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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 이모야 Jan 16. 2024

외식하다 튀어나온 빅데이터

경험이 만들어내는 그것의 정체성

이전에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먹는 것에 정말 진심인 사람이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터라 대.. 때우거나 길 가다 아.무.거.나. 사 먹는 일이 거의 없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밥시간을 넘길지언정 있는 재료로 뭐라도 만들어 먹어야 기분이 좋다. 내가 내 입맛대로 만든 게 제일 맛있으니까.


그런 내가 외식을 계획하고 길을 나설 때는 딱 한 가지만 기대한다.


푸근한 집밥의 맛 이거나
집에서 만들기 번거롭고 힘든 음식


하루는 점심시간은 훌쩍 지났고 저녁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 되어서야 끼니해결 겸 외식을 위해 동네 마실을 나섰다. 대부분 브레이크 타임이라 열린 곳은 동네 고깃집뿐이었다. 그중 한 곳이 점심메뉴로 들깨수제비가 있었는데 조금 생뚱맞긴 했지만 얼마나 자신 있으면 내세웠을까 하는 생각에 들어가 주문을 했다.


주인장이 주방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욕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슬그머니 밖으로 흘러나왔다. 뽀얗고 걸쭉한 들깨국물에 턱턱 떼어놓은 두툼하고 울퉁불퉁한 수제비를 상상하며 꼬르륵 거리는 배를 달래고 있었다.


내 앞에 그릇이 놓였고 나는 곧장 깊은 실망감에 휩싸였다. 다소 맑은 국물에 매끈하고 얇게 밀려 반듯하게 잘린 칼제비가 들어있었다. 내 상상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차라리 시판 수제비였다면 통통하고 쫄깃한 맛이라도 있을 건데 이건 넓게 뽑은 면을 딱딱 잘라낸 모양이었다. 


기대가 컸던 것인지 실망감을 넘어서 상실감마저 느껴졌다. 사기당한 느낌도 살짝 들었던 것 같다. 자연스러운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식감과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투박하지만 따스한 분위기를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국물의 농도가 살짝 아쉽긴 했지만 맛이 없었던 것은 절대 아니고 직원들이 불친절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기대했던 (手)제비가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먹은 음식은 내가 생각하는 수제비의 보편적인 모습이 실종된 '다른 음식'이었다.


누군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댄디함 물씬 풍기는 칼수제비 스타일을 선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차라리 두껍게 잘못 떼어내서 설익은 수제비를 씹는 편이  낫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날, 나는 수제비를 주문했고 사장님은 수제비를 만들어 팔았다. 하지만 나는 수제비를 먹지 못했다.

Photo by Lee Sookyong

꼭 음식이 아니더라도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나만의 빅데이터가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특정 대상에 대한 보편성도 함께 설정된다. 결국 그 보편성은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의 정체가 되는 것이다.


사장님은 그동안 어떤 수제비를 드셨던 것일까.




양한 지역 출신 사람들과 소고기뭇국을 이야기하면 맑은 국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빨간 국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각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본인과 다른 대답을 하는 사람을 신기해한다. 소고기와 무로 맛을 냈으니 색이 어떻든 간에 둘 다 소고기뭇국이 맞다. 그것은 강렬한 첫 경험이나 자주 접하면서 친근해진 형상이 만들어낸 각자의 기본값일 뿐이다.


모수가 크고 수집범위가 넓을수록 빅데이터는 더욱 값진 의미를 가진다.


내가 쓸모 있는 값진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면 안 된다.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도록 다양한 경험을 더 많이 하고 더 많이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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