-과거의 뉘앙스가 강한 공간이다. 그 과거는 시간 연대순의 순서 있고 정리된 기승전결의 서사가 아니라, 한 장면만 오려낸 것(곳)으로 같은 시공간과 상황에서 저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기억과 반응, 그 결과의 미세한 차이들이다.
'하하하'나 '해변의 여인'이 여름 영화라면 '북촌방향'이나 '옥희의 영화'는 겨울 영화다. 그래서인지 여름 배경은 홍상수 영화 중에서도 좀 즐겁고 귀여운 맛을 느낄 수 있고, 겨울 영화는 아무래도 쓸쓸한 느낌이 좀 더 난다.
홍상수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가 지질한 문화예술인들이다. 예술이 별반 대단한 것도 아니고 인간을, 세상을 구원해 줄 수도 없다고 냉소하면서 세상 또한 뭐 또 달라질 것 없으니 '예술'속으로, 그 속에서 적당히 (숨어서) 살아야 된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홍상수의 평소 지론으로도 보인다. 그들은 세상이나 자기 자신을 바꾸려는 어떤 의식이나 노력도 없으며, 진지한 대화마저도 아주 뜬금없이 생뚱맞게 내뱉아서 관객은 낄낄거리며 웃지만 유쾌한 웃음은 아니다. 영화 만든 우리도 보는 너희도 무슨 예술, 철학 행위에 참여하는 같지만 모두 '속물'이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는 식의 냉소와 쓸쓸함의 쓴웃음이다.
나는 홍상수 영화 속에 드러나는 인간 상, 세계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그의 마니아라고 할 수도 없는데 꽤 많이 봤다. 굳이 극장에서 안 보고 집에서 봐도 되는, 어쩌면 극장에서 정자세로 보는 것보다 집에서 침대에 삐딱하게 기대 보는 게 더 어울리는 영화가 홍상수 영화다. 이것은 스케일이나 미장센의 문제는 아니고 홍상수 특유의 나른하고 시니컬한 분위기나 일상성에나이가 들수록 집에서 영화 보는 게 더 편해진 이유 탓이 크다. 또 20대엔 과장되고 극단적이거나 센 분위기의 영화를 좋아했는데 나이 들면서 직설보다는 은유, 상징의 화법이 편하고 한 가지 단정적 결론을 내주는 것보다 불확실한 결말이나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들이 좋아진 이유도 있다.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마다 왜인지 철학자 k의 글 속에서 본 문장이나 이미지들이 자꾸 생각난다. 짧은 순간에 어긋나는 관계들, 우연과 반복의 일상, 소문과 고백을 양산하는 주인공들이 그랬다.
이 영화를 보면서는,
「세속의 복잡성과 타인들을 몸의 조건 속에 (거의) 선험적으로 매게 하는 '인간됨(being-human)의 현상 속에서, 쾌락의 자리는 획일화하고 표현화한 '공간'이 아니라 삶의 물질감이 베어든 '장소'인 것이다.」 같은 문장이 생각났다. 단 홍상수가 영화나 자기 골방 '안'에 모인 몇 명이 '인생이 뭐 별거 있냐, 있겠냐?'라고 시시끌렁 거리는 '수다'라면 , 철학자 k는 여럿을 '마당'으로 불러내 '별거 만들어보자는'몸 공부'이다.
김훈의 에세이에도, 김기덕의 '봄 여름.... 그리고 봄'에도 홍상수의 이번 영화에서도 '아차산'이 나온다. 그 외 어떤 오래된 영화에서도 이 산 이름을 몇 번 들었던 것 같고, 산 이름의 어원도 한 번쯤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난다. '아(앗) 차!' 할 때의 뭐 그런 뜻이 있었던가?
'같음(속)의 차이'에 대해 끈질기게 얘기하는 홍상수는 '아름다운 차이를 가진 산이 아차산'이라고 농담같이 얘기했었다.
늙은 남자와 젊은 남자의 아름답거나 슬픈차이인가.
감독-홍상수. 출연-정유미, 이선균, 문성근. 2010
4개의 옴니버스로 이루어진 영화 속에서 내가 뽑은 대사들
1. 주문을 외울 날
" 책이나 읽읍시다. 세상이 이렇게 썩어 버리면 우린 책으로 들어가야 해요. 책뿐이 없어요."
세상이 썩었으니 책 밖으로 나와 썩은 세상과 싸우거나 고쳐보자는 게 아니고, 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이 말은 짐짓 웃기면서 홍상수식 냉소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보니 문성근 자신은 영화 속 인물들에 투영되는 홍상수의 철학, 영화 밖 사담에서의 세계 관등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지만 '예민한 감수성과 다른 세계관을 지닌 예술가 곁에 있으면 행복하다.'라고 했다.)
3. 폭설 후
옥희의 영화는 이 영화 이전에 본(나온) 홍상수 영화 중 쓸쓸함이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지는데 그 '쓸쓸함'의 공은 단연 송교수(문성근)다. 송교수를 이루는 근간은 냉소와 쓸쓸함이다
몇십 년 만의 폭설이 내린 날 강의실엔 아무도 안 오고, 빈 강의실을 보며 송교수는 학생들과 자신 사이에 '믿음, 신뢰, 약속' 같은 것이 어겨졌으며 무시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옥희와 진구 둘은 늦게라도 강의실로 오고, 무거운 질문들이 가볍게 왔다 갔다 한다.
