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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외자 Mar 02. 2019

화려한 액션에 취해 길 잃은 스토리, 영화 <악녀>

넘치는 액션과 더 넘치는 스토리

정병길 감독/김옥빈, 신하균, 김서형/123분/청소년관람불가/2017년


정병길 감독의 <악녀>(2017)는 제70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되면서 국내 개봉 전 많은 관심을 끌었던 영화다. 액션 영화가 넘쳐나는 국내 영화시장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을 액션의 중심에 두었다는 차별성에서 <니키타> <롱 키스 굿나잇> <킬 빌>과 함께 언급되면서 관객들의 기대치는 한껏 높아졌다.

하지만 개봉 후 손익분기점인 190만 명을 넘기지 못하고(누적 1,208,034명,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2017년 9월 28일 기준),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국내 최초로 여성을 내세우며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악녀>는 왜 관객들에게 외면당했을까?


<악녀>의 첫 오프닝은 쓸쓸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메기의 추억’ 휘파람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시퀀스는 슈팅 게임처럼 보이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1인칭 시점으로, 적을 쓸어버리는 거친 숨소리의 주인공이 숙희(김옥빈)임을 알기까지 영화 시작 후 약 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처음부터 흩뿌려지는 피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 칼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꽹과리 소리가 뒤섞이며 관객의 몰입을 강요한다. 하지만 정확히는 4분간 계속되는 1인칭 시점의 화면은 멀미를 일으킨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무작정 시작되는 칼부림과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은 카메라는 처음의 신선함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어지러움에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다. 숙희의 얼굴이 드러나고도 계속되는 액션은 죽음을 목전까지 두었지만 결국에는 살아남은 숙희의 강인함을 보여주기 위함이겠지만 좀 더 간결했더라면 관객들에게 더 큰 임팩트를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직 소탕 후 숙희는 국정원에 붙잡히고 그곳에서 권 숙부장(김서형)에 의해 국정원을 위한 살인 병기로 교육을 받게 된다. 여러 가지 교육과정을 통해 숙희의 현재와 과거가 번갈아 보이는데 이러한 편집패턴은 영화 후반부까지 같아서 관객들에게 지루함을 선사하고 있다.

마취 가스로 잠이든 숙희와 과거 중상(신하균)과의 숨 오래 참기 훈련의 교차편집은 숙희가 숨을 참아, 마취되지 않았음을 알게 하고, 김 선(조은지)과의 총 조립 교육 또한 과거 숙희의 어린 모습으로 숙희가 김 선을 이기게 될 것이라는 예측 가능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런 서사의 흐름이 관객들에게 숙희가 얼마나 숙달된 살인 병기인지를 알게 하는 반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삶을 포기하고자 했던 순간 찾아온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 다시 살기로 작심한 숙희는 시간이 흐른 후 국정원 교육시설을 벗어나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그 옆집으로 자신을 감시하던 국정원 직원 현수(성준) 또한 이사를 온다. 여기서부터 <악녀>는 이야기의 길을 놓친 듯 보인다. 숙희와 현수의 감정교류를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나중에 현수가 국정원 직원임을 알게 되었을 때 숙희가 느끼는 배신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감독의 장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희와 현수의 감정놀음이 너무 길다. 

