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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Aug 23. 2022

아직 오지 않는 날들을 위하여

루틴과 시간

골방에서 편독만 하다가 그마저도 못(안)하게 된 시간이 길었다. 억지로 읽는 시간을 만들어보기 위해 '독서 세미나' 모임에 처음 가입했다. 그곳에서 선정한 두 권의 책 중 하나인 [아직 오지않은 시간을 위하여. 파스칼 브뤼크네르. 인풀루엔셜]

그간 SNS에서 지켜본 L 선생님의 독서 성향과는 다소 다른 이 책에 대한 의구심을 살짝 가졌는데, 독토 참가 학생들의 각기 다른 수준(몇 년씩 '읽고 쓰는' 이 수업에 참가한 이도 있지만 나처럼 처음 참여하는 이도 있어서)과 장점만 아니라 취향과 독자에 따라 단점도 두드러지는 책에서도 어떤 걸 비판하고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읽기의 또 다른 층위에 대한 두 가지 배경으로 보인다. 또, 선진국 유럽의 엘리트 우파 남성과 한국 페미니스트 여성 저자의 대조적 배경과 사유를 동시에 읽으며 '노년'에 대한 두 책의 한계를 짚어내기 위해 한계가 있는 책을 선정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책을 읽으며 좋았던 구절에 밑줄 치고 나와 결이 맞는 정서나 문장에 공감하는 독서는 누구나 하기 쉽지만 다수가 좋다거나 모두가 별로라는 책을 새로 읽기, 단순한 공감과 이입의 만족을 넘어 나와 주변의 삶과 연결해 재해석, 재생산 해내는 비판적 시각의 독서가 L 선생이 운영하는 쓰고 읽기의 공간이다.

여럿이 있는 독토도, 줌 수업도, 독서 발제란 것도 처음이라 약간 긴장하며 시작해 불안정한 작업 여건과 생활 환경을 밀고 누비며 독토가 생각보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든다는 발견 속에서 욕심과 의무감으로 쓴 내 할당의 발제 기록이다. 완독과 세미나 후 글을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지만 내 오류의 기억을 좀 더 남기고 생각을 더 묵히기 위해 발제문 그대로 올린다.



■ 첫인상

-연금받는 노인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힐링서, 명언 해설서


  이 책의 첫인상은 연금 받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노년 힐링서, 자기 계발서 같았다. 혜민이나 법륜이 프랑스 스님이라면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책 소개에 의하면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2개를 수상했고, 문학상뿐 아니라 경제 도서 상까지 받았으며 지금까지 총 82종의 책이 나왔다는데 읽기는커녕 이름 들어본 책도 없었다. ‘내가 모르는 게 참 많다(황현산)’와 ‘넌 날 쫄게 해(나의 해방일지)’라는 말이 번갈아, 절로 나왔다. 쫀 거치고는 가독성이 좋았다. 방만한 인용문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이나 내용을 몰라도 저자의 주장이나 사유를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나는 평소 인용 많은 책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고 인용도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용문을 읽을 때 그 원전이 궁금하게 하는 책, 검색기를 돌리게 하는 게 좋다. 그런데 이 책은 명언 잔치하다 끝난 아쉬움이 들었다. 인용문 그 너머의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 노동이나 과로에 대한 생각, 소수자 발언 등의 특정 사유에서는 선진국의 백인 지식인 남자, ‘선택할 여지가 많은 기득권’으로서의 한계적 발언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두 가지 정도 예를 들어본다.

