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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아 Mar 04. 2019

드디어, 뇌의 과부하.

사람은 저마다 가지고 태어나는 본인의 성향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생각이 많은 타입이었다. 실제로 ‘잡념이 많은 성향’ 이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는 연구 결과는 익히 들어온 바 있다. 20대 초중반에는 단순 무식한 사람이 되어보려 노력해본 적도 있다. 내가 보기에 가장 단순하고, 몸이 먼저 움직이는, 해맑은 타입의 사람을 무작정 따라 해 보는 것이었다. 가까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연예인이 될 수도 있다.


결과는 ‘엉망진창의 흑역사 대잔치’.


답답한 마음에 사주도 찾아보곤 했다. 내 사주는 하나 빼고는 전부 ‘토(土)’로 이루어져 있는데 ‘토(土)’가 많은 사람은 융통성이 없고 생각만 많으니 답답하고 실행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해석이 있었다. 그 해석 하나에 마음을 다 바치고 ‘맞아. 역시 난 틀렸어’ 라며 보낸 세월도 있다. 그렇게 각고의 청춘 초년기를 보내고 20대의 끝자락 즈음 드는 생각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 생각의 횟수를 줄여보자’였다. 그런 마음가짐과 함께 요가나 필라테스 등의 간단한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몸을 가꾸는 데에 관심이 기울면서 균형이 몸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정신도 휴식기를 갖는 시간이 생긴 것 같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좀처럼 행동하지 못한다는 말도 된다. 한 자리에 앉아서 꾸준히 정적으로 이어나가는 작업은 줄곧 잘 해내지만, 계획을 세워서 곧장 실행에 옮기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운동이라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동작을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행동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 그런 점이 나를 많이 개선시켜주었다.



이후로 어릴 때처럼 울고 웃는 롤러코스터의 시련은 없었지만, 여전히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이 많으면 논리 정연하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어딘지 지적이고 차분해 보여서 좋은 것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다.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온갖 찬사만을 모아준 것 같아 고맙기는 하지만, 장본인에게는 여간 힘든 성향이 아니다. 과거의 실수를 좀처럼 잊지 못하거나 남들은 쉽게 말하고 잊어버린 이야기를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하는 점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허무하게 날려 보내기 딱 좋은 습관이기 때문이다.


잊지 못할 말을 남겨준 사람들 중에는 더러 정말 악의를 가지고 타격을 입힐 요량으로 말을 꺼낸 사람도 있고, 아무 뜻 없이 던진 이야기가 정곡을 찌른 경우도 있지만 이제 와서 뭐가 됐든 내가 그 이야기를 ‘기억한다’는 것은 매 한 가지인 것이다. 그런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과 나를 비교 분석해주는 것이거나 자신과 나를 묶어서 패배자로 만들며 동질감을 형성하려는 류의 농담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몹시 싫어서 몸에 옅은 진동이 느껴진다.


단체생활을 하거나 서너 명 이상씩 그룹을 형성해 몰려다니면 이런 일이 연례행사로 꼭 생긴다. 다른 사람들은 웃어넘기거나 똑 같이 한 마디 해주고 만다는데, 생각 많고 소심하며 앙심 잘 품는 나는 도통 살아남기가 힘들다. 그런 식으로 차례차례 지인 리스트에서 삭제된 사람들만 한 트럭이다. 남아있는 것보다 삭제된 것이 많다는 점도 문제라면 문제다. 생각이 많은 데다가 성격까지 괴팍해서 생긴 불상사인 것 같다. 지금은 단체생활에서 벗어나 독립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나인지라 이제 더 이상 말로 공격을 당할 일은 거의 없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의 씨앗이 날아오는 곳은 도처에 널려있다.


알고 싶지 않은 이, 혹은 안면도 없는 이의 소식을 제비처럼 물어다 주는 친구나 지인들, 가깝게는 스마트폰 속 포털 사이트 메인화면까지. 남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나라에 사는 건지 내가 유난인지는 몰라도 습관성 잡념증 환자인 나에게는 가끔씩 속세와 차단될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해외의 낯선 도시로 두 달을 훌쩍 떠난다는 것은 이런 나에게 최고의 차단이다. SNS 같은 것은 일찌감치 닫은 지 오래다.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없고, 내가 봐야 할 것도 없다.



두꺼비집 차단기 내리듯 한국의 전원을 모두 끄고 치앙마이로 떠나버렸고, 지금 이 곳의 나는 가벼운 옷차림만큼이나 뇌까지 가볍다. 이 곳의 햇살 아래뇌를 꺼내 탈탈 털면 마른 먼지가 하얀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결에 흩날리겠지. 한동안 쓰지 않아 가볍고 텅 빈 듯 말이다.



치앙마이에서처럼 서울에서도 텅 빈 뇌로 가볍게, 마치 새 것처럼 살아가자고, 그런 다짐은 일절 하지 않는다. 어릴 때라면 한 번쯤 다짐해볼지도 모르겠지만 불가능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지금, 그냥 인위적인 이 차단을 즐기련다. 아무것도 들은 것 없는 듯이, 기억하는 게 없는 듯이,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남에게 기대하지 않고, 빳빳한 새 옷처럼 살아갈 수 없는 나에게 건조대에서 막 거둬온 뽀송하지만 조금은 낡은 빨래 같은 치앙마이의 두 달을 선물한다. 탈탈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소리와 방을 가득 채우는 미끈한 섬유유연제 향기만이 내 뇌를 빙글빙글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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