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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목수 Sep 17. 2019

인도네시아어 #part 2

인도네시아의 모호한 대화 법


 

 인니어는 표현의 한계와 언어의 부정확성 때문에 각종 법률 계약서가 영어와 함께 2중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 인니어로 아주 정확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는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인도네시아에서 3년 넘게 지켜봐 온 바에 의하면 심지어 현지인들 간의 의사소통에서도 오해가 매우, 매우 자주 생긴다.


 집을 짓는데 폭 90cm짜리 현관 문짝 다섯 개와, 폭 80cm짜리 방 문 열다섯 개를 주문한 사건이 있다. 인도네시아 건축주가 인도네시아 문틀 목수에게 직접 주문하였다. 한 달 뒤 폭이 90cm인 같은 크기의 문짝 스무 개가 배달되었다. 현관 문 치수를 바깥쪽 치수로 오해하고(현관 문이 집의 '바깥쪽'이긴 하지) 방 문의 치수를 안쪽 치수로 오해 해주신 것이다.(방 문은 집 안쪽에 있는 문이니까 '안쪽'이긴 하지) 이렇게 수학적으로 복잡한(?) 오해가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나는 죽었다 깨도 이해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흔한 오해인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서 깊은 장탄식이 단전에서부터 아득하게 터져 나왔다. 


 우리 목공 교실에서 교보재로 쓰려고 두께 3센티짜리 마호가니 목재 3 큐빅(m3)을 전화로 주문한 적이 있다. 목재상과 일단 통화를 시작하면 서로 이름이 뭔지, 어디서 소속인지, 언제 만난 적이 있는지,  다른 수종의 목재를 섞어서 보내도 괜찮은지, 4센티짜리 두께는 필요 없는지, 이러한 본류에 벗어난 대화를 길게 이어간다. 한국에서는 1~2분 만에 정리될 내용이 15분쯤 걸리고, 이런 긴~ 통화를 두세 번쯤 하고 나서야 주문이 완료된다. 물론 내가 직접 통화한 것이 아니라, 나와 2년 넘게 함께 일한 현지 목공 강사 리코가 통화했다.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간결하고 정돈된 전화 통화가 있지만, 그보다는 길고 복잡한 전화통화가 뭐랄까...  표준에 더 가까운 전화 통화 방법인 것 같다. 아 참, 주문한 목재는 결국 4Cm짜리가 섞여서 배송이 와서 원래 목적대로 나무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문짝도 새로 만들어 주지 않아서 결국 실내용 문짝 열다섯 개를 전부 90cm 폭으로 설계 변경해서 집을 완성했단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뭔가 잘 못 되어도 반품이나 교환이 안 된다. 그냥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빈 방문을 닫은 채로~


 인도네시아에서의 의사소통은 그 특유의 부정확함과 모호함 때문에 지금도 나를 속 터지게 한다. 언어적 불확실성도 문제지만 식민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이들의 의뭉스러운 문화도 복장 터지게 하는 원인 중 하나다. 인도네시아에서 길을 물어보면 틀린 길이라도 꼭 가르쳐준다. 잘 못 가르쳐 준 길을 따라서 한참 헤매다 보면 성격은 포악해지고 입은 거칠어진다. 


 한 번은 카페에서 디카페인 커피가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점원은 '덜 된다'라고 답했다. 덜 된다고? 디카페인이 덜 되면 카페인이 약하게는 커피를 만들어 준다는 것인지 다시 한번 물어봤더니 또 모호하게 대답했다. '아직 안돼요.' 오케이, 만약 '아직' 안 되는 거면, '언제' 되느냐고 다시 또 물어보면, '불가능해요.'라고 대답한다. 그제야 나는 아, 그런 메뉴가 없구나 하고 알 수 있다. 주문을 시작한 지 이미 한참이 지나 탈수 증세가 서서히 올라온다. 한국 사람 중에는 인도네시아의 고급 제과점에서 음료 한 잔 주문하는데 30분이 넘게 걸려서 속이 정말로 터져버린 사람도 있다.


