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처럼 Mar 13. 2020

적당히 불완전하고 적당히 완전한

직장생활 14년차의 끈질긴 출근 적응기

이직을 했습니다



몇 년 전 이직을 했다. 마흔 넘으면 이직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선배의 말에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꼼꼼히 이력서와 경력소개서를 작성해서 제출했지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경력자를, 그것도 아이가 있고 또 앞으로 아이가 더 생길 수도 있는 사람을 뽑는 다는 것이 회사 입장에서 얼마나 부담이 되는 일인지 잘 아니까. 되면 좋고 아님 말고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지원조차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떨어지고 마음 접는 편이 낫다는 결론.


운이 좋았던 것인지, 정말 경력자가 필요했던 것인지 아무튼 최종합격 연락을 받았다. 이십대 초반 첫 합격전화를 받았을 때만큼 기뻤다. 사람을 경제적인 가치로 따지는 것은 좀 그렇지만 아직까지 내가 어떤 조직에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받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입사 일정은 생각보다 빠듯했다.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을 정리하고, 인수인계하느라 정신없는 몇 주를 보냈다. 가능한 진행하고 있는 일들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게 이전 회사와 동료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니까. 덕분에 퇴사하는 마지막 날까지 MOU 협약식을 진행하고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리고 다음 주, 딱 하루를 쉬고 이직한 회사로 출근했다. 이직 타이밍에 한 달 정도 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있다던데, 아무래도 소처럼 일하는 복이 타고난 듯하다. 그럼에도 묘하게 웃음이 났다. 늘 마음을 괴롭혔던 일들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귀 막고 입 막고 눈 감고 견뎌냈던 상사 X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서 그런 사람과 그런 일들이 없으리란 법은 없지만, 왠지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더 잘 견디고 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만 같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상사X의 끝인사가 생각났다. 


“정말 아쉽네, OO쌤이 일을 잘해서 올해는 내가 두 손 놓고 있어도 될 줄 알았는데. 아무튼 잘 살어.”


너도 잘사세요. 안녕.





생각지 못한 이직의 고충



낯선 건물 안, 자리를 안내받고 다소곳하게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를 둘러보았다. 좁고 낡은 책상이 어색했다. 파티션은 너무 낮아서 고개만 돌려도 옆 사람의 얼굴이 상세히 보였다. 몇 주 지내다보면 적응이 되겠지. 미소를 잃지 말자.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몇 주간은 무조건 웃자.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이런 낯설고 성긴 마음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사라진다는 것을 안다. 이 어색함을 즐기자. 


팀원들의 환영인사에 힘입어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한지 3시간 만에 당혹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가 ‘맛있게 드세요.’라고 외친 뒤 뿔뿔이 흩어진 것. 점심은 당연히 팀원들과 먹게 될 줄 알았는데. 출근 첫 날 혼자 남겨졌다. 다들 약속이 있는 걸까? 결국 안면도 없는 다른 팀 사람들과 첫 밥을 먹게 되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상황은 반복되었다. 업무상으로 효율적인 면이 많고, 담당자에게 주어지는 권한도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이전 회사에 비해 일하는 만족도는 높았다. 그런데, 이 밥 문제 때문에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보통 팀 단위로 식사를 하고 특별한 약속이 있을 때 친한 사람들과 점심시간을 보냈는데, 이곳의 문화는 달랐다. 꾸준히 지켜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입사 동기들과 점심을 먹고 있었다. 물론 나에게도 입사동기가 있다. 딱 한명이지만. 마음도 잘 맞고 인간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남자다. 아무리 친한 동기라 하더라도 매일 점심을 남자 동료와 단둘이 먹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지 않은가.  


시계가 12시를 향하면 모든 직원이 약속이나 한 듯 사라졌다. 고마운 분들, 이를테면 나보다 몇 개월 먼저 입사한 사람들이 초대의 카톡을 보내줄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초중고 시절 새 학년이 시작되면 발 빠르게 점심 먹을 친구를 정했다. 보통 앞뒤 자리에 앉은 친구가 그 대상이 되었고, 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더 친한 친구가 생기면 멤버가 바뀌기도 했지만. 어찌됐건 점심 먹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여학생 세계에서 왕따를 의미했다. 회사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서 혼자 밥 먹는 경우는 일이 정말 많아서 시간이 부족하거나, 어쩌다 한번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 뿐 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밥 먹는 문제 때문에 고민해 본적이 없었다. 그럭저럭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했고 사교적이지는 않아도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몇 주를 편의점 테이블 앞에 서서 라면을 먹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팀원들과 일하는 데 문제도 없고 잘 지내고 있다. 다만 밥을 같이 안 먹을 뿐.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다짐했다. 먹자고 하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먹자고 하지 뭐. 차곡차곡 약속을 잡아 나갔다. 대부분의 약속이 분위기도 좋고, 대화도 잘 통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1회로 끝났다. 빨리 다음 약속을 잡아도 다음달, 모두 자신이 소속된 점심그룹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구조. 내가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일부러 왕따를 시키려는 의도도 없었고, 설립초기부터 이런 분위기였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차선으로 이왕 이렇게 된 거 점심시간을 온전히 나만의 자유 시간으로 사용해보기로 했다. 상사들과의 점심식사가 치가 떨리도록 싫은 사람도 많지 않은가. 아직 그런 사람이 없어 다행이지만, 오히려 회사생활의 큰 장점이 될 수 도 있겠다 싶었다. 또 회사가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해서 갈 곳은 넘쳤다. 서점, 백화점, 도서관, 공원 등 매일 도시 속 여행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바쁘게 누볐다. 그런데 이것도 몇 달 하다 보니 지치고, 갈 곳도 뻔하고,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다. 


