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완의 그후
-거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삶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인류사가 진행된 과정에서 사람과 세상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떤 사건이나 사고도 바로 옆에서 일어난 것처럼 느끼고, SNS는 남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잖아요. 가깝게 붙어서 어떨 때는 일부러 그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침범하기도 하고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공감대를 가지되 그것은 거리감을 가진 것이라야 한다.
-어차피 고통의 당사자가 아닐 때 우리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
-세상에 대한 환멸은 반대쪽 방향을 알지 못한다.
"건너편에서 무슨 일인가가 먼저 일어나야만, 그런 다음 우리가 그걸 볼 수 있습니다. 별빛이 우리 눈을 찌른 뒤에야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봅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언제나'는 무서운 말이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세상에 존재하듯/ 아프고 안 아프고의 차이는 아픈 차이"
-'사유할 능력'이 인간 내부의 또 다른 영역인 자아와의 대화이자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며.....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한 일들'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는 일들'일 수도 있다.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실패한 애도의 이야기는 많다....... 애도란 결국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실은 철저히 살아남은 자의 시선이다. 타인의 고통과 희열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끝끝내 모른다.
-우리는 죄의식을 비롯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공감이나 연민의 감정이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가족이라는 좁은 울타리, 자신의 이해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테두리 밖에서 공감은 능력이라기보다 무능력으로 잔인한 진실을 드러낼 때가 많다.
-우리는 쉽게 무릎 꿇지만, 또 아무나 무릎 꿇린다. 익숙한 틀이나 패턴으로 타인을 규정한 뒤 그것을 우리의 앎으로 뒤바꾸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사회적 인격이라는 가면은 그 회피의 공인된 양식일 테다.
-그러니까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때 삶은 한없이 축소되고 거짓 고통과 거짓 약속, 거짓 환상으로 물든다. 인생으로부터 잘려 나와야 한다. 아니, 인생을 '나'로부터 잘라내야 한다. 자발적인 격리 말이다. 무언가가 있다면 '인생과 나 사이'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보기'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