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왜? 호모사피엔스만이 인류의 유일 종인가?

by 김성원

국민학교 저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이모, 삼촌, 고모의 결혼식장을 따라다녔던 나에게 그 시절이 돌이켜 보면 정말 행복했던 것 같다. 명절 때 먹는 음식과는 또 다른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순간이다. 이 보다 더 좋았던 것은 일부 친척 어르신분들이 500원짜리 지폐로 용돈을 주셨다. 어린 소년이었던 나에게 맛있는 음식에 용돈까지 이모, 삼촌, 고모가 자주 결혼을 하기를 바랐던 시절이었다.

결혼한 이모, 삼촌, 고모가 아이를 낳으면 돌잔치에 갔던 기억들이 있다.

20살이 넘어서부터 부모님은 장례식장 조문을 다니는 횟수가 많아지셨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도 친구, 후배들의 결혼식, 돌잔치를 지나며, 요즘은 친구, 선배 자녀분들의 결혼식과 선배 집안 어르신들의 장례식장을 방문하게 된다. 어떤 주는 결혼식과 장례식이 동시에 방문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태어나고, 함께하고, 죽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순리이다.

이런 삶의 한가운데 서 있다 보면 "시작과 끝은 어떤 의미일까?" "시작과 끝이 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시작이고, 무엇이 끝일까?

어린 시절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 돌잔치를 갔던 소년이 청년이 되어 다시 결혼식장, 돌잔치를 다녔고, 낯설었던 장례식장이 중장년이 되어 이젠 익숙해지는 장소로 바뀌는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 반복의 시간 안에 갇혀있는 느낌이었다.


무심히 사용하던 '시작'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중년에게 다가왔다.

'시작'이 대체 뭘까?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지? 지구는 어떻게? 그리고 생명체는? 사람은?


이럴 때 내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말이 갖고 있는 의미를 조사해 보는 것이다.


시작(始作)의 의미

- 사전적 의미 : 어떤 일이나 행동(行動)의 처음 단계(段階)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 철학적 의미 : '시작’은 존재의 전환점입니다. 무에서 유로, 가능에서 현실로 이동하는 존재론적 사건

하이데거는 ‘시작(Beginn)’을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새로운 열림(Eröffnung)으로 규정했다.

베르그송은 '시작’을 연속된 흐름 속에서 의식이 구분한 지점으로 규정했다


나는 지금까지 시작의 의미를 '행동'에 중심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작의 의미를 찾다 보니, 행동 관점보다 의식적, 존재론적 관점에서 해석이 더 타당한 듯하다. 행동을 위한 나의 결심은 의식적인 것이고, 내가 어떠한 행동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새롭거나, 변화되거나 하는 결과는 존재론적인 것이었다.


시작의 의미는 연속된 점에서 전환점이 되는 어느 한 점이다.

인간사에서 태어나고,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이 전환점이며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시작은 항상 아름답고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던 것 같다. '시작'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물리적인 요소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상의 단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우주와 지구는 만들어졌다. 생명체는 출현했다. 이렇게 상태로서 말하지 않고, 우리가 <시작되었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며 연속선상에서 전환을 말하고 있다. 시작이라는 말은 연속성을 전제로 마디, 단락 등의 특징을 갖고 있는 듯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왜 보이지 않는 것에 개념과 정의를 부여한 것일까?

다른 동물들도 태어나고, 함께하고, 죽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작'이나 '끝'이라는 개념이 없다. 사자는 사냥을 하지만 '사냥의 시작'을 의식하지 않는다. 새는 둥지를 틀지만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연속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환이 되는 지점을 잘라내어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시작이라는 개념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인식하고, 현재를 의미 있는 전환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곧 시간을 연속적으로 사고하고, 목적과 계획을 세우며, 무엇보다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의 유일한 인류종으로 남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시작'을 상상하고 믿는 능력, 그리고 그 시작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해 내는 힘 말이다.


오늘도 사촌 동생 아들의 결혼식장에 가면서, 나는 또 하나의 '시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인간만의 특별한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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