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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Oct 16. 2021

홍상수 영화 <그후>의 봉완이 글을 쓴다면 이럴까?

봉완의 그후


홍상수 영화 <그후> 속 봉완(권해효)이 운영하던 출판사 <강>은 세트장 아닌 실지 출판사


홍상수의 <그 후>를 보면 주인공 봉완(권해효)의 직업은 출판사 사장이자 문학 평론가다. 영화 내용, 등장인물들이 주로 봉완의 직장을 배경으로 전개되므로 출판사 내, 외부가 자주 등장하는데 출판사 외벽에 붙은 <강>이란 작은 현판이 잠깐 지나갔었다. 느리게 아주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지만 그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홍상수는 영화를 빌어 사람의 마음이나 관계란 허망하다고 줄곧 냉소하지 않았나. 그러니 이 세상에 고정된 건 없고, 각자의 입장과 보는 시점에 따라 같은 대상이나 이야기도 흐르는 강처럼 조금씩 다르다는 의미로 출판사 이름도 그렇게 지었나? 아니면 실지 출판사 이름인가? 잠깐 생각하고 곧 잊었다.

또, 봉완이 지하철 속에서 읽던 책으로 '김소진'의 소설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가 잠깐 나오는 장면도 있었다. 홍상수가 김소진의 글을 좋아했었나? 그것도 잠시 궁금해하다 말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시민운동가'(기사 타이틀이 그랬) 권해효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내가 잠깐 궁금해했던 영화 속 장면들의 뒷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홍상수의 대본은 매일매일 즉흥적으로 나오지만 대사나 장면 설정은 평소 여러 인물 대, 상황을 세밀한 관찰과 기록으로 채집 았다 그날, 그 영화의 그때 흐름에 맞게 차용, 배치하는 것이란다. 영화 속에서 농담, 말장난 같은 대사 하나도 배우의 애드립이라곤 전혀 없으며 주인공이 읽는 책 하나도 철저히 대본대로 표현된 것이라 했다.     


<그 후>에 등장하는 출판사 <강>은 실명, 실물이며 그 <강>의 사장이 실지로도 문학 평론가를 겸하고 있는 현존 인물이라고 했다. 영화에서 봉완이 지하철에서 읽던 김소진의 소설도 <강> 출판사 사장의 문학 동료이자 생전 친구로, 그가 평소 김소진을 많이 아끼고 읽던 배경이 투영된 것이라 했다.

<강>의 사장은 '불륜남'이라는 영화상 설정을 주변 지인들이 자신의 실지 사연으로 알까 전전긍긍한다는 농 했다.


영화와 인터뷰를 본  뒤 내겐 다소 생소한 저자의 어떤 산문집을 읽던 중이었다.  뉴스 문화란인지 신간 코너에서 '저자와의 인터뷰'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내가 읽던 책의 저자였다. 출판사 사장이자 문학 평론가라는 저자가 들려주는 젊은 시절 출판사 근무 얘기, 요절해서 평생 청년 작가로 기억되는 기형도와 김소진부터 문단 원로들을 옆에서 본 짧은 이야기들 흥미롭 읽으며 뭔가 기시감을 느꼈다. 홍상수의 <그 후>에 나온 그 출판사, 권해효 운영하는 출판사로 나온 곳의 실지 사장이었다. 물론 불륜남이라는 영화상 캐릭터는 홍상수의 영화 속 가상이다. 영화 초반부 봉완의 집으로 나온 아파트 외관도 실지 저자 자신의 집이라 했다. 영화 때문에 출판사나 책 홍보에 도움이 좀 됐냐는 질문에 "홍상수 영화를 사람들이 많이 보진 않아서..." 라며 웃었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꽤 많이 봤지만 영화 속에서 언급된 책 중 내가 기존에 이미 읽은 것들 말곤 '읽고 싶다'라는 생각이 별로 안 든 걸 보면 확실히 그의 마니아는 아닌 것 같다. 기존 한국 상업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유럽 감성의) 문학적 영상과 철학적이면서 시니컬한 대사 재미로 많이 보긴 해도 영화 속 남주들의 회피주의적 인생관은 마땅찮았다.

