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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Jan 20. 2017

우리 안에 있는 수동성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에게 해야 할 과제를 알려주고 돌아다니다가 아무 것도 안하는 아이를 발견했다.

 

“넌 왜 아무 것도 안하니?”

“네? 뭐 하는 거였어요? 뭘 해야 하는데요?”

“우선 펜부터 꺼내. 학습지를 펴봐. 학습지는 어디 있어? 방금 나눠줬는데.”

“여기 있어요. 뭘 하면 돼요?”

“옆 짝꿍에게 물어봐. 다 알려줬는데, 넌 뭘 듣는 거니?”


사실 이건 수업 시간에 흔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 아이에게 맞는 키보드를 꺼내 명령어를 입력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 잘 할 텐데. 실제로도 그렇게 말하면 그 아이도 멋쩍게 웃는다. 


수동성. 이런 현상에 난 이 단어를 붙인다. 마치 로봇처럼 누군가 지시를 내리고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움직이는 아이들과 지시와 규제에 능숙한 교사, 그리고 지시로 학교를 움직이는 교육체제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육은 수동성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이다. 왜 우리는 수동성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에 젖어 있을까? 수동적인 교육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 원인은 무엇일까? 아직은 충분히 깊이 파헤치지는 못했지만 이 글을 통해 지금까지 생각한 것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수동성이 우리에게 어떤 피해를 주고 있는지 알고 더 이상 그런 교육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교사들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

3월 어느 월요일, 학년협의회 시간에 학년교육과정부장이 X이론과 Y이론을 설명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읽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둘 중에 어떤 이론을 지지하는지를 물어봤다. Y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거의 대부분 X이론을 지지하거나 현실적으로 X이론이 맞다고 대답했다. 그 부장은 그런 유인물을 통해 학생을 대할 때 우리는 자율적인 존재로 대해야 함을 말하고 싶었지만, 대다수의 교사들이 반대로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쉽게 뒤집지 못하고 몇 마디 말을 덧붙이는 걸로 마무리를 했다. 

(맥그리거가 만든 이론으로, X이론은 사람들은 일하기를 싫어하고 지시받는 걸 좋아하며 스스로는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통제가 필요하다는 논리이고, Y이론은 인간은 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일하기를 좋아하며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존재이기에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위키피디아 참고)


그 후로 가끔씩 그때를 떠올리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교사들에게는 자율성을 부여하고 학년 내에서 회의하며 결정하도록 허용했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강압적으로 다스리려고 하는 건지, 자신들이 또 그 강압적인 환경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그걸 좋아할 것인지, 인간에 대한 불신이 그렇게 깊은 데 어떻게 아이들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인지 등 내 안에서 여러 가지로 반박의 말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많은 교사들은 학생들을 믿지 못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사실 이렇게 질문하면서도 ‘당연한 건데 뭘 질문해?’라는 답이 떠오른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학생들을 불신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몰고 간다. 특히 담임을 하다보면 소리를 지르는 일은 다반사이고 엄격한 카리스마가 없으면 힘들다는 게 정설이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을 자율적인 존재로 보라는 건 세상물정 모르는 얘기로 치부되기 쉽다. 교사라면 다들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갖고 살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내 경험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2004년 처음 담임을 맡았을 때 나는 아이들을 믿는 편이었다. 당시는 의무로 야간자율학습을 했기 때문에 담임에게 사유를 말하더라도 쉽게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좀 달랐다. 보내달라고 하는 사유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은 음악 수행평가 준비를 해야 하는데 밤늦게 하면 아파트 단지에서 힘들다고 해서 모두가 해당되니 모두 가라고 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다음 날 교감에게 학년부장과 불려가서 혼이 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내 귀에 우리 담임은 쉽게 속는다는 말이 들렸다. 갑자기 배신을 당한 느낌이었다. 내가 아이들을 믿은 게 순진해서였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아이들에게 더는 믿음을 줄 수 없었다. 그 이후부터 웬만한 건 다 거절하고 불가피한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일일이 통제했다. 그러다가 생리통으로 집에 가겠다는 여학생에게 이것저것 따져 묻다가 학생 어머니한테 항의까지 받기도 했다. 


