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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Jul 02. 2024

손톱이 자라는 시간

20240702

개순돌이는 우리 집 누렁이 진돗개다. 이름만 보면 수컷인 줄 알겠지만 암컷이다. 순동이로 이름 짓고 동물병원에 다녀오는 사이 순돌이가 더 좋다며 아버지는 이름을 바꿔놨고 순동이는 순돌이가 되었다. 우리 개는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고 그다음이 언니다(일단 그렇게 믿고 있다). 


하루는 개순돌이의 며느리발톱이 뒤집혀 있었다. 아마도 쥐를 쫓다가 어딘가에 부딪히고 정신없이 코를 들이밀고 쫓아가다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아프다고 누워서 아픈 발을 들고 힝구힝구 하는 개님에게 정성스레 후시딘을 발라드리고 핥지 말라고 붕대도 감아드렸다.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입술이 부들부들하고 낮게 소리 내며 으릉으릉 하지만 언니니까 참아준다. 


아이고 아플 텐데 애가 쓰여 약을 먹어야겠다 생각에 닿았다. 개순돌이는 붕대를 감아줬더니 한껏 아프고 고단한 나에 심취해 원래도 누워있던 아랫목에 더 처량하게 누워있었다. 소염제를 1/4로 조각내 들고 와 

"슌돌~ 약 먹자"

 하는데 누워서 또 으릉으릉 한다. 싫지만 참아주는 걸 알면서도 언니는 시도했다. 사고가 나는 건 잠깐이다. 


원래 약을 먹일 때는 개가 앉은 상태에서 눈을 마주 보고 입안에 약을 털어 넣고 주둥이를 잡고 삼키기를 기다린다. 눈을 마주 보며 단호하게 바라보면 못 이기는 척 먹어준다. 근데 누워있는 개님에서 약을 먹인다? 안될 말이다. 근데 그걸 했다. 누워있는 개에게 시선 처리도 안되는데 입을 벌려 약을 넣고 주둥이를 잡았으니 큰일이 일어나고도 남는다. 개순돌이는 싫다며 으릉으릉 약을 세 번 뱉어냈다. 언니에게 최대한 싫다고 거절을 표하고 경고도 했다.  


"아이고 먹어야 얼릉 낫지. 먹자 먹자"

오른손이 씹혔다. 해놓고 지도 놀랬다. 엄지와 네 번째 손가락에서 피가 솟구쳤다. 나도 놀라고 지도 놀라고. 

아빠가 이놈개새끼 하며 야단을 치니 사고 쳐놓고 내 뒤로 숨었다. 언니는 언제나 지켜주는 사람이니까. 근데 너 언니 물었다??? 이놈시키. 


병원 가서 드레싱을 받았다.  파상풍 주사도 맞고. 오른손은 손톱 아래가 살짝 빵구가 난 것 같더니 아물어갔고 네 번째 손가락이 말썽이었다. 손가락이 앞뒤로 물렸는데 손톱이 없었다면 아마도 큰일이 났을 것 같다. 손톱에 이빨 자국이 나고 뒤쪽 살이 벌어졌다. 이런 경우에는 감염 위험이 있어 바로 꼬매지 않고 상처를 계속 확인한다고 했다. 항생제 덕분인지 좋은 의도로 시작해 악의가 없었던 때문인지 살은 슬슬 붙기 시작했고 꼬매지않고 마무리가 되었다. 


매일 나가던 시간에 산책 가자 하며 데리러 들어온 녀석에서 손가락에 칭칭 감긴 붕대를 보여주며 '이거 니가 그랬는데? 그래서 언니 산책 못 가는데?' 하면 아이고 그래 알았다 미안하다 아이고 죄애송합니다 하는 얼굴로 개는 총총 사라졌다. 뭔가 개가 나를 업수이 여기는 것 같은데 분한데 이걸 누구한테 따지고 하소연을 하겠냐고. 2월의 일이었다.


그 사이 손톱은 큐티클 층에 가까운 부위가 일어나더니 어느 날 약간 들려서 간당거리다 떨어졌다. 아랫부분이 사라진 기이한 형태로 손톱은 계속 자랐다. 밑에서 새로 손톱이 올라오고 있었다. 밀고 올라오는 새 손톱은 옛날 손톱을 밀어냈다. 내 실수였는데 몸이 시간을 관통하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손톱은 아래쪽 끝부분부터 천천히 위로 밀고 올라오며 점점 원래 손톱과 비슷한 위치까지 자라고 있다. 무디고 고인 것 같은 몸이 기어이 이렇게 살아간다. 


개순돌이가 애기 때 놀자고 매달리다 발톱이 손등에 박혔다. 깨끔발을 하던 애기는 주르륵 미끄러지며 손등에 긴 상처를 남겼다. 자를 대고 밑줄을 그은 듯 선명하게 흉이 남았다. 만약에 타투를 한다면 저 흉이 밑줄인 듯 색을 올리고 그 위에 문장을 써볼까 생각했었다. 


 il faut aimer.


소설 <자기 앞의 생> 모모가 제 몸 같은 우산 아르튀르를 챙겨 안으며 했던 말, '사랑해야만 한다.' 동사가 궁금해 원서를 샀다. 동사를 확인하고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오늘 날씨 맑음 할 때 쓰는 동사. can도 아니고 must 도 아니고. 으레 그래야 하는 이치를 이야기할 때 쓰는 동사. 그 뒤로 출간된 개정판에서 문장은 '사랑해야 한다'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사랑해야만 한다'라고 남은 책을 소중히 갖고 있다. 


어느새 습관처럼 엄지 손가락으로 네 번째 손가락 뒷 면을 문질문질하면 이빨 자국에 남은 흉이 만져진다. 꼬매지 않고 살이 붙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하며 손등에 기록되지 않은 마음속 문장을 떠올려본다. 손톱은 시간을 밀고 올라와 거의 다 자랐다. 시작은 사고였는데 어쩐지  이 감촉과 내려다보는 각도가 퍽 마음에 든다. 손등에 새기지 못한 문장이 손가락에 새겨진 듯 만져본다. 


비가 오고 개순돌이는 방구 뀌면서 잔다. 뭘 먹은 거야 저시키 ㅋㅋㅋ 너의 날들이 무던하기를, 까마귀가 약 올려도 너무 분통 터져하지 않기를ㅋㅋㅋ  니가 남겨준 흉을 만지며 언니는 문득 사랑과 살아감을 생각한다. 위대한 이름들이 아무리 그래본들 시작은 이렇게 사소한 마음이다 그치?

어쨌든 고맙다 개슌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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