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런 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는 사람 Jul 17. 2021

섬으로 표류한 두 남자

로빈슨 크루소와 김씨, 그리고 신생 철학과 섬

 SNS 친구들 글에서 로빈슨 크루소에 관한 글을 읽다가 나도 2017년쯤 쓴 리뷰 생각났다. 영화 <김씨 표류기>와 연계해서 쓴 글이라 좀 길다.


작가-대니엘 디포. 번역-남명성. 웅진 씽크빅. 2008.08.25


책 서문에 대니얼 디포가 살았던 당시의 영국 상황, 디포의 인간적 배경과 함께 어느 선원의 실지 '무인도 표류기'를 바탕으로 탄생했을 거라는 소설적 배경 나온다. 작가나 소설의 배경에 대해 건성건성 읽던 내 눈이 멈춘 곳은 실지로 4년 동안을 무인도에서 살았던 선원 셀커크가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된 후의 인터뷰 중 하나였다.

리처드 스틸이라는 사람은 셀커크의 무인도 생활을 인터뷰해서 '버려진 섬에서 4년간 살아남은 어느 선원의 이야기'로 연재해서 대히트를 쳤다는데 아래는 그런 글 중 하나다.


이런 식의 생활은 놀라울 정도로 즐겁게 느껴졌고,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절제와 실천을 바탕으로 생활한 그는 아무 걱정 없이 밤을 보냈고 낮에는 즐겁게 생활했다.... 셀커크는 혼자 사는 게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상황이었지만 감상적이고 유쾌한 외로움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스틸은 "그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슬프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홀로 평온함을 느낄 수 없어 자주 즐거움을 빼앗긴 기분이었다고 말했다."라고 썼다.


적당한 외로움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나는 복잡한 세상으로 복귀한 스틸의 불안감이나 박탈감이 잘 그려진다.

디포는 저런 감상의 피력보다는 주인공이 섬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적응해 나갔는지 자립적 생활과 종교적 변모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책에 묘사된 신에 대한 주인공의 사상적 변모가 신자들에게는 '종교적 감화'로 해석겠지만 나 같이 아직 불신자에겐 '문학적 종교 교육'으로 읽히기도 할 것 같다.


사고로 무인도에 홀로 표류한 크루소가 처음부터 신에게 감화되고 자기한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신의 뜻이라고 순응한 것은 아니다. 절망에 빠진 인간들이면 누구나 쉽게 외치는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불행에 빠진 인간들을 왜 구경만 하고 있나?"라는 신에 대한 의문과 원망을 그 역시 되뇐다. 크루소 역시 그러던 중 원망만 한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신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변해간다.

주인공의 그런 종교적 심리 변화는 무인도니까 당연히 독백이나 일기 글로 묘사되는데 종교화되는 초기 상태의 아래 독백은 빠삐용의 그 유명한 "인생을 낭비한 게 네 죄라던" 대사도 연상케 했다.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러시는 걸까? 나는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대접을 받는가? 그 물음이 무슨 불온한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금세 양심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건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철면피로다! 그대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묻는단 말인가! 끔찍하게 인생을 뒤돌아보고 그대가 하지 않은 일은 무엇인지 되물어 보라. 그대가 이미 오래전에 죽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라.


크루소는 자신한테 일어난 여러 일들을 돌이켜보다가 인생사, 인간사의 대부분이 계획보다는 우연, 우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 존재한다면 왜 자기가 만든 인간들의 불행과 악의 부조리들을 손 놓고 구경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파고든다.

우연적 사건 사고의 발생 속에서 인간들은 각자 다른 반응과 행태를 보이는데 거기서 얻는 깨달음과 실천은 각자의 몫이며,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신의 선택과 가르침을 이해할 때 그는 신의 자식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는 인식에 이른다.

마지막에 '깨닫는 자'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라고 한 것에서 다니엘 디포, 크루소의 핵심 사상이 읽힌다. 깨닫는 자가 '타인을 밟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브레히트)'을 노래한다면 살아남은 자는 '(다 이기고 죽이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신의 생존'을 기뻐하는 사람일 것 같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을 어떤 규범과 율법으로 단죄해야 할지 모른다지만, 어떤 신이든 필연적으로, 그리고 그 존재의 본질상 무한히 거룩하며 정의롭게 마련이다. 그러니 불쌍한 야만인들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벌을 받았더라도, 그들이 저지르는 죄악은 그들의 양심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규범을 어기는 행동인 것은 변함이 없다. 성경에서 율법이 없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는 토기장이의 손에 든 진흙일 뿐인데, 그릇이 어찌 자신을 만든 이에게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물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릇이 자신의 운명을 토기장이에게 물을 순 없지만 토기장이의 사상과 솜씨에 따라 그릇의 외형, 가치는 얼마나 달라지는가.


