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우리 집
슈퍼같이 생긴 집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중학생 시절 우리 집을 몰랐던 친구가 우리 집이 있던 동네를 보고 달동네 같다며 저런 판자촌 같은 곳에 사람이 어떻게 사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나는 저기가 우리 집이라 말했고 친구는 바로 사과를 했다. 그렇게 보이는 게 사실이기에 친구의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전세나 월세가 아닌 정말 우리 집이라는 사실이 좋았을 뿐이다.
집의 구조
가파른 언덕 위에 6채 정도의 집이 있다. 그중 가장 높은 곳에서 두 번째에 있는 집이 우리 집이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중간에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면 은색 대문이 보인다. 은색 대문을 열면 마당에 있는 텃밭과 화단이 보이고 바로 왼쪽에 집으로 가는 낮은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는 집에 들어가는 샷시문 왼쪽에는 수돗가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2층 옥탑방에 가는 길이 있다. 먼저 옥탑방에는 각종 담금주와 침대, 잘 사용하지 않는 물품들이 있다. 다시 계단으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 넓은 마루와 왼쪽에는 부엌, 안방 순으로 배치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샷시문으로 둘러있다. 안방으로 들어가면 왼쪽에는 장롱 오른쪽에는 양주와 각종 술이 있는 선반과 TV가 있고 정면에는 작은방과 화장실 부엌이 연결되어있는 문이 있다. 작은 방은 미닫이 문으로 되어있고 왼쪽에는 장롱, 컴퓨터 순으로 놓여있고 정면에는 TV가 있었다. 화장실은 한 명만 들어가도 꽉 찰 정도로 작았다.
집과 얽힌 이야기
이 집에는 은은하고도 깊게 남은 기억이 있다. 여름이 되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인데 모기향 피워진 시원한 마루에 누워 부엌에 있는 엄마와 소소한 대화를 하던 기억이다. 특별한 것 없는 순간이지만 이상하리만치 깊게 남아있다.
집돌이 었던 나는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엄마를 따라 집안일을 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다. 빨래와 청소, 설거지는 기본으로 했고 밥 짓는 법, 국 끓이는 법 등 간단한 요리들도 배웠다. 가끔은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계절에 맞는 화분을 심거나 분갈이를 했다. 제사나 명절 때면 같이 전을 부치고 엄마가 스트레스를 해소해야겠다며 대청소와 가구 재배치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종종 친척 누나가 집에 놀러 오면 셋이서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녔다. 장날 때면 나들이 겸 시장 구경을 가고 친한 친척들의 생일이 가까워지면 엄마와 함께 선물을 고르기도 했다. 명절과 가까운 엄마 생일에는 명절 용돈을 모두 모아 18K 목걸이나 귀걸이를 선물했다. 이렇게 함께한 좋은 시간들이 많은데 사춘기 시절에 엄마와 말다툼을 하다 이럴 거면 왜 나를 낳았냐고 말하며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이런 말을 한 것 자체를 기억 못 했는데 추후에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 엄마의 가습에 대못이 박히는 말이었다는 것을 듣고 그 뒤로 잊혀지지가 않는다. 엄마도 할머니에게 그런 적이 있다며 자책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직까지도 후회스러운 일로 남는다.
마당이 있던 집이라 친척들, 아빠의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왔다. 마당에서 숯불을 지피고 고기나 조개를 구워 먹었다. 마당에서 1차를 하고 마루로 가서 2차를 했다. 그러다 술자리에 흥이 오르면 자주 노래방을 갔다. 지인들과 함께 가면 어른 방 애들 방 나눠서 노래를 불렀는데 서로 오가며 노래를 몇 곡씩 부르고 오기도 했다. 엄마 아빠가 노래방을 좋아해서 가족끼리 노래방도 자주 갔는데 어렸을 때는 우리 집 자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노래를 못해 엄마가 귓가에 불러주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여전히 못 부르긴 했지만 혼자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가족끼리 노래방을 가면 항상 엄마 아빠는 블루스를 췄다. 우리에게도 블루스를 추는 방법을 알려주고 다 같이 블루스를 추며 노래를 불렀다. 엄마 아빠가 부르는 노래를 자주 듣다 보니 이제는 음원을 들어 본 적 없어도 노래방에 가면 자연스럽게 부르고 있다.