숙희가 교육시설로 끌려왔을 때부터 현수는 숙희를 지켜봐 왔고, 배 속에 있던 숙희의 딸 은혜(김연우)가 걷고 말을 할 정도의 시간만큼 숙희에 대한 현수의 마음 또한 커졌음을 관객들은 충분히 알고 있다. 숙희 또한 현수를 향한 마음을 확인시키기 위함이라고 해도 숙희가 현수에게 전화를 걸어 결혼허락을 받았다고 하는 장면은 앞으로 나도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기쁨인 것인지, 현수에 대한 진짜 사랑인 것인지 헷갈리는 걸 보면 굳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숙희와 현수의 결혼식 날 숙희는 임무를 하달받게 되고 죽여야 하는 상대가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자신을 위해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딸 은혜의 친아버지인 중상임을 알게 된다. 숙희의 가장 수동적인 모습이 여기에서 드러나는데 숙희는 자신의 결혼을 기뻐하지도 못할뿐더러 중상을 죽이지도 못한다. 무기력하게 중간에 끼어서 누군가가 ‘이 사람이 적이다’ ‘저 사람이 배신자다’라고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는 듯한 답답함을 보여준다. 중상으로 인해 현수가 국정원 직원임을 알게 되자 숙희는 중상에게 김 선의 위치를 노출하면서 동료인 김 선을 위험에 빠뜨리고 국정원이 자신을 이용하고 배신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현수와 함께 있는 딸을 데리러 간다. 집에 다다랐을 때 폭발음과 함께 딸 은혜를 보호하듯 안고 떨어져 죽어버린 현수를 보고 숙희는 큰 충격에 빠져 권 부장을 찾아가지만,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소리치는 것뿐이다. 권 부장에게서 정작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중상이고 현수가 자신을 감시목적이 아닌 진실로 사랑했음을 듣게 된 숙희는 복수를 위해 중상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여기서 권 부장의 캐릭터를 한번 짚어봐야 한다. 적진을 혼자 몸으로 들어가 소탕한 숙희를 발탁해서 국정원의 비밀병기로 키우는 인물인데 넘쳐나는 <악녀>의 스토리에 반해 그녀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숙희를 사랑하는 현수를 대하는 표정이나 말투는 질투인지, 안쓰러움인지 아니면 못마땅함인지 알 길이 없다. 숙희와 위장 결혼이 아닌 ‘진짜 결혼’을 하겠다는 현수에게 “너는 나처럼 되지 않길 바랐는데”라는 대사만으로는 이 여자의 속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중상이 자신의 딸과 현수를 해쳤다는 것을 알고 오열하는 숙희를 달래며 같이 눈물을 흘리는 권 부장의 표정은 숙희에 대한 애잔함인지 숙희를 부추겨 자신을 대신해 중상을 처리하고자 함인지도 뚜렷하지 않다. 권 부장의 마음이 후자라면 이 영화의 진정한 악녀는 권 숙, 그녀일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중상을 마주하게 된 숙희는 여느 멜로영화에서나 볼 듯한 질문을 세상 슬픈 얼굴로 한다. 정말로 나를 사랑했던 적은 있느냐고. 갑작스러운 신파에 ‘중상이 사랑했었다 대답하면 복수 안 하는 거야?’라는 튀어나오는 의문을 누르며 영화는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싸움 도중 경찰이 왔다는 부하의 다급함에 갑작스레 도망치는 중상은 최후의 결투를 보여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설정이라고 해도 지금껏 거리낌 없이 살인 하던 그들이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것은 액션만을 위한 스토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물론 숙희와 중상의 버스 결투 신은 카메라 움직임과 배우들의 현란한 액션으로 앞선 스토리의 억지스러운 설정을 잊기에 충분하다. 버스가 뒤집힌 이후 중상의 시선대로 아래에서 위를 훑는 카메라는 숙희와 중상이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상을 처리하고 버스 밖으로 나온 숙희 그리고 숙희 주위로 몰려드는 경찰들. 이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와 수미쌍관을 이루는데 오프닝에서 보여준 옅은 미소와는 달리 실성한 듯 웃는 숙희의 모습은 그녀가 악녀로 다시 태어났다기보다는 모든 것을 잃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섬뜩하게 비치는 광기에 가깝다.  

 


영화 <악녀>는 여성을 내세운 액션 영화 그리고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오토바이 추격전과 협소한 버스에서의 화려한 액션은 이 영화를 볼만한 충분한 가치를 선사한다. 하지만 모든 상황 하나하나에 설명을 위한 사족을 붙인 감독의 욕심은 진부하고 넘쳐나는 스토리로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한다. 스토리를 덜어내서 조금은 가벼워진 <악녀>로 관객들을 만났다면 지금의 스코어보단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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