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여행기 첫 번째
태국에 다녀온 건 11년 만이었다. 이번에 한국으로 휴가를 가면서 3박 4일 일정으로 치앙마이를 넣었고 그렇게 한국 도착 후 3일 만에 다시 치앙마이로 출국했다. 치앙마이가 작은 도시라고는 익히 들었지만 공항에 도착해 보니 그 규모에서, 그리고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것을 보고 정말 아담한 도시라는 사실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볼트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에 무사히 도착하여 직원을 따라 배정된 방으로 가는데 연못에 있던 개구리가 펄쩍 튀어나와 낯선 이방인을 있는 힘껏 반겨주었다. 이미 더위가 한풀 꺾인 시간이었지만 발코니로 나가니 후덥지근한 밤공기와 수영장뷰가 동남아에 왔다는 걸 실감 나게 해 주었다.
인천에서 치앙마이까지는 6시간이 소요되는 중거리 비행이었기 때문에 둘째 날에는 조금 늑장을 부려보기로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천천히 조식을 먹은 후 서둘러 바깥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그대로 수영장에 있는 선베드에 드러누웠다. 아직은 오전이라 기온이 높지 않았고 그늘진 곳에 누워있으니 이곳이 바로 지상낙원. 그래, 내가 이러려고 치앙마이를 왔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휴가 도서 라인업은 3권의 만화책과 두 권의 소설책이었다. 시드니에서 인천으로 올 때 시작한 박서련 작가의 『마르타의 일』은 치앙마이로 오는 비행기에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끊임없이 밑줄 긋게 만드는 책도 좋아하지만 읽고 있는 게 소설이라면, 이야기 자체로 끌고 나가는 힘이 있는 책은 또 다른 의미로 좋다.『마르타의 일』은 후자에 해당하는 책이었고 단 두 번의 밑줄을 그으며 책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SNS에서 간간이 보여 궁금했던 와야마 야마의 『여학교의 별』을 동네 도서관에서 대출해 왔다. 정말 오랜만에 읽는 만화책이었고 게다가 종이책이라 조금 설레어 버리고 말았다. 기대가 크면 항상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결과는 대만족.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운 만화책을 만난 게 오랜만이었고 작가의 개그 코드가 너무 취향이라 아침부터 수영장에서 만화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끅끅 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여행지에서 노트북을 열고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멋진 어른이라고 동경하곤 했는데 그와는 반대로 선베드에 누워 만화책을 넘기며 실실 거리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멋짐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역시 이쪽이 더 행복한 것 같아서 별로 불만은 없다.
사실 바보 같은 실수로 치앙마이 도착 일주일 전에 숙소를 새로 예약했다. 요즘은 예약 문화가 발달하다 보니 예약으로 많은 것들을 미리 준비할 수 있지만 반대로 예약이 열리는 시간을 고려해서 예약 타임라인을 세워야 한다는 단점도 있다. 이번에 서울, 부산, 치앙마이 여행을 계획하며 오백 개 정도의 예약을 미리 했는데 그러다 보니 몇 차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고 치앙마이 호텔도 그중 하나였다. 도착 일주일 전에 다시 숙소를 잡는다는 건 많은 기대를 내려놓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발코니, 스파 바쓰, 수영장 뷰 등 몇몇 원하던 조건을 만족시키는 숙소를 발견하여 전반적으로 잘 쉬다가 올 수 있었다.
예약의 수고로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GINGER FARM Kitchen은 이번 여행 중 방문한 유일한 미슐랭 레스토랑이었다. 치앙마이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정말 작은 도시이다 보니 미슐랭 레스토랑도 예약이나 웨이팅 없이 워크인으로 바로 입장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여행 가면 이곳을 또 언제 올까 싶어서 평소에는 하지 않는 웨이팅도 곧잘 하는 편이지만 한 시간 넘게 서서 순서를 기다린다는 건 여전히 지루하고 곤욕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곳에 도착해서 종업원에게 인원수를 이야기하고 바로 자리로 안내를 받는 순간 뭔가 생경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빈자리가 예약석이 아니라 내 자리라니. 어쩌면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서 순식간에 기분이 환해졌다.
여느 태국 식당이 그렇듯 이곳도 메뉴가 무척 많아서 음식을 고르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고심 끝에 고른 메뉴는 미슐랭 추천 메뉴인 태국식 쌈 세트와 크리스피 포크 벨리. 포크 벨리는 보쌈의 모습을 한 슈바인학세 같았는데 오히려 애피타이저로 시킨 태국식 쌈이 별미였다. 건어물과 견과류, 라임, 고추 때문에 짭조름하면서 고소하고 시큼한데 뒷맛은 알싸했다. 돼지고기를 한 점 먹고 케일 잎에 취향껏 쌈재료들을 잔뜩 넣어 먹으면서 태국식 쌈밥을 먹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플레이팅과 함께 내부 인테리어도 아기자기해서 눈도 입도 즐거운 곳이었다.
우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치앙마이 여행을 하는 동안 매일 마사지숍에 들렀는데 딱 하루만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 워크인으로 찾은 적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곳에서 받은 마사지의 만족도가 가장 높았다. 이제는 여행 가서 예전처럼 새로운 시도로 모험을 하기보단 검증된 평균 이상의 것들을 경험하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이렇게 별 계획 없이 무턱대고 찾은 곳들이 오히려 더 큰 만족감을 주는 경우도 있다. 백 퍼센트 보장된 즐거움보다는 때때로 우연에 기대는 것. 수많은 계획들 속에 적당히 빈틈을 끼워 넣는 것, 어쩌면 여행의 즐거움은 이 10%의 불확실성으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치앙마이 여행기 두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