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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훈 May 17. 2020

행복추구권은 급진적이며 혁명적이다!

행복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것

2년 전부터 ‘행복’을 얘기하기 시작하니,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한가하게 행복타령인가?’ 냉소하는 시각을 느꼈다. 하기야 나 또한 처음엔 그랬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이해한다. 행복은 어느 정도 살 만한 소부르조아들의 개인적 희망이나, 국가의 공적책임을 회피하게 해주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 줄 위험이 있는 긍정심리학의 주요한 아이템 정도로 이해해 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을 공부하게 되면서 이러한 생각인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행복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이며 혁명적인 개념임을 깨닫게 되었다.


행복추구권은 맹자의 역성혁명론과 일궤 


행복추구권을 최초로 명시한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문은, '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와 관련한 존 로크의 사상을 토머스 제퍼슨이 차용한 것이라 했다. 미 독립선언서는 프랑스혁명에도 영향을 끼친, 서양 근대 정치 사상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문서다.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생명과 자유 보장을 전제로 하며, 국가(정부)의 기능과 책임을 ‘개인의 행복 추구를 보장’하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한 천부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는, ‘모든 국민’의 행복, 즉 ‘공공의 행복’을 최대한 보장해 줄 책임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로크는 통치자가 공공의 선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시민들은 마땅히 그를 축출할 수 있다는 혁명론을 설파했다. 인간의 행복이 공공의 선이기에 이를 보장해 주지 않거나 실패한 정부는 전복할 수 있다는 혁명적 이론을 주창한 것이다. 이는 군주가 덕을 상실하여 민심이 떠나게 되면 그 군주를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과 유사하며, 정도전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추구권은 매우 급진적이며 혁명적이다.


이보다 50년이나 앞선 1729년, 남아시아의 작은 히말라야왕국 부탄 법전에 “정부가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런 정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정부가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할 때 그런 정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말보다 더 급진적 표현이 있을까? 


대한민국 <헌법 10조>에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돼 있다. 이를 거꾸로 해석해 보면 “국가는 국민의 천부인권인 행복추구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만일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할 시는, 국가와 정부로서 자격이 없으므로 탄핵되거나 전복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이런 엄중한 조항임에도 역대 정권과 정치권은 이 헌법 10조를 그저 상징적 조항으로 치부해 왔다. 국민들에게 의무를 요구하고,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을 시 처벌해 오면서도, 정작 국가와 정부는 의무를 다해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권력을 가진 이들은 명심할 일이다.


국민총행복(GNH)에 감추어진 비밀


더 놀라운 것은, 부탄의 국민총행복(GNH) 정책이다. 여기서 ‘총’이란 다차원성과 공공성을 의미한다. 행복하려면 건강, 교육, 소득, 환경, 문화, 공동체, 민주주의 등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happiness for all)’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에 따르면, 행복추구권을 명시한 미독립선언에 30년 앞서 ‘공공행복’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1749년 이탈리아 철학자 무라토리의 『공공행복에 관하여』에서 최초로 등장했다는 것. 즉, 공공행복이란 주제는 프랑스혁명 이전인 18세기 중반 유럽에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공’이란 수식어는 ‘행복’만큼이나 중요하다. 공공행복의 전통에서 보면 행복은 사회 속의 삶 밖에 있을 수 없다. 혼자 부유하거나 다른 이와 척을 지며 부유하게 살 수는 있지만, 행복하려면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있어야 한다. 폴리스 밖에는 행복이 없다. 따라서 행복은 그 본성상 시민적이며 ‘공공행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부탄은 ‘모두의 행복’을 얘기하면서도 국민 행복의 총량을 제고하기 위해 ‘아직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자칫 모두의 행복, 공공의 행복을 강조하다 보편과 공정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의식한 탓일까. 월 500~1천만원의 소득을 올리는 이들과 월 100만원도 소득을 올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50만원씩 지원한다 가정해보자. 진정 이것이 공정한 정책일까? 누구에게 지원했을 때 행복총량이 높아질지 생각해 보면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가장 마지막에 놓여 있는 사람이 최우선이다(The last, is the first)”라는 마하트마 간디의 가르침과도 흡사하며,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과도 일치한다. 롤스는 가장 약자에게 가장 많은 분배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런 점에서, 정부는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국민들 중 어느 누가 가장 고통 받고 있는지(누가 가장 행복하지 않은 지) 잘 살펴서, 그들의 행복을 제고하기 위한 실질적 지원방안을 우선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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