  먼저 2장에서 퇴직 연장의 대안으로 제시한 ‘몇 년의 장기 안식년과 벤치타임’, 3장에서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에게는 노동이 중심이지만, 휴일은 프랑스의 민족 신화다. 과로는 벼락치기다’라고 폄하한 부분이다. 한국의 현실이 바로 복기 됐다. 정부에서 각종 출산 정책을 펴지만 현실은 육아 휴가를 편하게 쓰지 못하는 곳이 더 많다. 또 코로나 대거 확진 때를 돌이켜보자. 콜센터, 물류 창고 등에서 대량 확진자가 많았다. 많은 인원이 밀집된 공간에서 일하는 보건 위생상의 문제점이 주로 지적되었지만, 그 속 배경은 생계 상의 위협이었다. 대부분 시급, 일당, 계약직 노동자인 그들에게 확진은 무급 휴가, 퇴직으로 이어지는 수순이었다. 그래서 확진 증상이 있어도 참거나 숨기고 일하면서 을들끼리의 대거 감염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장기 안식년, 벤치타임 같은 말은 안식이 가능한 사람의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다. 한국인에게 과로는 벼락치기가 아니라 일상이다.


  두 번째는 ‘규범을 파괴하는 주변인(이민자, 성소수자, 소수인종, 죄수, 범죄자)에 대한 예찬’이라는 부분이다. 이민자나 성소수자, 소수인종을 죄수, 범죄자와 동일 선상에 놓는 인식이 놀랍다. 오래전 어설프게 읽다 만 성경 속에서는 ‘소외 3종 세트’를 대하는 지침이 있었다. ‘과부, 고아, 나그네(이민자)’는 ‘사회적 약자, 소외 계급’이니 힘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돕고 포도 수확할 때도 다 따지 말고 일부를 남겨 그들이 먹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종들의 빚을 탕감하고 자유를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안식년과 ‘그리스도교와 짝을 이루는 프랑스의 휴일’은 자부심 있게 말하면서 정작 ‘소외된 자들을 돌보라’라는 성경적 정신은 잊고 휴일의 양식만 가져와 쓰는 모양새다.


  ‘요양원에 가지 않는 삶을 살려면’ 같은 발언도 요양원을 거부할 수 있는 조건의 사람이 요양원에 갈(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의 현실은 건너뛴 채 너무 쉽게 쓴다는 반감도 들었다. 연금 받으며 문화 센터 다니고 게이트볼이나 치는 노년의 자기계발서로는 좋겠지만 폐지 줍는 노인, 국가 보조금으로 임대주택에서 연명하는 노인들에겐 저자의 풍요로운 노년을 위한 지침 같은 얘기들이 전혀 와닿지 않는 중언부언의 공자님, 예수님 말씀 같을 거다.


  저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는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반복하지만 현실의 후면에 대해선 철저히 배제한다. 자유로운 노년의 삶은 얘기하면서 자유를 박탈하는 현실은 생략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그들만의 좋은 말씀 같았다. 모든 책이 다 좋거나 나쁠 수는 없다. 이 책을 아직 완독하지 못한 상태에서 썼던 발제인데 읽은 챕터 중에서는 ‘반복’의 개념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반복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3, 4장 <시간>과 <루틴> 발제다.


<루틴>과 <시간>


3장 <루틴>과 4장 <시간>, 이 두 단어 사이의 핵심 키워드는 '반복'이다. 퇴행, 데쟈뷔, 인생 고저를 맞는 태도가 반복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개념으로 동원된다. 루틴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은데 3, 4장에서 중복적으로 서술되는 저자의 '반복' 개념을 압축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저자가 지향하는 루틴은 2번에 가깝다.


1. 루틴-변주 있는 일상성의 반복​


■ 루틴 (routine)


1. [명사] <규칙적으로 하는 일의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 (지루한 일상의) 틀, (판에 박힌) 일상

2. [명사] [체육 ] 운동선수들이 최고의 운동 수행 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하는 동작이나 절차.


■ 반복과 동일성의 차이


저자는 반복과 동일(성)의 개념을 구분한다. 반복을 니체의 영원회귀나 동양의 환원 사상에 비유하면서 틀에 박힌 일상의 반복은 ‘동일성’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은 ‘반복’으로 구분한다.

두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반 복: 재탕. 중복. 같은 일을 되풀이함.