교사를 하다보면 아이 말만 믿다가 당할 수 있다는 건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이는 얼마든지 거짓말하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이 아이들을 자율적인 존재로 보기보다는 통제가 필요하고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미숙한 존재로 보는 게 더 타당할지 모른다. 불신이 담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지만 불신이라 부르지 않고 합리적 의심이라 부르는 것도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소수의 아이들에게 당한 거짓의 경험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마음 전체를 병들게 할 수 있을까? 몇 번의 좋지 않은 경험이 불신의 주요한 원인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교사의 불신은 그 뿌리가 어릴 적 자신이 받은 교육에 있을 것이다.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를 받은 경험보다 의심하며 조금만 빗나가도 혼이 나는 경험을 더 많이 했기에 교사가 되어도 아이들을 믿어주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자라온 환경은 우리가 어떻게 교육할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설사 자신이 받은 교육이 좋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고 바꿔보려고 해도 대안을 만들어갈 구체적인 경험이 없다면 대안을 실행할 힘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겪었던 과거 경험의 족쇄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봐도 그건 완전히 다른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힘이 필요한데 그게 없는 것이다. 게다가 대안으로 접근해도 필연적인 실패를 맛보는 것은 환경 자체가 여전히 과거로부터 누적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 강고하다. 그래서 교사는 대안적 삶을 살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로 회귀하기 쉬운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불신으로부터 비롯된 강한 통제가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요인이 더 추가된다. 그것은 학교의 수직적인 체제이다. 관리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일방적인 명령을 하는 학교일수록 교사는 역시 일방적인 불통 문화에 젖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여 편안함을 추구하게 된다. 그 속에 안주한 교사에게는 역시 일방통행이 생활양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벗어나는 건 불편함과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는 일방통행만 존재하는 비교육적 공간이 된다. 일방통행의 의사소통 체계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은 매우 중요하다. 복종이 어긋나면 그것은 반항이 되고 그런 반항은 그냥 두지 않는다. 그래서 형성되는 것이 수동성이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무슨 일이든 자기 생각을 가질 수 없고 심지어는 그 명령을 변형할 수도 없다. 자기 생각대로 했다가 관리자에게 심한 말을 들었다면 자율성은 파괴되고 그 자리에는 고통과 아픔을 피하기 위해 수동성이 자리 잡게 된다. 그렇게 수동성이 일단 자리를 잡으면 자율성은 오히려 불편을 초래하는 이물질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믿게 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생각을 해서 뭔가를 결정하는 것보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훨씬 편하기도 하다. 생각도 해본 사람이 잘 하지 자율성을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그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지시 이외의 것은 잘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건 해봤자 결국 손해이거나 무용지물이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일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경향을 갖는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 일이 가치가 있거나 의미가 있어서 해보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냥 보상을 받기 위해서 할 뿐이다. 그것을 도전이라 여기며 성취하면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점수를 모으고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한다. 그게 지금의 승진제도이다. 그런 제도에서 승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대다수는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를 쓸 뿐 교육을 위해서 애를 쓰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교육을 위해 진짜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게 가능해요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어느 학교에 강의를 나갔다. 협동학습에 대해 강의해달라고 했는데 난 내면의 힘을 키우는 교육을 가지고 갔다. 컴퓨터도 안 되고 참가자도 매우 적어서 그냥 말로 했다. 강의 중에 학생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더니, 어떤 선생님 왈, ‘존중이 가능해요? 그런 아이들의 인격을 믿으라고요?’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그의 마음이 불신으로 차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보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런 유의 경험은 여러 학교에서도 경험할 수 있었다. 영어과에서 수행평가 70%를 한다고 하면 다들 믿지 못하는 눈치이다. 놀라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는 가운데 어떤 선생님은 그렇게 해서 애들의 영어실력을 키울 수 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시험성적이 영어실력이 되는 것처럼 받아들인 기존관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수행평가를 늘렸다는 자체보다는 왜 늘리게 되었는지와 그 과정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에 초점을 둬야 하는데 마치 자기의 오랜 방식이 공격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불신에 뿌리를 두고 수동성을 체득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갖고 배척한다. 교육의 변화는 비현실적이며 이상적일 뿐이라고 치부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고 그런 도전은 무모한 것이라며 시도조차 스스로 막아버린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시도했다고 이야기해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일뿐 그것이 자신에게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들이 말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지금의 현실은 성적으로 줄세우기가 여전히 대세이고 대학이 인생의 성공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학원에 다니고 무수히 많은 지식을 듣고 암기해야 한다. 미래는 항상 불안하며 공부는 그런 미래를 어둡게 만들어준다. 공부는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붙들고는 있지만 집중력과 열정은 생기지 않고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차오른다.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는 사라지고 공부를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아이들만 가득하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수업은 전쟁과 비슷하다. 공부를 시키려는 교사와 하지 않으려는 학생들 간에 대치 속에서 긴장과 갈등은 언제나 일어나고 교사와 학생은 배움보다는 여기에 에너지를 더 써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의 자리를 차지하고 껍데기가 내용물의 자리를 차지하는 셈이다. 


