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세상을 두고 ‘예민과 불편’의 세상이라고 한다. 타인의 작은 실수나 눈에 띄는 행동거지 하나하나 쉽사리 눈감아주기 힘든 세상인 것이다. 누구보다 나 역시 적극적으로 그렇다. 무례하거나, 더럽거나, 몰상식하거나, 주변에 민폐를 끼친다는 것의 기준이 몇 조 몇 항으로 새겨진 듯 규율처럼 빡빡하다. 애석하게도 집 밖을 나가면 하루에 한 번쯤은 나만의 법 조항에 위반되는 사람을 꼭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많은 이들과 부딪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사람들 속에 뒤섞여 골치 아픈 눈치 게임하는 것도 지친다.
가족들과 혹은 가까운 지인들과만 소통하면 아무 지장이 없다. 오히려 ‘넌 좀 둔감한 편이야.’라는 말까지 듣게 되는 것이다. 내 성격이 유별난 줄 알았더니 요즘 많은 이들이 나같이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동안 사회에 쌓이고 쌓인 것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대규모 정화작업’ 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세대와 세대가, 남자와 여자가, 기혼과 미혼이 열심히 대립하며 각자 불편하고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럴 만하다. 이 나라는 너무 작고, 너무 몰렸고, 너무 치열하다. 너도 나도 한껏 예민하고, 불편하고, 지치는 이유를 찾아보자면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까지 들먹이게 되니 논해봤자 또 한 번의 지치는 여정이다. 힘들다는 그 누구의 말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없다. 곪을 대로 곪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뾰루지처럼 모든 게 조심스러웠던 서울 살이를 잠시 접고, 여유의 도시 치앙마이로 온 것이다.
치앙마이에서 지내는 기분은 넓고 텅 빈 수영장에서 혼자 유유자적 물장구치는 기분과 같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 가도 마음만은 여유롭다. 이 곳의 사람들은 느리고, 무디고, 쿨하다. 쿨하다는 것이 냉랭하고 매정하다는 느낌이라고 생각했었다면, 치앙마이에 와서 이들에게 느낀 ‘쿨함’ 은 ‘그러려니’였다.
치앙마이 사람들은 실수를 하고도 잘 사과하지 않는다. 한국의 기준으로는 무례한 데다가 기분 상하기 십상이다. 음식점에서 세 가지 음식을 주문했는데, 한 가지가 5분 만에 나오고 두 번째 음식이 10분 후에, 마지막 음식이 40분 후에 나온 경우가 있었다. 이것저것 늘어놓고 신나게 즐기려고 했는데 졸지에 마지막 음식은 디저트로 먹게 생긴 것이다. 이런 일이 있어도 점원이 “Sorry.”라고 말하는 경우는 세 번 중 한 번이다. (물론 이런 일도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기는 하다. 다만, 한국보다 빈도가 잦긴 하다.)
유명 리조트의 셔틀버스를 3일 전 미리 예약해두고 시간에 딱 맞춰 타러 갔더니 내 자리가 없다. 버스의 좌석을 체크하는 직원이 자리가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기에, 그가 들고 있는 체크 리스트를 들여다봤다. 제일 첫 번째 칸에 내 이름이 버젓이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It’s me!” 내 이름을 가리키며 이게 나라고 외쳤더니 직원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You?” 네가 맞냐고 괜스레 되묻더니 쩔쩔매다가 자기가 실수했다며 다른 버스가 데리러 올 테니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같이 기다려주는 줄 알았더니 그 말만 남기고 냅다 꽉 찬 셔틀버스를 타고 떠나버렸다. 본인이 한 실수는 인정했지만 역시나 “Sorry.”라는 한 마디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를 태울 버스는 5분이 아니라 20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한국 같았으면 컴플레인을 넣거나 고래고래 싸울 사람이 열 명 중 네 명은 될 것이다. 하지만 치앙마이에서는 섣불리 그러기도 힘들다. 이 사람들은 사과를 안 하는 대신 화도 내지 않는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죄송합니다’와 ‘스미마셍’ (일본어로 ‘죄송합니다’) 이 수도 없이 들리지만, 태국에서는 ‘컵쿤카’ (태국어로 ‘감사합니다’) 가 수시로 들릴 뿐 아직도 ‘죄송합니다’가 뭔지 모르겠다. (찾아보지도 않았다.) 일본어 ‘스미마셍’ 은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도 아마 제일 처음 배우는 말 중 하나일 것 같다. 태국어는 ‘사왓디카 컵쿤카’ (태국어로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가 대표적이다. 그만큼 사과나 사죄보다는 감사의 표현이 앞서는 개념인 것 같다.