•동일성: 어떤 것과 비교해 같음.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임. 같은 한 가지. 같은 그 날.


  일면 비슷해 보이는 반복과 다른 동일성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요양원을 든다. 요양원은 똑같은 날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하루하루 정말 똑같기 때문에 반복보다는 동일성, 부동의 현재 혹은 영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흐름에서 제외된 듯 기만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기숙사, 요양원, 군대, 수도원, 여객선 같은 것이 그렇다. (81쪽. 이하 쪽수는 숫자만 표시)


  인용문에서 언급된 장소는 죽거나 만기 퇴소 전에는 그 건물을 벗어나 내가 원할 때 집으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없는 곳, 가족이 없는 곳, 발이 묶인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같은 날(同日), 같은 일(同一)만 반복되는 곳이다.



내가 사는 집 앞에는 요양원과 어린이집이 나란히 붙어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건물 안에서 시작하고 마감하는 양식은 같지만, 그 속은 다르다. 어린이집의 어린이들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갈 수 있고 수업 내용도 매일 달라진다. 그들의 미래는 미리 확정할 수 없다. 반면 요양원의 노인들은 죽어야 그곳을 나갈 수 있고 그들의 미래는 ‘죽음’으로 예정돼 있다. 그래서 하루의 변주가 있고, 다가오는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아이들이 있는 어린이집의 일상은 반복이고 복사기에서 찍은 나날을 되풀이하다 정해진 미래를 맞는 요양원은 동일성의 장소다. 붕어빵 장수의 매일은 반복이지만 붕어빵 틀 속에 있는 붕어들은 동일이다. 반복은 리메이크, 동일은 복사, 재방송이다. 반복의 차이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반복과 동일성을 가르는 구분 아닐까.


현대인에게 반복은 인기가 없다. ‘자기’가 온갖 미디어와 SNS에 가시적으로 떠다니는 에고로 확장된 지금은 미래적 꿈보다 당장의 유명세가 중요하다.(67~68)


 한 가지를 오래 반복해서 장인의 경지에 오르는 기질보다는 여러 가지를 잘하는 팔방미인, 엔터테인먼트적 재능이 주목받는 것은 빨리, 많이 ‘인증’해서 ‘인정’ 받는 SNS의 영향이 클 것이다. 얼마나 깊이 아느냐보다는 수박 겉핥기라도 지금 유행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인기다.


  최근에 종영한 한 드라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에서는 직원 복지와 사원 간 친화를 위해서 동호회를 운영한다. 최소 1인 1 동호회 이상 가입을 권유하는데 동호회 종류의 선택은 자유지만 가입 안 하고는 안 되는 강제성이 있다. 동호회 가입을 하지 않은 직원들은 가입할 때까지 호출, 상담 등의 압력을 받는다. 끝까지 남은 동호회 미가입자 소수자들은 납득이 가는 가입 거부 이유를 대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배우는 건 그만하고 싶어. 수영을 배우는 데, 자유형이 안 됐어. 근데 여럿이 하는 거니까 배영으로 넘어가고, 평영으로 넘어가고, 학교 수업이랑 같아. 난 구구단을 떼지 못했는데, 분수로 넘어가고. 그 뒤로 난 그냥 앉아 있는 거야. 동호회에서도 똑같은 짓 반복하기 그렇잖아.