아빠는 밀리터리 용품이나 무기들을 참 좋아했다. 아빠의 말로는 군대를 엄청 가고 싶었는데 그때 당시 3대 독자라는 이유로 군 면제를 받아 가고 싶어도 못 갔다고 한다. 운동을 했던 아빠로서는 군대를 못 간 것에 많은 아쉬움을 표했다. 그 뒤로 군용 나이프나 총, 장검, 목검, 조립 탱크, 비행기들을 모으기도 했다. 아직도 아빠가 심혈을 기울여 전투비행기를 조립하거나 완성품이나 새로운 용품을 구했을 때 자랑스럽게 보여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 날은 동생과 나에게 목검을 하나씩 선물해 주었다. 나는 친구들을 데려와 목검을 자랑했는데 그러다 친구가 자신에게 판매하라는 말을 했다. 한 달 용돈의 반 이상이 되는 금액을 제시한 친구의 말에 잠깐 고민하다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또 그것을 엄마 아빠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고 돈을 벌었다고 했다. 이에 아빠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운해하고 그 이유를 몰랐던 나에게는 엄마가 설명을 해주었다. 알고 보니 아빠가 구매한 금액보다 싸게 팔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물했던 아빠의 마음이 중요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니 아빠의 마음이 어땠을지 느껴진다.
이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컴퓨터를 마루에 놓고 사용했다. 이때 벽돌깨기 게임을 했었는데 우리들 중에 아빠가 가장 잘했다. 라운드를 클리어할수록 난이도가 올라가며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는데 그럴 때면 아빠는 마우스에 손수건을 감싸고 했다. 집중하다 보니 손에 땀이 많이 났던 아빠는 손수건으로 마우스를 감싸고 우리는 뒤에서 숨을 죽이며 게임을 구경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게임이 끝나면 우리도 손에 땀이 찼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시간이 지나 컴퓨터는 우리 방으로 옮겼다. 아빠의 컴퓨터 사용은 줄어들고 사춘기가 온 우리의 컴퓨터 사용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사춘기가 온 뒤로 가족과의 대화도 줄어들고 아빠와의 교류도 줄어들었는데 아빠가 엄마랑 술을 마시고 말다툼을 하고 나면 나에게로 와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달라고 했다. 그럴 때면 싫으면서도 마음이 몽글하고 아빠와의 짧은 대화와 혼잣말 그리고 따라 부르는 노랫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의 싸우는 모습을 자주 봤다. 서로 없으면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하지만 그만큼 자주 싸웠다. 엄마 아빠가 크게 싸울 때면 아빠는 집을 나가버리고 엄마는 집에 남아 울었다. 그럴 때면 동생과 나는 서로 역할을 나눠 엄마 아빠를 챙긴다. 주로 동생은 아빠를 따라 나가고 나는 집에 남아 엄마를 다독여줬다. 그런데 가끔 아빠를 따라나간 동생이 맛있는 것을 먹고 왔다고 몰래 자랑하기도 하고 아빠와 둘이서 스티커 사진도 찍고 오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부러움에 나도 아빠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엄마 아빠의 싸움이 심해져 이혼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혼 이야기는 자주 오가서 크게 걱정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류까지 준비해오고 집안에 냉전이 온 것이다. 이때는 누가 누구를 데려갈 것인지 우리는 누구랑 살고 싶은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이때 밤을 새우도록 누구랑 살아야 되는지 고민을 했다. 잠도 못 자며 고민을 했는데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다행히도 이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점점 사이가 좋아졌고 이혼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방에서 잠을 잘 때면 동생과 이런저런 일이 많이 있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 들어오면 자는 척을 하기도 했고 우주와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느 날은 방구 소리를 내며 장난을 치는데 밤늦게 까지 장난치고 웃는 소리에 결국 엄마에게 혼이 났다. 동생과 나란히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으면서도 얼굴에서 웃음끼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혼이 나면서도 장난을 쳤고 엄마는 우리의 웃는 모습에 더 이상 혼내지 못하고 늦었으니 이만 자라며 좋게 말하고 끝이 났다. 