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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옥 Mar 25. 2021

독백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독백     

                                                                                                                                                                                                                                                                    이 연 옥       

   

혼자 우두커니 서 있다. 주위에서 오도손 정을 나누던 친구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높은 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무너진 건물 더미와 널브러진 쓰레기에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에 서서 평화로웠던 마을의 모습들을 회상해 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지붕은 얼기설기 끈으로 묶어져 있고 기왓장과 폐타이어 등이 올려 있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집집마다 화분이며 깨진 항아리에 꽃을 피워내고 채마밭을 일구며 알콩달콩 잘 살아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밤나무가 많아서 밤골 이란 이름이 붙여진 마을에 밤꽃 피는 계절이 오면 밤꽃 향기가 마을에 가득했었지. 소록소록 눈이 내리면 마치 떡가루를 뿌려 놓은 듯 하얀 눈들이 지붕 위를 덮어 마치 동화 속 마을처럼 포근하기만 했었다.     


고양이 아주머니의 채마밭에 채소들이 그득해지면 이웃들이 모여 막걸리 곁들인 소박한 삼겹살 파티를 하는 모습을 보며 참 뿌듯했었지. 그런데 그 정 많았던 고양이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운동을 위해 매일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면서 나와 만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훌쩍 떠나갔을까? 털이 뭉그러진 고양이만 주인이 떠난 빈 집 마당에 맥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요즈음 마음이 부쩍 불안하다. 마을 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담벼락에는 작은 창문들이 앙증맞다.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색의 대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러한 집들 사이로 난 골목길은 좁디좁다. 혼자 가기에 좋을 만한 골목들이 이어져 있다. 이런 마을에 정 붙이고 살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마을을 떠나가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요 며칠 사이 시무 시한 포클레인이 한 대 두 대 마을에 들어서기 시작하며 공포심을 자아내고 있다. 마을을 지키던 나무들도 하나둘씩 베어지고 있다. 마을 안 공동 우물 옆에 유일하게 한 그루 서 있던 밤나무가 베어지던 날 밤나무도 울고 마을에 마실 다니던 새들도 울고 길냥이들이 울고 나도 울었다.      


베어지기 전 수많은 사연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던 밤나무는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었다. 여기저기 빈 집들이 즐비해 있는데 밤나무와 그리 멀지 않은 어떤 빈 집 슬픈 일 이 벌어졌다고 한다. 무슨 영문인지 집 마당 앞에 있는 나무에 아들이 목을 매어 죽어 있었다니 무슨 사연이 있기에 빈 집에 들어와 목숨을 끊었을까? 밤나무는 어안이 벙벙했다. 혈혈단신으로 밤골에 들어와 구차함을 구차함으로 여기지 않고 기쁘게 살다가 갑자기 오갈 데가 없어졌던 할머니도 눈에 밟혔단다. 손바닥만 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부엌 안에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있었던 할머니의 거처에 세간살이만이 덩그마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동나무가 있었던 집에서 골목을 죽 따라 올라오다가 축대형 계단을 오르면 판판한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옛날 시골에 점방처럼 생긴 작은 ‘밤골상회’가 있다. 상회 옆으로 돌아가면 확 트인 공간이 보인다. 사진가들이 없어지는 마을을 기록하기 위해 마을을 촬영하다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잠시 쉬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막걸리도 마시는 곳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카메라를 둘러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내 전망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타이어가 올려 있고 길냥이들의 아지트이기도 한 마을 지붕 너머로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나만 홀로 남겨두고 야속하다. 눈만 뜨면 바라다 보이던 밤골상회의 주인이 이 마을을 떠났나 보다.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사라져 가는 밤골을 기록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자주 마을을 찾아와 주었던 어느 사진가를 만났다. 그는 홀로 남겨진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위로한다. 멀찍하게 우두커니 홀로 서 있던 나의 존재에 대해 인식해 주다니 고마웠다. 사진가는 이 번 봄에 내가 한 번 만 더 꽃을 피워주기를 간절히 고대한단다. “꽃이 피는 것도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한 어느 시인의 시처럼 그동안 내가 맘껏 꽃을 피워 낼 수 있었던 밤골이 고맙기만 했는데 이제 두렵기만 하다. 나의 꽃핀 모습을 간절히 보고 싶다며 이른 봄 허청허청 되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난다. 나도 다른 나무들처럼 베어 지기 전에 서둘러 꽃을 피워내고 싶다.      


설마 몬다(고개) 마을 끝자락 한쪽에 얌전히 서 있는 나를 사정없이 해치울라고, 꽃 한 번 더 피워내고 싶어 하는 나를 해치울라고, 아기자기 그림 같았던 밤골마을이 도시재생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새로 꾸며지는 공간과 잘 어우러져 오래도록 꽃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건축을 하고 있는 밤골의 옛 모습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이 탈바꿈되는 현장에서 한 그루의 환한 꽃을 피워 굽이굽이 슬픈 밤골을 위로하고 싶다. 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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