크루소의 저런 깨달음은 절망하지 않고 노력하는 자가 결국 승리하고 살아남는다는 불굴의 인간 의지와 희망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자본주의의 적자생존관, '잘난 자가 신의 아들이다.'라는 영웅주의, 기독교를 모르는 자는 야만인이라는 '기독교 우월주의'도 같이 보인다.

자신이 이 무인도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가꿨으니 내가 이 섬의 주인이며 여기는 내 왕국이라는 자족감에 빠지기도 하고, 크루소가 그 섬에 표류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그곳을 왕래하며 살았던 이웃 섬의 원시부족들이 자신의 왕국을 침범한 것이라 생각해서 자신과 다른 피부색과 생활양식, 종교를 가진 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한다.


크루소가 가져온 신식 무기 앞에 쉽게 굴복한 원시인은 크루소의 친구 '같은' 노예가 됐으며 그의 언어나 문화는 교육의 대상으로, 종교는 미신으로 전면 부정당하게 된다. 친구 같은 노예는 노예지 친구가 아니다. 가족 같은 회사가 가족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나는 "회사와 고객을 내 가족처럼!" 이란 구호가 싫었다.

원시인과 살면서 그들 야만인에게도 나름의 신과 종교는 있고 믿음의 차원은 달라도 성직자들이 그들의 권위와 지배를 위해 종교를 '신비화, 신성화' 시켰다는 것은 어디나 같다는 발견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이교도들에게도 성직자 계급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종교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성직자들이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은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종교가 사용하는 것 같았다.


크루소는 몹시도 사람과의 대화에 목마른 상태였음에도 원주민(그는 '원시인'이라고 했다)의 대화나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기보다는 영어, 자신이 살아온 문화를 가리키는데 더 주력했다. 유색 인종, 영어를 안 쓰며 성서의 하님 신앙이 아닌 자들은 모두가 미개한 야만인이니 그들에게 영어와 기독교를 가르쳐 주는 것이 개화, 문명화의 시혜라는 사상이다.

크루소가 원시부족들에게 행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미지의 동아시아 신대륙을 발견한 백인들이 원래 살고 있던 민족은 도외시하고 '먼저 발견한 놈이 주인!'이라는 논리로 기독교와 자본주의로 문명화시켜주는 우리에게 감사해라는 서구 제국주의 논리를 문학적으로 선전화한 것처럼 여겨졌다. 또, 우리 땅에 들어와서  원래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주인인 우리 의견은 묻지도 않고 외지인들끼리 서로 자기가 주인 되겠다며 싸우던 구한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크루소는 내가 먼저 발견했으니 이 땅과 주민의 소유권은 물론 이주권,  상속권까지 내게 있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영어   '백인 기독교인 남자'다.


나는 그 땅의 왕이며 주인이었고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소유권이 있었다. 만일 어디론가 옮겨 갈 수만 있다면 영국에 영지를 가진 다른 영주들처럼 온전히 후대에 물려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유럽 사람처럼 얼굴에 부드러움과 귀여움까지 흘렀다.... 브라질이나 버지니아에 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지저분하고 기분 나쁜 황갈색이 아니라 올리브처럼 밝은 색이었다.

사금이나 향료, 상아는 말할 것도 없고 브라질에서 많이 필요한 흑인 노예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말도 곁들였다.


현실에 순응하고 섬 생활에 거의 완벽하게 적응한 크루소도 끝끝내 초연해지지 못한 것이 있으니 누군가와의 '대화'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독백 말고 상대가 있는 대화 말이다.

디포는 크루소의 입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대화의 동물인지,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단절감과 고독감이 더 크다는 것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크루소에게 앵무새 폴이나 노예 프라이데이마저 없었다면 섬 생활에서 그의 행복감은 많이 상쇄됐을 거다.


나는 개가 뭘 구해 오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친구 노릇을 해주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오직 녀석이 말을 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앵무새와 이야기를 나누고 말을 가르치는 걸로 기분 전환을 했다.... 내 입 말고 다른 입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본 것은 섬에 와서 처음이었다.