학교와 교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좋은 아이와 나쁜 아이를 구별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로, 성실한 아이와 불성실한 아이로, 조용하고 차분한 아이와 시끄럽고 말 많은 아이로, 말을 잘 듣고 협조적인 아이와 성격이 강해 말을 걸기가 꺼려지는 아이 등으로 나눈다. 그리고 그 구분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전자가 많은 학교는 좋은 학교이고 후자가 많으면 힘들고 어려워진다. 이런 구분이 뚜렷한 곳에서는 더욱 힘들어지는데, 그것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아이에게서 부정성이 상승작용하면서 좌절이 쌓이면서 구성원 모두 화를 내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다. 


잠시 내 경험을 이야기해보자. 지금 가르치는 반 중에 유달리 수업이 안 되는 반이 있다. 그 반은 학기 초부터 수업이 산만하고 잘 듣지 않는 분위기로 일관해왔다. 타반과는 다르게 수업시간에 다른 이야기를 크게 하고 흐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난 함께 배우는 학습을 만들기 위해 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자꾸 수업을 방해할 거면 5분간 퇴장시키겠다.’, ‘수업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단결과 처리하겠다.’ 그리고 소란스러워지면 소리를 지르고 혼내면서 분위기를 주도해갔다. 이런 나의 경향은 그 반 담임선생님이 강하게 다루는 경향과 맞물려 점차적으로 소외되어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내가 설명하면 1분도 안돼서 멍하게 있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같이 모둠을 형성해서 하라고 해도 거의 하지 않고 각자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수업을 통제하는 경향은 강해졌다. 어제는 조금만 떠들어도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총 6명이 나갔다 들어왔다. 그 애들을 모두 불러 물어봤다. 모두가 사연이 있었다. 그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좀 예민해진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회복적생활교육에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5%의 소위 문제아에 집중하지 말고 95%의 정상에 집중하고 그들이 5%를 통제하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내 수업은 5%를 막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잔소리하고 위협하고 협박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면서도 한쪽에서는 뭔가 께름칙했던 마음이 있었다. ‘몇 명에게만 해도 될 말을 전체적으로 자주 하면 안 좋을 텐데, 난 왜 이러고 있지?’ 그 반의 분위기를 5%가 주도하도록 돕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이런 나의 경험 속에서 깨닫는 것은 도대체 객관적인 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객관적이라 함은 단지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사이에 공유된 공통의 의식과 판단체계일 뿐이지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현실이 이러한데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지를 묻는다면, 그건 그 사람과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 형성된 공통의 인식이지 그게 불변의 진리처럼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즉, 현실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난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말에 덜컥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나 혼자 현실을 다르게 인식한다고 이미 형성된 의식과 행동패턴이 쉽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현실은 변할 수 있고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상대적 주관론의 개입 여지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힘은 수동성의 늪에서 나온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수동성으로 인해 생긴 불신, 또는 불신으로 인해 생긴 수동성 안에서는 언제나 내가 아닌 타자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나는 그 속에서 피해자가 될 뿐이다. 항상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결론을 맺고 주체적인 힘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이 수동성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폐해이다. 