사실 ‘그러려니’ 하는 문화를 태국에서 처음 느낀 것은 아니다. 그리스와 러시아로 여행을 갔을 때도 여러 번 느꼈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이용했던 국내선 항공사들은 2시간 가까이 이륙이 지연되고도 ‘죄송하다’ 한 마디가 없었다. 심지어 비행기에 탑승해서 안전벨트까지 매고 ‘40분’ 넘게 기다린 것 같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승객들 모두가 (나 빼고 대부분 현지인들이었다.) 신문을 보거나 쪽잠을 청할 뿐 아무도 항의를 하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속으로는 짜증이 났을지언정 옆에 앉은 가족과, 친구와 짜증을 내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아마 그런 기다림에 익숙해져서 당연하다는 듯 넘겨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태국도 똑같은 느낌이지만, 태국인들은 확실히 훨씬 서글서글하고 순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쌀쌀맞고 불친절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여유롭고 모난 데 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느낌 때문인지 치앙마이에서 지내다 보면 태국 사람들에 대한 호감이 상당히 커진다. 택시를 타도, 음식점에서 주문을 할 때도, 야시장에서 물건을 둘러볼 때도, 길에서 누군가와 부딪쳐도, 그 누구를 만나도 대부분 태도에 기복이 없고 비슷하다. 그런 데다가 다른 동남 쪽 아시아 지역 민족들과는 다르게 좀 더 섬세하고 기민한 구석이 있다. 그 때문에 미적인 감각도 상당히 발달해있고, 센스도 뛰어난 편이다. 그들의 인테리어 능력이나 각종 데코 및 디자인 감각을 보면 알 수 있다. 치앙마이가 괜히 트렌디한 도시가 된 것이 아니다. 이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치앙마이에서의 생활이 불쾌할 이유가 없다. 쾌적하고 여유 넘쳐야 할 이유만 수 십 가지일 뿐이다.
인력이 풍부하다 보니 저렴한 물가에 제법 훌륭한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어서 외국인인 우리에게도 여유가 넘치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들이라고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돈이 많아야 여유가 있고, 돈이 많아야 인성이 좋아진다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절대 진리는 아니다. 길에 걸어 다니는 고양이와 개들조차도 여유 넘치는 곳이 치앙마이다.
치앙마이에 머무는 외국인들의 국적이 참 다양하게도 많지만, 서양인들은 대부분 엘리베이터를 탈 때나 문을 열고 나갈 때 앞서 들어가거나 나가지 않고 버튼을 눌러주거나 문을 잡아주며 먼저 나가라고 배려한다. 특별한 배려라기보다 몸에 밴 에티켓인 것 같다. 좁은 길에서 지나가다 마주치면 서로 먼저 지나가라고 비켜줘서 왠지 미안할 정도다. 태국인들은 그런 식의 배려와는 다른 차분함과 얌전함이 있다. 엘리베이터나 버스같이 다수가 이용하는 밀폐된 곳에서 상당히 조용한 편이고, 질서 정연하다. 사람이 많아서 어떻게 내리나 걱정한 것도 잠시, ‘모세의 기적’처럼 알아서 길을 척척 내주기도 한다. 서양인들처럼 적극적이고 명랑한 느낌의 배려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일본인스러운 공중 예절이나 타인을 위한 무관심이 있는 것 같다. 서양식이든, 태국식이든 치앙마이에서는 여러모로 배려를 받을 일도 많았기 때문에 여유가 절로 생기는 편이다.
이런 식이라면 나 역시 두 달이 아니라 열 달을 있어도 ‘그러려니’가 가능할 것 같다. 이 여유를 호리병에 밀봉해서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늘 지니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일처럼 조금씩 덜어서 손등에라도 바르면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치앙마이에 있는 것처럼 ‘그러려니’ 하며 사는 마법. 이런 상상이라도 수시로 하면 사람이 좀 무뎌지려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