대화가 인간의 표현 욕구와 나 아닌 타자의 필요성과 상호 교류성의 충족을 주는 요소라면 내 집, 정착지는 심리적 안정감과 회귀감에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돌아올(갈) 곳이 있는 자의 여행과 몸 하나 뉠 곳이 없는 자의 여행길은 천지차이라 오랜 세월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대게는 공간적인 곳이든 정적인 곳이든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것이다. 혹은 애초부터 돌아갈 곳을 두지 않고 떠도는 사람들인데 어느 쪽이든 그들은 상실감을 자신의 숙명인 냥 안고 살아간

'공간'이 인간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을 생각해 본 적 있는데 크루소 역시 먼저 발견한 자기가 이 섬의 주인이고 왕이라 자족하지만 그 근간엔 무인도 속'자기만의 집'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 해먹 침대에 누웠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머물 곳도 따로 정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돌아다닌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백인 기독교 우월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빈번한 옹호는 불편했으나 '재미'라는 소설의 원형적 조건과 '자립, 자급자족의 생활', '고독과 침묵의 행복'을 누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들은 짙은 여운과 감동을 주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던 때보다 이렇게 혼자 남은 상황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겸허한 마음으로 진정한 감사를 드렸다.

온갖 괴로운 상황에도 섬에서의 삶은 과거에 부도덕하고 지긋지긋하며 형편없이 살던 인생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 상당히 많이 들었다.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게 변했고 희망하는 것도 달라졌다. 감정도 완전히 달라졌으며, 즐거움조차 처음에 섬에 왔을 때나 지난 2년 동안 느끼던 것과는 달랐다.  


많은 만남과 말이 있지만 마음과 영혼을 채우는 대화는 드문 군중 속 고독, 혼자서는 단 몇 시간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줄 모르고 수많은 자격증이 있지만 내 집의 작은 곳 하나 지 손으로 못 고치는 현대의 '전문가 바보'들이 반성할 여러 모습도 보인다.

'자급자족'은 '돈'이 아닌 오롯이 내 '몸'으로 생활의 모든 것을 생산하고 고치고 치우는 일이라 현대인처럼 수십 년 뒤의 생활까지 채워두려는 힘과 능력의 낭비가 필요 없다.


돈을 본 나는 웃음이 나왔다.
"오, 이런. 너희를 무엇에 쓰겠느냐? 내겐 아무런 가치도 없구나. 굴러다녀도 주울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칼 한 자루가 너희 전부를 합친 것만큼 가치가 있다. 너희는 내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지금 있는 그대로, 구할 가치가 없는 생물처럼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버려라."


시간과 공을 들여 노력하고 궁리했더니 결국 필요한 물건은 모두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소위 빵을 위해 일하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빵 한 덩어리를 만들려면 밭을 갈고 곡식을 재배하고 수확을 하고 요리를 하는 등 온갖 소소한 일을 해내야만 했다.

언제나 1년 동안 먹을 정도의 식량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정도로만 일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소용이 있는 만큼만 좋은 것이었다. 무엇이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쌓아둔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쓰는 만큼만 좋은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섬에서는 가진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원하는 것 말고는 가질 필요가 없었다.


크루소는 운명은 계획적이 아니니 인간이 그 우연성에 어떻게 잘 순응하고 반성하면서 도전과 극복 정신을 놓지 않느냐에 따라 스스로의 행복감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일어난 불행에 대한 저주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불행에 대한 불안으로 전전긍긍하기보다는 현실을 수긍하고 그 현실의 조건 중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서 성심을 다 하다 보면 불행 중에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긍정의 세계관에 이른다.


내게 벌어진 여러 가지 운명적인 사건이 묘하게도 같은 날짜에 겹쳤다는 게 기억이 났다. 그러니 내 죄 많은 인생과 쓸쓸한 인생은 같은 날짜에 시작된 것이다. ​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이 어떤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것은 잃어보아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아무리 몰락하게 하고 괴로움에 빠지게 한다고 해도 대개는 뭔가 감사할 구석을 남겨 두거나 우리 자신보다도 더 못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점이다.