홍상수가 자신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빼먹지 않고 쓰는 대사는 '비겁하다'이다.               



               

<마음을 건다>. 정홍수. 창비. 2017.07.28

세상에 대한 환멸은 반대쪽 방향을 알지 못한다


인터뷰 기사를 흥미롭게 읽어서 낯설었던 정홍수라는 저자의 산문집이 더 재미있게 읽혔다. 인터뷰나 책에서 저자가 가장 많이 쓴 단어 중 하나는 '거리감'이었다. 개인적 관계뿐 아니라 사회적 공감, 공분에도 그 거리감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거리' 주요 필터링 도구는 문학 영화인데 그가 느끼는 예술성의 중요 건 역시 거리감이다. 내게는 그 거리감이 무엇과 무엇의 '사이' 같은 것으로도 이해됐는데 그 거리감을 문학적 방식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거리감은 저자 본연의 성정 같기도 하고 사람과 세상을 코앞에서 바로 보고 해석하기보다는 '건너편'에서 바라보려는 삶과 해석의 방편 같기도 했다.

'건너(편)' 시선은 좀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으로 바로 앞의 주장이나 판단보다는 관조와 관찰, 시간의 시선이다.      

아래 인용은 정홍수의 책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로 -문장은 저자의 말, " “ 문장은 저자가 읽은  속의 말들을 자신의 산문집 <마음을 건넨다>에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것이다.          


-거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삶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인류사가 진행된 과정에서 사람과 세상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떤 사건이나 사고도 바로 옆에서 일어난 것처럼 느끼고, SNS는 남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잖아요. 가깝게 붙어서 어떨 때는 일부러 그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침범하기도 하고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공감대를 가지되 그것은 거리감을 가진 것이라야 한다.    
-어차피 고통의 당사자가 아닐 때 우리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     
-세상에 대한 환멸은 반대쪽 방향을 알지 못한다.   

  "건너편에서 무슨 일인가가 먼저 일어나야만, 그런 다음 우리가 그걸 볼 수 있습니다. 별빛이 우리 눈을 찌른 뒤에야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봅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언제나'는 무서운 말이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세상에 존재하듯/ 아프고 안 아프고의 차이는 아픈 차이"     


영화 < 그후> 속 봉완이 운영하는 출판사 내부


건너편의 시선, 거리감 있는 공감을 선호하는 저자는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단박에, 한 번에 다 보여 주려는 클로즈업보다는 롱샷, 롱테이크적 작법의 글과 영화에 감흥 된다.

롱샷은 주인공, 인물, 특정 사건(사물) 중심의 클로즈업과는 반대로 인물 뒤의 좀 먼 거리의 장소나 배경을 같이 담거나 어떤 경우엔 인물이 그저 배경의 소품이 되기도 한다. 클로즈업의 시선은 말하는 사람, 보는 사람 양자가 단편적 주장과 동조에 빠지기 쉽지만 롱샷의 시선은 보는 각도, 거리의 차이, 방향에 따라 복합적이고 다변적이다.     


인간, 인생, 세상이 눈에 보이는 한두 가지 단순한 인과관계나 직설로만 설명되던가? 그러니 시간과 거리를 두고 좀 떨어져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 그 뒤의 배경(맥락)을 같이 조망하는 것은 어떨까? 나는 그렇더라- 는 것을 문학과 영화를 빌어 말한다.

그에게 '거리'는 '이미 답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 세상, 질문할 수 있는 세상, 비판하는 내가 모르는 어떤 세상, 보이지 않는 이면의 복합성을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거리감'에 관한 좋은 말이 생각난다.     