넌 이 정도 밖에 안 되니?

우리는 혼나면서 교육을 받았고 혼내면서 교육을 하고 있다. 문화가 많이 바뀌면서 수용해주는 문화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아이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가기 때문에 어릴 적에 확실히 고쳐놓아야 한다는 말은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아이의 버릇이 여든까지 갈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아이의 존재가 부모의 판단에 내맡겨진다. 부모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하게 혼내는데 그게 아이를 불신하는 정도에 따라 아이의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까지도 점점 넘길 수 없게 된다. 아이는 부모의 성에 차지 않는 부족한 존재로밖에 비쳐지지 않고 부모로부터 항상 부족하고 못난 존재라는 말을 듣게 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 정체성이 형성되는데 이런 아이는 부정적인 정체성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짓는다. 사실 어느 부모도 모두 자식이 잘되라고 하는 것이지 자식이 정말 미워서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잘못됐다. 아이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못난 존재라는 인식을 더 강화시켜주니 말이다. 부모가 자식 잘되라고 혼내는 게 오히려 자식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가정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교는 가정과는 다르게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지도해야 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집단생활을 할 때 서로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지내려면 규칙을 잘 지켜야 하는데, 부정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학생은 그런 규칙을 잘 지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규칙이나 잘 지키면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는 그런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에게 ‘넌 왜 매일 말썽만 피우냐?’, ‘넌 도대체 잘하는 게 뭐야?’ 등등의 말을 한다. 이에 대해 자기 자신은 항상 못나고 미움 받는 존재인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조금만 밉보이면 여기서도 똑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절망한다. 그래서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마음에서 더 미운 짓을 하게 된다. 난 원래 그런 존재이니 너도 곧 그렇게 날 대할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을 갖는 것이다. 


아이를 혼내면서 내뱉는 이런 부정적인 말은 어른의 입장에서는 잘 하라고 하는 사랑의 메시지이다. ‘너는 왜 그 모양이야?’는 ‘너는 잘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자꾸 행동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이미 부정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고 어른에 대해 불신을 하는 아이에게 좋은 쪽으로 해석될 리 없다. 결국 혼내면서 하는 교육은 아무런 교육적 효과도 얻지 못한다. 다만 아이의 수동성을 강화하고 부정적 정체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혼내면서 교육하고 있을까? 첫째는 우리가 경험한 것이 수치를 주는 교육이고, 둘째는 그렇게 해야만 아이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첫째는 우리의 교육환경이고 둘째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전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치의 환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지만 거기에 대해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환경에 대처해왔다. 조금 더 상술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수치심을 많이 느끼며 자라왔다. 성적으로 줄을 세워 상위의 소수만 존중받고 우대받는 곳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수치를 당해왔다. 그 상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비천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내 뒤에 있는 자들을 보면 된다. 나보다 못하는 자들을 보며 우리는 안심한다. 만일 없으면 만들면 된다. 그게 성적이 아니어도 된다. 나보다 힘이 적은 아이도 된다. 내 밑에 굴복시킬 수 있는 존재라면 그 누구든 가능하다. 