눈앞에 실제로 나타난 위험보다 천배는 더 무서운 건 바로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다. 실제 불행보다 그런 불행을 걱정스러워해야 하는 마음의 부담이 훨씬 더 크다. 게다가 무엇보다 더 나쁜 건 그런 식의 문제 앞에서는 포기하는 마음조차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더 나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나쁜 일 가운데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들을 꼽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그러니까 내가 누리는 즐거움과 내게 괴로움을 주는 불행들을 매우 공정하게, 마치 차변과 대변에 기재하듯 적어보았다.
적어놓고 보니 이것은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상황에 빠진다고 해도, 반대로 감사해야 할 것이 전혀 없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이런 내용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상황을 겪은 사람이 주는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터였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처럼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걸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서 대차대조표의 대변에도 뭔가 써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처한 상황에서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보는 법과, 필요한 걸 떠올리기보다 누리는 걸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볼 때 뭔가 부족해서 생기는 불만은 이미 가진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다.


디포는 안락한 삶을 주는 중산층의 장점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락함이 인간의 모험심과 상상력을 제한하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책 속에는 크루소가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집을 떠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가 나오는데 거기엔 중산층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나는.... 특별히 기술을 배우지 않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머릿속이 앞뒤 없는 생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떠나려고 하는 이유가 그저 아버지의 집과 이 나라를 벗어나고픈 방랑벽 말고는 없지 않냐고 말씀하셨다. 그냥 눌러앉으면 쉽게 일을 배울 수도 있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큰돈을 벌어 편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도 했다. 또 멀리 모험을 떠나 사업을 일으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은 아예 가진 돈이 전혀 없거나, 주체할 수 없이 돈이 많지만 큰 뜻을 품은 경우가 많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기에는 너무 넘치거나 모자라는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내 삶은 중산층에 속한다고 할까..... 아버지는 그런 삶이 가장 좋은 상태이며 인간의 행복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중산층은 노동과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되며 상류층처럼 자존심이나 사치, 야망 그리고 더 잘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그리고 현자 또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이것이 진정한 행복의 기준임을 말했다고도 했다."
아버지는 그 말을 깊이 생각해 보면 온갖 불행은 늘 상류층과 밑바닥 인생들이 나누어 가진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했다.
중산층의 삶은 온갖 장점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삶의 방식이었다...... 울컥 솟아오르는 시기심으로 화를 낼 일도 위대한 존재가 되고 싶은 비밀스러운 열망에 타오를 일도 없었다. 그저 편안한 상황 속에서 미끄러지듯 세상을 살아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


디포가 이성적, 현실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설파했다는 극단의 빈곤과 부는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하기 힘드니 그 중간 상태가 가장 바람직한 '중산, 중용'의 정치관을 인정하면서도 감성적으로는 그 반대에 끌린다는 이야기로 읽혔다.


우연적으로 무인도에 표류한 후 완벽한 자급자족과 침묵의 삶 속에서 개인적 성찰과 깊은 종교성을 얻은 크루소는 그곳의 자연과 원시부족이 준 물적,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자본주의 세계로 화려한 복귀를 하고 떠나오기 전보다 더 큰 부를 얻게 된다.

그 모습은 마치 동아시아 신대륙을 발견한 서구인들이 그들이 야만국이라고 불렀던 곳에서 많은 자원과 사람을 탈취한 후 개선장군처럼 자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이거나, 고임금 고임대료를 피해서 후진국에 공장을 설립해 그곳의 싼 임대료와 인건비로 축적한 부를 자국으로 들고 가는 다국적 기업의 사장 같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소용이 있는 만큼만 좋은 것이었다. 무엇이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쌓아둔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쓰는 만큼만 좋은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섬에서는 가진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원하는 것 말고는 가질 필요가 없었다ㅡ​

​고 했던 크루소는 다시 자본주의적인 걱정에 빠진다.


섬에서 조용히 살 때보다 더 많은 걱정거리가 생겼다. 섬에서는 가진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원하는 것 말고는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큰 책임을 져야만 했고 많은 재산을 지켜야만 했다.  가장 걸리는 건 종교 문제가 아니라 내 재산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크루소의 무인도 생활은 같은 자급자족의 삶을 살아도 자연을 '정복'이나 '개척'의 대상으로 보지 않은 소로우의 숲 속 삶과도 다르고, 원주민의 문화와 생활을 그들 고유의 것으로 인정하고 관찰한 레비 스트로스의 인식과도 다르다.

