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킹이라는 취미
[그냥 빵을 사 먹으면 안 되는 걸까?]
초보 홈 베이커의 빵 만들며 드는 생각들
아침부터 기분을 가라앉게 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실수도 실수지만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알람을 울렸다. 입맛은 없지만 배는 고픈 상황이 참으로 웃펐다. 축 처져있는 나에게 언니가 한 말이 다시 기운을 솟게 했다. "아직 잘못된 건 하나도 없어." 이 말이 왜 이렇게나 위로가 되던지 사라졌던 입맛도 다시 돌아오는 듯했다. 그래. 아직 잘못된 건 하나도 없다. 노파심에 나의 기분이 잠식되었을 뿐이다. 모든 게 좋아질 희망은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힘을 얻고 난 뒤 맛나게 점심도 먹고 유튜브로 '*고잉 세븐틴'도 보았더니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고잉 세븐틴은 아이돌 세븐틴의 자체 제작 예능인데 내가 정말 애정 하는 프로그램이다.)
신나게 웃고 배도 채웠지만 아직 찝찝함이 남아있는 축축한 기분을 뽀송하게 구워보고자 베이킹을 하기로 했다. 이런 날에 베이킹이 제일 좋은 건 예측 가능하고, 내가 컨트롤할 수 있으며, 완벽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이 나의 떨어진 자신감을 어느 정도 추켜올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만은 새로운 베이킹 대신 많이 만들어봐서 결과물이 제대로 나올 수 있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와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스모어 쿠키'를 만들기로 했다. 일반 쿠키와 만드는 방법이 비슷하지만 여러 가지 재료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왠지 고급 베이킹 같아 보이기에 딱이다 싶었다. (훗훗)
갑작스러운 결정이라 버터와 계란을 실온에다가 내놓지를 않아서 이번엔 전자레인지 찬스를 쓰기로 했다. 단단한 버터가 물렁해질 때까지 10초씩 끊어서 돌리고 난 뒤 (너무 많이 돌려서 녹아도 안됨) 핸드믹서로 풀고 차례대로 설탕, 계란, 박력분, 코코아 가루 등을 넣고 반죽을 만들었다. 마지막에 초코칩을 넣어야 하지만 까먹고 그대로 냉장고에서 한 시간가량 숙성을 해주었다. 그 사이 설거지도 하고, 지저분했던 가스레인지도 닦고, 물주전자를 씻은 후 보리차도 끓였더니 어딘가 개운해진 느낌이 들었다. 모델 한혜진 님이 "세상에서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몸 밖에 없다"라며 말했던 게 퍼뜩 떠올랐다. 나에게는 베이킹이 그러한 느낌이었다. 발전하는 것이 눈에 보이고 뚜렷한 결과물이 눈에 보이는 것. 베이킹을 하면서 많은 위안을 받는다.
한 시간이 흐른 후 반죽을 꺼내 6등분으로 나눈 후 하얀 마쉬멜로우를 쏙 넣어서 동글린 다음 오븐 팬 위에 놓고 랩을 씌워서 30분을 또 냉장 휴지 시킨 다음 오븐에서 10분을 구워주면 아주 맛나게 생긴 스모어 쿠키가 완성이 된다. 쿠키는 나오자마자 흐물흐물한 상태라서 꽤나 오래 식혀야 하는데 10분 정도 지났을까 쿠키를 보고 있자니 너무 먹고 싶어서 말랑말랑한 쿠키를 그대로 입에 가져갔다. 따뜻하고 진한 초코와 부드럽고 달콤한 마쉬멜로우의 조합은 정말 글로 설명할 길이 없다. 여기다가 흰 우유 한 잔까지 딱 마시면 이로써 모든 건 완벽해진다. 어딘가 부족함도 지나침도 없이 지금 이 순간이 완전함을 느낀다. 이렇게 간단하게 기분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엄마와 언니도 내가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 덜 식었지만 쿠키를 하나씩 접시에 담아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히죽히죽 웃음이 나는 걸 보면서 베이킹이란 취미를 갖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븐에서 갓 나온 스모어 쿠키! 시간이 지나면서 마쉬멜로우가 가라앉아요. ㅎㅎㅎㅎ 너무너무 맛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