그렇게 수치를 벗어나려는 노력의 산물로 우리는 부정적인 언어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특히 나보다 못한 존재를 만들려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것이 나와 직접적인 비교를 하지 않는 존재여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미 습관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비난하고 모욕적으로 쓰는 말투를 마치 교육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은밀하게 느낄 수 있는 우월감이 있다. 자신의 못난 존재라는 정체성을 뒤집을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기 말에 복종하는 모습에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복종하지 않는다면? 상처받은 자존감이 더욱 심하게 몸부림치게 된다. 그리고 그 아이를 자기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는 마음이 커지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이 받은 수치를 극복하려고 아이에게 수치심을 주는 대물림의 현상, 이것이 아이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가는 또 다른 이유이다. 




가르치는 현장 속으로


우리가 아이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가는 데에는 수업 속 가르침도 큰 역할을 한다. 아이들에게 많은 지식을 가르치고 암기하도록 종용하는 것, 아이들이 잘 이해를 못한다며 교사의 이해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하는 설명식 수업, 점수로 배움을 측정하고 그것이 진로를 결정짓도록 강요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배움에 열정적이고 새롭게 알아가는 걸 좋아하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점점 집중력을 잃어가고 무능해지는 현상은 학교가 성장에 초점을 둔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인간을 양성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학교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우리는 반교육에서 벗어나 참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경직된 교육과정

먼저 지식과 교육과정을 들여다보자. 일단 국가가 정하는 교육과정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가르칠 내용은 많아지고 있다. 사회의 변화가 빨라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는 하나 그 많은 걸 다 가르쳐야 아이들이 사회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빠른 변화의 흐름을 학교는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삶에 필요한 능력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훨씬 낫다. 즉,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표현능력, 해석능력, 요약능력, 분석능력, 인내력, 공감능력, 대화기술 등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다고 소통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의 머리보다 마음에 전달하는 게 필요하고 상대방의 말에 담긴 마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그 많은 지식을 우겨넣듯 가르치는 게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배움의 현장 속에서 배움의 주체는 지식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고 함께 배우는 타자와도 그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지식은 객관적이지 않다. A라는 지식이 B라는 지식과 만나면 달라진다. 그리고 ‘가’라는 사람이 그 지식을 만나면 ‘나’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이해가 만들어진다. a라는 환경에서 만난 A 지식은 b라는 환경에서는 다른 의미로 읽혀진다.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지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정답이 언제나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기초적인 지식에 대한 이해나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지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학자들이 발견해 온 지식 중에 강한 힘을 가진 반대 이론이 없어 객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식이 있다. 그런 지식은 상황맥락상 사회를 지배하는 강한 힘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배우는 사람의 배경 – 경험, 사고의 틀 등 - 과 만났을 때 변형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만약 이를 막고 절대적인 위치를 고수하려 한다면 그 지점에서 수동성이 야기된다. 


수동성을 야기하는 지식은 배우는 자에게 강압을 행사하고 배우는 자에게 자신을 주입하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런 것이 점점 더 많아질수록 배우는 자는 그런 지식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벼락치기로 시험은 보되 그 후까지 기억할만한 지식으로 중시여기지 않는다. 결국 그런 강고한 지식은 쉽게 버려지게 된다. 


가르치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배우는 자와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면 교실에서 소외된다. 배우는 자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교사는 지식 자체와도 분리되어 있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지식이 배우는 자에게까지 가지 않는 것을 보고 곧 지식에 담고 있는 개인의 의미를 빼버린다. 즉 유의미한 지식에서 무의미한 지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일단 무의미한 지식이 되면 가르치는 자의 열정은 사라지고 겉으로 강압을 행사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시험과 보상, 그리고 벌이다. 그런 것이 전면에 나서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희미하게나마 존재하던 관계의 끈은 속절없이 끊어지게 된다. 의미로부터 분리된 사람과 지식이 허공을 떠돌아다니며 수업시간을 때우고 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러한 지식이 학교를 지배하면서부터 학교는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성공을 향해 몸부림치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그리고 그 성공은 좋은 대학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하는 것일 뿐이다. 평균 수명 80 이상이 된지도 10여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기껏해야 4년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 인생의 성공을 말할 정도의 강한 영향력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게 과연 현실인가? 아니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잘못된 신념인가? 