학교고 회사고 뭐 하나 진득하게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하게 한다. 배우던 걸 다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새로운 걸 배우라고 한다. 한 가지만 계속하는 반복, 못하는 걸 될 때까지 하는 건 시간 낭비, 무능으로 취급받는다. 독서 모임을 예로 들어보자. 책 안 읽는 시대라고 하지만 온·오프 할 거 없이 수많은 독서 모임이 있다. 내가 참여한 <행간>이라는 곳에서는 한 달에 두 권 읽기가 과제였지만 한 달에 10권, 일 년에 100권 읽기 하는 독서 모임도 있다. 책 출간되고 1년이면 벌써 구간, 퇴물 취급받는다. 열 권, 백 권을 읽는 곳에선 고전 읽기, 재독은 비효율이다. 최신간, 화제작, 인기 작가 글도 읽기 바쁜데 제목만 대면 알 만한 책도 아닌 걸, 죽고 없는 사람 책을 깊이, 다시 읽을 이유도 여유도 없다. 남들이 지금 다 읽는다는 책을 나도 어서 빨리 읽어 인스타, 유투브 인증을 해야 뒤처지지 않는 사람의 안도감, 소속감을 느낀다


  남이 아는 건 나도 알아야 하고 시대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집착, 나는 이걸 변방 콤플렉스라 부르겠다. (최영미)


  저자는 ‘루틴은 우리를 바로 세우는 뼈대’ , ‘놀라움보다 재발견이 좋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것에 줄서기 하는 대중의 열망을 이렇게 진단한다.


    삶이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처럼, 보톡스를 잔뜩 맞은 얼굴처럼 굳어지면, 새로운 파트너, 새로운 직업,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싶어진다. 하지만 커다란 변화에 대한 환상은 주로 자기 삶의 조건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 수단이 오히려 현 상태를 강화한다. 불평할수록 그 상태에서 잘 버틴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서 불평하는 것이다.(70)


  새로운 것을 빠르게 익히고 보이는 게 미덕인 시대에서 단일한 반복성이 칭송되는 예외적 분야는 주로 몸을 쓰는 일이다. 운동선수, 군인, 청소부 등 몸으로 자기 역량과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직업군은 반복을 멈추면 오히려 비난받고 그 부재가 단박에 드러난다. 군인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매일 훈련하고 김연아, 손흥민은 경기가 없을 때도 얼음판과 잔디밭에서 어제도 하던 미끄러짐과 공차기를 오늘도 내일도 반복한(했)다.


반복은 부족함이 아니라 뚝심의 표시다. 동일한 주제로 끝없이 돌아가야만, 같은 자리를 계속 파고 들어가야만 위대한 발전이 나올 수 있다. 끈기는 의지의 교리이다. (85)



일상성의 반복과 부재의 공유

  저자는 새로운 것, 특출남에 대한 대중의 심리를 ‘환상, 삶의 자기 조건을 견디기 위한 수단, 불평’이라고 하면서 평범한 일상 속 반복의 미덕을 반복해서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평범함의 과제는 폭풍 같지 않은 폭풍의 일상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시시해 보이는 폭풍이 계속 이어지면 가장 강인한 마음도 무너뜨릴 수 있다. 모험의 부재를 공유하면서 즐거워하는 작가와 독자라는 운명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운명이 비참할수록 픽션은 건실해진다. (73)


  저 문장을 읽으며 내가  참여한 <행간>의 아래 프로필 문구가 떠올랐다. ‘모험의 부재를 공유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 “운명이 비참할수록 픽션은 건실해진다.”와 대구를 이루는 문장으로 아마 <행간>의 지향점 같기도 한.


지속적인 읽기와 반복적인 쓰기로 관성적 삶의 중지와 전환을 꿈꾸는 명백히 온전치 못한 주체들의 공동체. “결여는 픽션을 부른다.”


  어쩌면 반복이란 지루하고 해답 없는 일상 속에서 냉소를 거부하고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 시간, 꿈꿀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2. 시간-반복과 퇴행


■ 반복- 데자뷔의 가면을 쓴 법고창신


프루스트는 도둑질보다 고약한 것이 자기 표절이라고 했다. 이는 새로 만든다고 착각하면서 자기를 모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흉내내는 과정에서 혁신이 이루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의 창조와 재창조는 언제나 모방한 형식과 새로운 형식 사이의 투쟁에서 나온다.(109)