디포가 그린 로빈슨 크루소는 모험심과 열정, 절망을 극복하는 강인한 의지와 실천, 현실을 인정하는 긍정성과 신심의 회복(혹은 획득) 등의  이야깃거리로 소설적 감동과 재미를 주기 충분하지만 까칠하게 읽으면 오른손엔 화학무기를, 왼손엔 성경을 들고 타민족과 타 영토에 대한 '정복과 교육'으로 정당화한 제국주의의 옹호로 보인다.




<로빈슨 쿠루소>를 읽 당시 월북 철학자 윤노빈의 <신생철학>을 같이 읽던 중인데 이 책의 비판 정신 중엔 로빈슨 쿠루소가  복기되는 지점이 많았다.

그중에 일부분을 옮겨 본다.


진화의 과정은 '정복'의 과정이나 마찬가지다..... 무자비한 엘리뜨주의를 자연계에 투영시킨 것이 진화론이다. 적자생존을 진화의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자기 자신에 유리한 진보는 남에게 대해서는 퇴보여야 한다. 제한된 인간, 제한된 물질로 구성된 세계에 무한정한 양적 증대는 불가능한, 제한된 세계 속에서의 욕망의 확장이란 결국 다른 한편에 있어서의 욕망의 억제를 수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주인의 욕망이 증대되는 것은 노예의 욕망이 억압되어야 함을 뜻하며, 아프리카의 욕망이 억제됨이 없이 유럽의 욕망이 증대될 수는 없는 일이다. 노예들의 퇴보가 바로 주인의 진보다. 유럽의 진화가 아프리카의 퇴화다. 유럽인이 사용하는 변소와 상수도와 기차가 아프리카에 조금 시설되어 있다고 해서 아프리카도 진보하였다고 우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 가운데 일부의 원주민들이 끼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원주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럽인들을 위해서인 것이다. 양계장에 분뇨시설과 급수시설, 그리고 사료 운반시설과 계란 운반시설이 현대화되었다고 해서 닭들이 진보의 환호성으로 '꼬꼬댁 꼬꼬!'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희랍의 진보는 페르샤의 죽음이며, 유럽의 진보는 아프리카의 죽음이다. 얼마나 이기적 진화며 이기적 발전이냐.
(70~72쪽)

작가 윤노빈 출판 학민사 발매 2003.06.25

(윤노빈은 월북 철학자인데 학민사의 발행 날짜가 의미심장하다)


윤노빈도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던지 '시각(눈)의 오류성'에 대한 철학을 논하는 어느 문장 끝에,

'우상적 유일신은 탐욕적 이기심에 치우친 배타적 로빈슨 크루소의 우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라는 짧은 언급을 했더라.

남들처럼 나도 어릴 때 이 모험(표류 소설)을 봤더라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감상이 나왔을 거고 훨씬 더 큰 재미와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나니 '표류기'라는 내용만 빼고는 그 주제나 의미가 상당히 다른 옛날 영화 <김씨 표류기> 생각났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엄정한 세속이 피로한 나는 세계적 문학 거장이 만든 명작 <로빈슨 루소>보다 한국에서도 거장 리스트에서 빠지는 영화감독이 만든 B급 마이너 감성의 <김씨 표류기>가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감독 이해준 출연 정재영, 정려원 개봉 2009 대한민국


돈, 여자, 세상에게서 동시에 버림받은  이 남자ㅡ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으로 뛰어내린다.

그러나.... 병신, 죽지도 못합니다.​ (영화 속 대사)

자신을 소외시킨 강 저쪽 세상 자살 실패로 강 이쪽으로 떠내려오고 보니 몹시, 다시 가고 싶다.

이쪽도 저쪽도, 삶도 죽음도 내 맘대로 되는 건 없다.



그-나는 미운 오리 새끼입니.


그는  강 저쪽에서 미운 오리 새끼였다. 한강에서 떠내려온 오리배, 음료수 페트병, 커피 뚜껑 등의 쓰레기로 저 거대한 도시, 서울에서 갖기 힘들었던 ​ ​자기만의 영역과 세계를 만들고 '언제든 맞이할 죽음'을 뒤로 미루기로 한다.  ​그가 재활용한 쓰레기들은 저쪽 세상에서 용도 폐기돼서 떠내려온 자신과 비슷한 신세다. 강 저쪽과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서 모인 쓸모없던 우리들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와 쓰임이 된다.


욕망이 사람을 똑똑하게 만듭니다.