안타깝게도 그런 신념이 학교를 끌어가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인서울대나 국립대에 들어가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원을 돌아다니며 저녁까지 시달리고 고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각 과목에 대한 선행학습을 한다. 중학교 과정부터 고등학교 과정에 이르기까지 뇌가 발달하면서 배움의 깊이를 더해가야 하는 나이에 많은 지식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각급 학교는 상급학교의 교육을 위해 공부를 가르친다. 이는 교육의 연계성을 위한다기보다 최종 목적인 대학교 진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등학교 때는 중학교 교육을 잘 따라가기 위해 배우고,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 교육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배우고, 고등학교는 대학교에 잘 들어가기 위해 배운다. 우리 학교는 혁신학교이지만 교육과정을 덜어내고 덜 가르치자는 주장에 대해 고등학교에 가려면 다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교사들이 많다. 위에서 말한 지식의 강고함이 교사의 신념에 깊이 파고든 증거이다. 


내가 보기에 지식은 우리의 사고능력을 신장시켜 주는 도구이자 매개체이다. 지식은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지식은 단지 물질이나 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생명령을 갖고 있어 누구든지 진정으로 만난다면 놀라운 진리를 알려줄 수 있다. 학교는 그런 지식과의 만나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학교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지식과의 만남을 통해 다른 지식과도 만나고 연결시키고 새로운 지식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내부로부터 발현된다. 그런 만남과 능력이 깊어지는 것이 연계된 학교 시스템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삶과 상호작용하며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지식을 저 멀리에 있는 객체로 두고, 표면적인 지식을 누가 많이 갖고 있는가에 평가의 초점을 둠으로써 지식도 배우는 자도 모두 분리되어버렸다. 


경직된 수업

두 번째로 봐야 할 것이 교사의 수업이다. 일단 교사 중 대부분은 지식과의 만남에 대해 경험이 별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또는 지식을 어려워하는 학생에게 잘 가르치기 위해 교사는 전달 방식에 대해 고민을 할 뿐, 아이가 지식을 어떻게 만날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교사는 주로 설명에 의존한다. 이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내가 보기에 강의는 새로운 생각을 알려주거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를 할 때 적절한 형태이지 지식 전달의 방법으로는 매우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지식을 설명하는 자의 언어와 표정이 그것을 전달하는 통로인데 그것에 숙달된 사람이 거의 없다. 게다가 지식을 전달하는 자와 지식을 받는 자 사이에 연결되거나 통하는 교감이 없으면 거의 전달되지 않는다. 단지 인상으로만 남게 된다. 그래서 그 다음에 비슷한 소리를 들을 때 갑자기 인상이 떠오르는 정도로 남는다. 마치 어떤 사람을 보고 누구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인상으로 남는 지식이 별로 의미가 없는 이유는 그 지식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지식은 정박할 수 있는 닻이 없다. 어느 순간 갑자기 생각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안 좋은 운에 내맡겨져 있다. 교사들은 열과 성을 다해 목이 터져라 설명하지만 정작 학생들은 교사의 표정과 말투로 인상을 만들고 실질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루한데 다른 일이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수동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유체이탈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지식과의 만남을 막는 수업은 어떤 게 있을까? 우선 학습지에 빈칸을 채우는 방식이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고 핵심을 요약해준다고 하지만 암기와 상기 외에는 그 어떤 사고능력도 별로 필요 없는 형태가 되어버린다. 교사가 바라는 소외되지 않고 누구든 참여하는 수업을 위해서 개념을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이것만 외우면 된다고 말하는 그 의도는 순수해보이지만 정작 그 아이는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은 키우지 못한다. 게다가 그렇게 상대방이 요약한 것을 외우는 게 어떤 의미인가? 이것만 외우면 시험은 잘 볼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배우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까? 알을 깨고 스스로 나와야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데 외부에서 보기에 어려워한다고 구멍을 내주고 손쉽게 나오도록 하면 과연 그 새가 잘 날 수 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낼 능력을 이미 가진 아이들에게 어려움을 제거해주면 그게 아이를 위하는 것일까? 