"벗을 사귐에 있어서는 '틈'이 가장 중요하다. 연나라와 월나라 사이가 멀지만, 그런 틈이 아니다. 산천이 그 사이에 가로막혔다 해도, 그런 틈이 아니다. 둘이서 무릎을 맞대고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해서 '서로 밀접하다'라고 말할 수 없고, 어깨를 치며 소매를 붙잡았다고 해서 '서로 합쳤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그 사이에는 틈이 있을 뿐이다.     

 (『연암 박지원 소설집』)     


문학과 영화로 세상을 이해하는 저자는 불확실성의 여러 변주를 얘기하는 홍상수의 고정 관객으로 보이는데 글 내내 그가 이야기하는 거리감은 홍상수식 냉소와는 다르다. 오히려 냉소와의 거리로 여겨지며 문학과 영화는 자신이 세상의 일에 냉소적이지 않도록, 역지사지의 공감력을 잃지 않게 한 좋은 안내자로 보인다. 그저 '살아내는' 삶은 한없이 축소되고 온갖 거짓으로 물들고 말 것이니 그런 삶은 나로부터 자발적 단절, 격리를 시켜야만 삶과 나 사이에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살아내는 것도 전전긍긍해서 여즉 한 번도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쉬운 냉소로 곧잘 자폐 되는 나로 뜨끔한 말이었다.

그가 말하는 거리감엔 타인을 쉽게 비판하는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과, 우리가 이루고 얘기하는 것들의 이면과 하지 않은 말이나 일들을 돌아보는 자기 성찰 같은 것이다.


-'사유할 능력'이 인간 내부의 또 다른 영역인 자아와의 대화이자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며.....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한 일들'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는 일들'일 수도 있다.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실패한 애도의 이야기는 많다....... 애도란 결국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실은 철저히 살아남은 자의 시선이다. 타인의 고통과 희열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끝끝내 모른다.      

-우리는 죄의식을 비롯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공감이나 연민의 감정이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가족이라는 좁은 울타리, 자신의 이해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테두리 밖에서 공감은 능력이라기보다 무능력으로 잔인한 진실을 드러낼 때가 많다.         

-우리는 쉽게 무릎 꿇지만, 또 아무나 무릎 꿇린다. 익숙한 틀이나 패턴으로 타인을 규정한 뒤 그것을 우리의 앎으로 뒤바꾸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사회적 인격이라는 가면은 그 회피의 공인된 양식일 테다.  

   -그러니까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때 삶은 한없이 축소되고 거짓 고통과 거짓 약속, 거짓 환상으로 물든다. 인생으로부터 잘려 나와야 한다. 아니, 인생을 '나'로부터 잘라내야 한다. 자발적인 격리 말이다. 무언가가 있다면 '인생과 나 사이'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보기'위해서다.     


영화 속 출판사 <강>의 사무실.

산문 <마음을 건다>을 건다는 문학/영화 비평과 자전적 에세이의 중간쯤에 있는 글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과 소란에 직설적 비판 대신 자신의 삶 일부와 생각을 그동안 저자가 본 여러 책과 영화를 빌어 '주장하지 않는 주장'으로 쓴 글이다. 나와 꼭 일치하지는 않는 그 다름 속에서 여러 공감과 이해를 할 수 있는 점이 좋았고 책 속에서 '읽고 싶은' 여러 책을 발견한 것도 좋았다.

글 어투나 논조는 조용하고 담담하지만 사회 곳곳의 불합리와 폭력에 대한 비판과 상식적 공감대, 자기 성찰을 놓치지 않는다.


작금의 생존적 위기와 불안, 계급적 세대 간 불신을 정서적 거리나 차이 같은 감상, 도덕주의적 관점 위주로 인식하는 것은 그가 애창한 거리감의 아쉬운 부분이다.  '무슨 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저자의 말처럼 과연 불신과 경멸, 단절의 감정만을 교묘하게 부추기고 가벼움과 무책임으로만 치부될 말일까? -포 세대는 현실인.