 학생들에게 간단한 수학 문제를 설명해주고, 숫자만 바꿔서 대입해서 풀 수 있냐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모두 풀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열에 아홉이 못 푼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몰라도 모른다고 하지 않는다.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을 굉장히 큰 결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No를 No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훨씬 큰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해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도네시아에서 불확실한 의사소통 때문에 큰 사고가 생긴 에피소드를 외국계 기업에 가면 전설처럼 무수히 들을 수 있다. 자카르타에서 우리 NGO 프로젝트를 후원해주시는 한국 발전기 회사 사장님이 있다. 그분은 본인이 보기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 기술적 결함을 현지 기술자에게 콕 찍어서 괜찮냐고 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하더란다. 그래도 뭔가 찝찝해서 두 번 세 번 물어봤는데, 문제가 없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퇴근을 했는데, 주말에 발전기에 큰 문제가 터져서 그 지역 일대에 전기가 완전히 나가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단다. 인도네시아식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낸 흔한(?) 사고다.






 인도네시아어는 표기문자로 라틴문자를 채택하고 있는데, 읽는 방법이 영어와는 조금 다르다. 'A B C D'를 '에이 비 씨 디'가 아니라 '아 베 체 데'라고 네덜란드식으로 읽는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를 약 300년 동안 받았다) 문장의 기본형은 주어+동사+서술어로 순으로 영어와 어순이 엇비슷하다. 특이점은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붙는다는 것. '향기로운 꽃'이라 하지 않고 '꽃 향기로운'이라 한다. 좀 더 예를 들자면 '오빠 잘생긴', '식탁 넓은', '의자 편안한' 이런 식이다.

 

 인니어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동사의 시제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럼 과거형을 어떻게 표현할까? '밥을 먹다'는 문장에 '어제'라는 단어가 들어 있으면 '먹었다'가 된다. '전시회를 가다'는 문장에 '다음 주'라는 단어가 같이 있으면 '갈 것이다'가 된다. 단순해서 좋다. 미래 시제는 미래의 특정 시점을 얘기하면 되지만, 과거형에는 Kemarin을 많이 붙여서 쓴다. 어제, 그저께, 예전에 에 해당하는 불특정 과거는 모두 Kemarin으로 커버가 된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인니어에서 상황에 따른 동사의 형태 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어나 영어에 비하면 매우 얌전한 편이다.


 이렇게 중의적인 단어가 넘쳐나고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인니어에서도 한국어나 영어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정교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우리'라는 표현이다. 인니어에서는 청자가 포함된 '우리'(Kita)와 청자를 제외한 '우리'(Kami)를 구분해서 쓴다. 예를 들어 대학교 캠퍼스에서 한 무리의 대학생이 대화를 하고 있는데, 그중 한쪽에서 우리 교수님이라는 표현을 'professor kami'라고 했다면, 대화를 듣는 상대는 전공이 다른 학생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professor kita'라고 표현했다면 대화를 하는 이들은 모두 같은 교수님에게 배우는 같은 학과 동기일 것이다. 한국은 '우리'라는 단어를 너무 남발하기 때문에 다들 문맥을 통해서 알아듣고, 영어에서는 우리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쓰지 않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없다. 한국에서 '우리 집'이라고 말하면 '너네 집'인지 척하고 알아듣는다. 미국에서는 'My home'이라고 하지 'Our home'이라고 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어에서는 형제끼리 한 편에 서서 'Rumah Kami'(우리 형제의 집)이라고 상대에게 말할 수 있다. 하! 이런 절묘한 단어가 있었네!

  

 인도네시아어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불평만 잔뜩 늘어놓은 것 같아서 왠지 미안하다. 인도네시아어는 나름의 아름다움과 독특한 장점이 있는 다국적 언어다. 문법이 비교적 간단하고, 라틴문자를 사용하는 점, 그리고 특유의 간략한 문장 구조 덕분에 다른 외국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배우기도 쉬운 듯하다. 인도네시아어에 관심 있는 사람은 맘먹고 덤벼 보시라. 아마 6개월이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충분히 할 만큼 익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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