무기력한 아이는 능력이 없어서 무기력해진 것이 아니라 불신과 비웃음, 수치의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스스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자기 정체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미명하에 쉬운 것을 준다고 하지만 그 아이는 여전히 자신이 만들어낼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다. 요약은 자신이 해야 의미가 생기는데 교사가 다 해준 것이다. 시험에 대한 의미도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설명하는 것을 자신이 듣고 이게 왜 중요한지 생각하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중요하니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 아이가 하지 못하고 교사가 다 해주면서 그냥 외우라고 하는 것이 수동성을 키운다고 본다. 학습을 통해 내재된 능력을 발휘하도록 기회를 주지 않고 다 교사가 가져갔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정답만을 향해 나아가는 수업이다. 아이들은 다양한 사고를 통해 자신의 배움을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정답이다, 아니다를 교사가 판단하기 시작하면 자기 배움을 만들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왜 정답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해한 아이보다 훨씬 더 많은데, 이해의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수업은 끝나거나 –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의 이해도 거기에서 멈춰버린다 – 다음 걸로 넘어간다. 게다가 시험에서 나온 성적으로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는가 판단하는 어른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모르는 내용을 어떻게 할지 몰라 그냥 외운다. 그게 가장 최선이면서 가장 좋은 방법이라 확신하면서 말이다. 모를 때는 그냥 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게 학습의 능력을 확장시켜주지는 못한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시험만 아니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시험이 있어서 하는 것이라면 시험이 끝난 후에는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게 된다. 그래서 무작정 암기하는 벼락치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정답이 항상 있는 수업은 아이들이 주눅 들어 자신의 생각을 만들기가 어렵다. 그리고 교사에 매우 의존하거나 아니면 의심한다. 교사가 수용하지 않고 거부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교사와의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정답을 알게 되면 그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갖지 않기 때문에 사고가 경직되기 쉽고 그 지식을 다른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고차원적 사고능력이 떨어진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정답이 틀리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 심히 당황스러워하게 된다. 자신이 갖고 있던 믿음이 부서지는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여러 개의 정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는 손도 못 대기 쉽다. 이런 아이가 한 가지 문제를 풀기 위해서 다양한 해결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까? 자신이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관조할 수 있을까?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잘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을까?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이 그른 것으로 판명날 경우 믿음을 잃고 배신당한 느낌으로 분노를 표출하지 않을까? 우리는 원래부터 서로 다른 존재인데 정답과 통일을 중시하는 학교 문화로 인해 다름을 틀림으로 보고 배격하는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어느 한 쪽으로 몰리고 다른 쪽으로는 원해도 가지 못할 때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권력을 가진 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편하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저항하느냐, 아니면 순응하느냐는 아이들의 선택이지만 강한 압력에 굴복하는 게 훨씬 더 편하다는 건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우리 안에 수동성은 그렇게 길러진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어쩔 수 없음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갖고 저항하며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깨어있는 교사에게 주어진 일이다. 지식을 전수하여 성적을 높이고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는 교사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 우리가 할 일이라고 지금까지 전해 들었던 것들에 대해 의심해보자. 교사로서 하는 모든 행위가 과연 교육적인지, 아니면 아이들을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건 아닌지 깊이 들여다보고 성찰하자. 그게 우리가 출발해야 할 지점이다. 비록 잘 되지는 않더라도, 순간순간 모순되는 자신을 보더라도 생각하고 비판하고 도전하고 시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우리를 통해 삶을 키우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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