  자기 복제, 자기 표절의 대가로 홍상수를 꼽을 수 있겠다. 출연진도 등장인물 직업도, 장소나 공간도 다 비슷하게 반복되고 대사마저 중첩돼 전작의 후편이나 전편 같은 영화가 대부분이다. 자기 복제와 반복 속에서 미세한 차이로 새로운 걸 만드는 게 그의 영화 세계다. 같은 시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은 직선적이고 동일한 게 아니라 모자이크처럼 부분부분 조각나 각자의 기억과 편의대로 재편집, 재구성된다. 틀린 그림 찾기 같은 반복의 차이와 의미를 발견하는 게 비슷한 그의 영화를 계속해서 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란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싶었습니다-<옥희의 영화>


  저자의 말이나 홍상수의 영화대로라면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유행가 가사는 틀렸다. 과거를 계속 물어 그 의미를 캐야 과거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반복은 불모성과 생산성이라는 양가의 힘을 지녔다. 고정시키는 동시에 변화시킨다. 우리는 전에 들었던 얘기를 또 듣기 싫어하지만 인생은 그러라고 있는 거다. 운동이나 예술 활동의 반복 훈련, 복습, 연극의 재연, 도산 위기에 처한 기업이나 국가의 재건, 잊고 있던 고전의 재독, 재혼, 친구와의 재회, 과거에 했던 일의 반복이다. 나선 계단을 따라갈 때처럼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지만 결코 같은 자리를 두 번 지나는 것은 아니다. (73)


  ‘데자뷔의 가면을 쓰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반복, 상투적인 문구가 되레 혁신적(84)’인 것이 지나간 것, 구태의연함에서 새로움을 발굴해 내는 법고창신이다.

내게 맞지 않는 밥벌이가 지겹고 힘들 때도 있지만 ‘업으로 하는 일은 결국 익히게 된다.(85) 정답 없는 삶도 계속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거울방 속에서 자아니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 나를 만들고 삶을 만들어가는 게 의미 있는 일에 더 가까울 것이다. 누가 주는 미래, 사후의 천국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 내가 천국을 발굴하는 것.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난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나의 해방 일지)



 자발적 퇴행-숙성의 시간


  노래 한 곡 안에는 기승전결이 있고 곡이 변주되기 전후에 간주가 있다. 그것은 정지나 단절이 아니라 중저음이 고음으로 올라가기 전, 단조가 장조가 되기 전의 숨 고르기다. 간주, 변주 없이 계속 고음만 내지르면 부르는 가수도 듣는 청자도 힘들고 피곤하다. 간주는 호수 위, 백조의 보이지 않는 발짓 같은 정중동이다. 자판 위의 키보드워리어는 늘 손가락이 분주해도 알맹이, 실행 없는 동중정이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휴식 중인 것은 아니다. (71)
-엄청나게 움직이면서 아무데도 가지 않으려면 제자리에서 뱅뱅 돌면 된다. (86)


  속도 비워 줘야 건강하게 다시 채울 수 있는 거처럼 꽉 막힌 길에서는 전진할 수 없다. 내 생각과 습성으로 굳은 것을 비워내는 시간, 숨 고르기로 현재를 잠시 연기하며 다가오는 미래를 맞는 숙성의 시간, 자발적 퇴행이 필요하다.


 어떤 행동을 다시 준비하려면 일단 기존에 짜인 행동의 올을 다 풀어야 한다.(109)
점진적 쇠약은 점진적 해방과 함께 가기도 한다.(121)



 군더더기 삶, 군더더기 발제


  이런 독서 세미나도, 발제도 처음이라 적합한 양식도 모른 채  의무감과 욕심이 앞서 군더더기가 많아졌는데 이런 내게 위안을 주는 말을 책 속에서 발견했다.


  반복은 군더더기를 바탕으로 변화를 만든다.
 우리는 끝까지 다듬어지는 상태에 있을 것이요, 불완전한 채로 떠날 것이다.
모든 실패는 새로운 시도의 도약대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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