감기약처럼 이 가루를 입속에 털어 넣으면 욕망이 감기처럼 사라질까요? 이 무인도로 떠내려오기 전 그렇게도 싫었던 짜장면은 그에게 새로운 욕망이자 희망이 된다.


그녀-아무도 없으면 외롭지 않다


그녀는 낮과 밤이 구별되지 않는 컴컴한 방에서 온갖 쓰레기 더미를 쌓아 놓고 '미니홈피'란 가상의 세계에만 몰입하며, 유일한 움직임은 폐쇄된 그 방에서 만보계를 차고 만보를 달리는 것이다. 

만 번을 채우고 나면 하루를 열심히 산거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건전한 현실도피입니다.

얼굴  한쪽의 상처와 세상에서 따돌림받는 그녀가 인정받고 존재되는 곳은 모니터 속의 가상 세계다.

그녀가 보는 유일한 창밖의 모습은 <달>이다.                                        

달 사진을 찍는 이유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으면 외롭지 않으니까요.


아, 나도 종종 달 사진 찍 해보다 달을 좋아한다. 또, 풍경 사진을 찍을 때 '아무도 없는' 풍경을 주로 찍었다. 마음에 드는 풍경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거기를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사람이 걸리적거린다고 느꼈었다.

한밤중의 달을 찍고 아무도 없는 풍경을 찍었던 것은 '아무도 없으면 외롭지 않으니까'였을까. 외로움을 들키지 않아도 돼서.


어느 밤도 달을 찍던 그녀는 모니터 속의 세상이 아닌, 창밖의 생물에게 처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데

강 건너 저 쪽 무인도에 표류한 그다. 그녀가 이 도시 안의 사람들한테 외계인 같은 존재이듯, 자기 집 창밖의 그도 외계인이고 그에게서 어떤 고립자의 외로움과 자기에겐 없는 희망의  냄새를 맡게 된다.          


처음 맡아보는 희망의 냄새입니다. 희망, 그것은 백 년 만에 들어보는 단어입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수신호를 보내기로 한다.

이 외로운 외계인과 일촌을 맺을 수 있을까요?....



외톨이와 찌질이들의 이야기 


그와 그녀가 발견한 '희망'은 '관심'이다. 그들이 세상 밖(안)으로 나가(오)기위해 아주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때까지 세상은 기다려주지도 관심을 주지도 않았다. 세상이 소외된 그들을 기다려주는 시간은 일 년에 고작 두 번의, 민방위 훈련으로 세상이 잠시 멈추는 그때뿐이다.

강 건너 저쪽 세상은 그가 자살 실패 후 무인도에 정착해 그렇게도 소리쳤을 때는 메아리 하나 없더니, ​정작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먼지 같은 희망으로 겨우 자기만의 작은 세상을 일구고 나니 또다시 자신을 외계인 취급하며 몰아내려 하고 그는 절규한다.


저 그냥 여기서 살게만 해주세요 아무 짓도 안 할게요,


욕망은 사람을 똑똑해진 것처럼 착각하게 하거나 희망을 갖게도 하지만 그것이 넘쳐도 모자라도 소외나 고립감이란 그림자로 다가오기 쉽다.

이 영화 속의 밤섬. '무인도'는 진짜 무인도가 아니라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자의 소외된 땅이다. 그 무인도 바로 앞에는 유람선도 떠 있고 조금 더 앞에는 수많은 고층 빌딩이 숨 막히게 막고 있지만 그것들이 나와 무관할 때 그곳이 바로 무인도다. 수많은 사람과 욕망으로 넘치던 강 건너 저쪽 세상이나 고립무원의 이쪽 강이나 무인도이긴 마찬가지지만 이제 그는 이쪽 무인도가 더 편하다.

이 영화 상영 당시 <로빈슨 크루소>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은 후 <김 씨 표류기>를 다시 봤는데 표류자립의 말고는 김씨와 쿠루소는 다른 점이 더 많았다. 김씨는 내가 먼저 '발견'했으니 내 땅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친구 같은 노예를 들여 상대를 바꾸려 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진정한 친구였으니까.


이 영화를 보고 나 장사익의 <섬>이 생각났다.


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

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술잔에 떠있는 한 개 섬이다

술 취해 돌아오는 내 그림자

그대 또한 한 개 섬이다

ㅡ장사익, 섬



매거진의 이전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 노동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