웃음이 가득한 날이 있다면 울음이 가득한 날도 있었다. 동생과 대화를 하거나 장난을 치다 싸움으로 번지고 그러다 나는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럴 때면 동생이 엄마에게 일러 회초리를 맞기도 하고 아무 말 못 하고 울면서 자기도 했다. 추후에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는데 이때 당시 형이 나이 먹으면 똑같이 때려줄 거라고 마음먹으며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서로 잘 이야기해서 풀었지만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아무리 동생이 용서를 해준다 하더라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에 이때와 같은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집에 살면서 미술과 복싱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마당에 샌드백을 설치해 복싱 연습을 하기도 하고 아령을 구입해 운동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만화나 게임 캐릭터를 따라 그리기도 하면서 복싱과 미술 두 가지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 하지만 집 안 사정으로 두 가지를 모두 가르쳐 줄 수 없어 한 가지를 선택해야 됐다. 많은 고민 끝에 미술을 선택했고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미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 외식을 한 뒤 화방에 들려 동양화 석채 물감, 아크릴 물감, 붓, 접이식 이젤 등을 사 주었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보고 싶었던 나는 몇 번의 연습 끝에 부엌의 벽과 작은 방의 벽에 큰 벽화를 그렸다. 부엌에는 히말라야 산맥을 그려 넣고 방 안에는 중2병 가득한 사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있어서 관대했던 엄마 아빠는 미술학원에서 그려온 동양 풍경화도 표구 액자를 하여 안방에 걸어두고 다른 수채화 그림이나 소묘들도 안방에 가득 걸어 놓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 엄마가 우리 방에 들어올 때면 깜짝깜짝 놀란다고 하여 벽지를 새로 붙이며 사신 그림은 벽지 뒤로 사라졌다.
성탄절이면 항상 가족과 함께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동생과 마당에 키보다 큰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집에 오는 언덕길에 썰매를 타며 빙판길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저녁이 되면 외식을 하고 아빠가 선물을 사주기도 했는데 하루는 온 가족에게 코트를 사준 적이 있다. 그 뒤로 겨울이면 베이지 색의 롱코트를 다 함께 입고 외출을 하기도 했다. 성탄절이 지나면 엄마의 생일이 가까워진다. 동생과 함께 엄마의 생일상을 차리자며 아빠에게 연락해 생일상을 만드는 시간에 맞춰 들어오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생일상이 요플레 부은 과일과 과자 조촐한 음식뿐이었다. 미역국을 끓여 드리고 싶었는데 실력이 되지 않아 엄마가 좋아하던 아구찜 집에서 미역국만 따로 팔아달라고 했더니 거절당해 미역국도 없는 생일상이었다. 조촐하지만 감동했던 엄마는 다시 요리를 해 화려한 생일 상으로 생일을 함께 했다.
집에 대한 기억은 떠올리면 떠 올릴수록 더 많이 떠오른다. 집에서 팬티만 입고 누워서 액션 영화를 보던 아빠의 배 위에 귀를 대고 아빠 배에서 꾸륵 꾸륵 이상한 소리가 난다며 이야기하던 모습 엄마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하며 드라마를 보던 나날까지 언제나 행복할 수만은 없지만 작은 추억들이 마음의 겨울이 오면 따뜻한 난로가 되어 잠시 쉬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렇게 우리 집 이야기는 끝이 난다.
우리 집과의 이별
이사를 하며 늘어났던 빚을 모두 다 갚았다. 그날 맛있는 음식을 시켜먹으며 자축을 하며 좋아했다. 항상 마이너스였던 생활에서 플러스로 살아갈 수 있었던 순간이다. 하지만 말처럼 정말 순간이었다. 동생이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리며 합의금을 줘야 되는 상황이 오고 엎친데 덮쳐 아빠는 직장을 잃고 오랜 시간 일을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나는 대학교를 가겠다며 집에 큰 부담을 주었다. 희망을 품은 이에게 희망을 빼앗는 것만큼 잔혹한 일이 있을까. 강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 슬레이트 지붕은 바람을 이기지 못해 날아갔다. 햇빛을 보지 못한 마당의 꽃은 시들고 남은 우리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