(방금 전까지 믿음이 무너져 무시당했다고 이제 고만둬야겠다던 송교수는) 믿음이나 사랑에 대한 신봉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갈 때에라야 비로소 믿음이나 사랑 비슷한 게 생길거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굴 가르치거나 현명해질 수 없으며 내가 하는 중요한 일들 중 잘 알고 하는 건 없고, 무언가를 안다고 내 삶이 달라지지도 않으며 변하지 않는 마음이나 진리도 없고 내 바람대로 살아지는 삶도 아니며, 누구나 뭐를 굳이 믿으려 할 것도 없고 니 자신의 삶이니 네가 믿고 사는 방법밖에 없다고 피로의 달관 투로 말한다. 또, '좋은 사람'은 없으며 단지'어떤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꼭 해야 하나요?
연애 말이냐
아뇨 그냥 사랑하는 거요
사랑 절대로 하지 마- 정말로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딱 버텨봐. 그때 뭔가를 사랑하고 있을걸-
사람들은 서로를 못 믿나요?
원래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지. 혹시 네가 관대해지면 그만큼 믿을 수 있겠지.
우리는 사람인가요, 동물인가요?
그거 알아봐야 뭐 별로 달라지는 거 없을 것 같은데.
뭘 믿고 살아가야 할까요?
네가 믿고 사는 거니까 네가 찾아야지. 그냥 네가 믿는 거야. 네가 결정하는 거야.
어떤 게 현명한 거죠?
아... 현명한 거? 내가 현명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선생님 제가 좋은 사람인가요?
뭐... 어떤 사람한테는.
살면서 뭘 젤 원하세요?
글쎄... 오늘은 이걸 원하고, 낼은 저걸 원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그렇게 되나? 그렇게 생각해도....
왜 사랑하세요?
면서 정말 중요한 것 중에서 내가 하는 것 중에 내가 왜 하는지 알면서 하는 건 없어. 없는 거 같아.
'부러진 화살'에서 피로에 절은 귀차니즘 판사로 나왔던 문성근은 두 세 컷의 짧은 출연으로도 아주 임팩트 있는 인상을 남겼었는데, 이 영화에서의 송교수에서도 사실적 연기의 정점을 보여준다.
냉소, 자기 연민, 피로함등이 뒤섞인 속물 지식인을 표현해내는데 문성근 이상의 적역이 없을 것 같다. 문성근식 사실주의 연기들은 어찌 보면 각기 다른 작품에서 비슷한 연기 패턴을 보이는 것 같으면서 사소한 차이들이 또 그 변별점을 만들어 주는데 그 '비슷함 속의 차별성'은 그래서 홍상수 영화와 잘 맞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4개의 옴니버스 중에서 이'폭설 후'와, 4부 '옥희의 영화'가 특히 좋았다.이 장면을 찍기 전날 문성근은 술을 새벽까지 마셨고, 다음날 늦은 오전에 홍상수의 갑작스러운 촬영 부름을 받고 갔는데, 역시나 갑작스레 생긴 대본 두 쪽을 주면서 지금은 다른 촬영하고 오후에 이 신을 찍을 테니 다 외워두라 했단다. 당연히 대본 암기의 시간 없음에 홍상수도 걱정을 했는데, 평소 홍상수가 술 먹으면서 늘 하던 얘기라 외우는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한다.
4. 옥희의 영화
옥희는 자기가 만난 늙은 남자 송교수와 젊은 남자 진구와 각각 일 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아차산'을 가게 된다. 같은 장소를 갔으나 늙은 남자와 젊은 남자의 동선, 시선은 각각 다르다.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란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고 싶었습니다."
배우를 해주신 분들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들과 비슷한 인상의 분들을 선택했습니다.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저 대사는 '반복의 차이'를 재생산해내는 홍상수의 영화론 같이도 들린다.
4개의 단편 꼭지에서 다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3부까지는 세 사람의 '이야기'혹은 진구의 영화쯤으로 유추하게 하다가, 4부에서 '이것은영화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늙은 남자와 젊은 남자를 만난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당신들은 어떤 (영화적)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고, 옥희가 만든 '영화'와 영화가 만들어진 순서 없는 '과정'을 본 것이다-
홍상수 영화 속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는 대체로 현명하며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나온다. 남자보다 덜 속물적이며 감정에는 더 솔직하고 과거를 후회하지도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자적 입장에서 '들여다' 보기도 하고, 연결해주거나 정리해 주는 존재인데 여기서의 옥희도 그렇다.
'늙은 남자'는 일 년 전 옥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아차산의 그 소나무 아래로 온다. 그러나 옥희는 새 애인 '젊은 남자'와 그곳에 왔다. 옥희의 새 애인이 화장실을 나오는 순간 늙은 남자는 말없이 산아래로 내려간다. 일 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아차산의 그 소나무 밑에 온 남자, 일 년 전의 약속을 잊지는 않았지만 새 이인이 된 젊은 남자와 함께 다시 아차산을 찾아와서 일 년 전의 늙은 남자를 생각하는 옥희-
이미 어긋나 버린 시간과 관계를 확인하며 슬프게 늙은 남자를 바라보는 옥희의 저 장면과, 말없이 내려가는 늙은 남자 문성근의 뒷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쓸쓸한 장면이다. 떠날 때, 물러서야 할 때 말없이 가는 모습.
가벼운 냉소, 어긋나는 관계, 우연과 반복, 그 둘 사이의 차이-등은 홍상수 영화의 반복되는 소재나 주제지만 그간 본 그의 영화 중 인간 정서를 관통하는 '연민과 쓸쓸함'이 가장 많은 영화였다. 젊은 남자와 아차산을 오르는 옥희는 중간중간 늙은 남자를 생각하며 잠시 잠깐씩 슬퍼지기도 하는데 쉬는 도중에 젊은 남자에게 묻는다.
" 넌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니? "
" 다 죽은 사람들 뿐이야 "
* 3년 뒤 나온 <우리 선희>는 이 영화 전의 얘기를 뒤에 만든 이 영화의 후편, 변주 같다. 홍상수 영화가 대게 그렇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