비교적 균형 있는 비평 의식들 사이에서 신경숙 표절, 출판계에 대한 비판에는 온정주의적라고 느껴진 것은 출판인, 평론가라는 동류(동료)의 인지상정인가 싶기도 했다. 이 책은 신경숙 표절의 책임이 무거운 창비에서 나왔고 그의 이력 중엔 민음사, 솔, ( 신경숙의 책을 많이 낸) 문학동네에서 편집 있었다.


한동안 '단문'의 피로도나 거부감이 좀 있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단정하면서 여운을 남기는 좋은 단문이었다.     

인터넷 글쓰기의 대중화 후 '짧은 글'이 무조건 '좋은 글'의 요건으로 정설화 됐지만 역시 좋은, 아름다운 글은 문장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문재(文才)와 사유의 깊이다.

잘 읽히면서도 곱씹게 하는 사유들이 느껴지는 좋은 문장 속에서 어? 하는 단어들이 간혹 보였다. 처음엔 오타인 줄 알고 '창비씩이나 되는 출판사.... 에서' 했다가 사전을 찾아보니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순수 우리말 혹은 옛말이었다.     

다음과 같은 것-     


'세대를 격한 두 사람은'의

'격한' :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사이를 두다.

그러께 문학동네 20주년 자리의....에서의

'그러께' " 재작년. 옛말)그럿귀, 반대말)그르헤, 상그르해, 젠젠년

(그저께의 오타인 줄 알았던 그러께. 반대말인 샹그르해, 젠젠년- 재밌고 이쁜 단어다. 언제 한번 써먹어 봐야겠다.)     

메트로폴리스의 잡담과... 에서의

'잡담' : 사람들이 많이 몰려 북적북적하고 복잡함. 분답.   

메트로폴리스 주변을 둘러싼 크고 작은 건물 담, 빌딩 담이 많이 몰려 있는 형상을 지칭하는 '잡담'인 줄 알았음.      


대동소이한 차이나 공감 속에서 가장 큰 다름을 느낀 것은 '과거'에 대한 소회였다. 저자는 과거를 '돌아가고 싶은 곳, 떠나온 것에 대한 그리움' 같은 귀향과 동경의 심리로 줄곧 회상하고 있었다.     

그 매개는 '철길'과 '명절'이었는데 이 두 단어에서 받은 정서마저도 참으로 달랐다.  나 역시 기차나 철길의 이미지나 정서를 좋아하지만 그 둘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어디론가 '떠날 곳, 떠날 수 있는 곳(방편)'이다.     

'어디론가'라는 가정은 갈 곳이 정해지지 않는 미지의 막연한 세계라는 모호성과 아무튼, 어쨌든 여기서 '떠나고 싶다'는 소망이 발현된 것이다.  저자에게 철길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곳,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 돌아갈 곳의 방편이었다. '떠나온 것에 대한 그리움'은 돌아갈 곳이 비교적 명확하고 '돌아가고 싶다'는 회기심이 크다는 거다.  

얼핏 보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여기서 떠나고 싶다는 문맥에서 '현재가 불만족스럽다, 여기를 떠나고 싶다'는 외형적 공통점이 있지만 그 심리 기저는 참 다르다.     

철길은 저자나 나에게 '그리움'이란 매개물이라는 점에선 같지만 그 그리움의 방향은 영 다른 것!     

어쩌면 둘 다 돌아갈 수도, 떠날 수도 없다는 불가능성에 대한 도피심일 수도 있겠다.               


저자는 과거 회귀 동경의 하나로 '명절'을 꼽기도 했다.     

나는 저자와 달리 명절이 한 번도 즐겁거나 설렜던 적이 없었다. 명절은 나, 우리 가족에게 없는 부재나 상실이 더 선명하게 각인되는 그런 날이었다.  또한 과거 속 미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희망보다는 '빨리 늙어 죽고 싶은' 절망의 미래였다.  아이다움의 순수성으로 기억되는 과거가 아니라 '나는 아이 다우면 안 된다'라는 이른 깨달음과 강박 속에서 급하게 성장하느라 제대로 성숙되지 못한 후유증 많은 경제 개발, 산업 근대화의 부작용 같은 상흔의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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