혼자 놀았으니 혼자 밥 먹는 것도 할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과감하게 도시락을 싸왔다. 빈 회의실에 들어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눈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고정하고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어도 시간이 남아 여유롭고, 한 시간 동안 꽤 많은 분량의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 회의실에 들어왔다. 


“어, 여기 계신 줄 모르고 미안해요!”

라고 말하며 황급히 나가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혼자 밥 먹는 것이 죄도 아니고, 내가 선택한 일인데 이 비참한 기분은 뭐지. 이전 직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이 보고 싶다. 함께 수다 떨며 먹었던 떡볶이, 추운 날 손 비비며 줄서서 먹었던 콩나물국밥, 일에 치여 시간이 부족할 때 시켰던 치킨과 피자. 음식도 그립지만 사람이 그리웠다. 이직하면 어떤 문제라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항목에서 세게 얻어맞았다. ‘점심 드셨어요?’라는 질문에 이런저런 변명을 둘러대는 것도 이제는 괴롭다. 


밥만 혼자 먹었을 뿐인데, 6개 월 만에 나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과 잘 지내지만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딱히 친한 사람도 없고, 싫은 사람도 없는 상태. 살살 선량하게 웃으며 할 일만 하고 퇴근하는 일상. 일본 소설에서 읽었던 직장인의 삶과 닮아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외로워서 다시 이직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구겨졌다. 






저랑 같이 밥 먹을래요?



어느 날 저녁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통곡을 하고 말았다.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시작’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남편은 단 한마디를 물었을 뿐인데. 


“요즘 누구랑 밥 먹어?”


그 말이 그렇게 가슴이 아프더라.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고 애쓰고 태연한 척 했지만 조직에서 혼자가 되어 간다는 기분이 나를 찌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내버려두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가 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미친 척 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로 했다. 솔직하게 괴로운 마음을 털어 놓고 도움을 구해보자. 약속 있는 척, 바쁜 척, 혼자여도 괜찮은 척, 자발적 따점(따로 점심)인 척 나를 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 함께 밥 먹고 싶다고. 


평상시에 몇 번 식사를 같이했던 동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십 번 고쳐 쓴 내용을 발송한 뒤 첫 데이트 상대에게 문자를 보냈을 때처럼 긴장했다. 그리고 12월의 추운 오후, 김치찜 가게에 마주 앉았다. 솔직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구차한 설명 따위 넣어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던 것 같다. 같이 밥 먹고 싶다고. 선생님과 같이 밥 먹는 사람들 틈에 나도 끼고 싶다고. 외롭다고(하아, 이런 말까지 하다니!). 듣는 상대방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낯이 뜨거워진다. 


그 날 이후로 1년이 지났다. 지금은?, 나에게도 고정 점심밥 멤버가 생겼다(정말 감사하다!). 그 멤버들과 힘들 때 터놓고 이야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로 성장 중이다. 무엇보다 그 날의 못난 나를 기꺼이 받아주고 아픈 감정에 공감해준 동료와 둘도 없는 사내친구로 지내고 있다.


새 직장에서는 완벽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일에서는 전문적이고 인간관계도 깔끔하게 잘하는, 쿨내 나는 사람이고 싶었다. 부족하고 외로운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 좀 껴줘.’라는 그 흔한 말을 내뱉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애당초 완벽하지도 않을뿐더러 사람들과 지지고 볶고 지내는 것이 체질에 맞는 사람이다.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그 힘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이유를 하나 더 얻는 사람. 점심시간에라도 좀 떠들어야 일할 맛이 나는 직장인.


생각해보면, 친구가 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발견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기꺼이 그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런 나라도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친구가 된다.  


얼마 전 직장 내 독서모임에서 그 둘도 없는 사내친구와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은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적당히 불완전하고, 적당히 완전하다.” 


이직이 적응실패로 끝날 수 있었던 아찔했던 순간, 같은 마음을 가진 친구를 만나 정말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회사원을 꿈꾸는 어린이는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