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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순댕 Feb 09. 2021

[그빵사]97. 쑥&단호박 파운드케이크

영화 '리틀 포레스트'적인  삶을 위하여

[그냥 빵을 사 먹으면 안 되는 걸까?]
초보 홈 베이커의 빵 만들며 드는 생각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오늘은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는지 이야기하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평화롭게 요리하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그 어떠한 자극적인 영화보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이 영화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건 단순히 '먹는다'라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느낀 나 같은 이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네 개의 계절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면은 겨울에 주인공의 엄마가 만든 크리스마스 케이크였다. 반은 시금치로 초록색을, 다른 한 쪽은 적미로 빨간색을 내어 층을 쌓아 만든 파운드케이크를 흰색의 생크림으로 덧바른 것이다. 하얀 끝부분을 썰면 세로로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깔끔하게 나뉜 단면이 보이는 것이 이 케이크의 특징이다. 주인공은 훗날 그날을 추억하면서 흑미로 보라색을, 호박으로 노란색을 내어 만들었다. 그 장면이 어찌나 좋았던지 캡처해서 계속 간직했을 정도였는데 그때만 해도 똑같은 케이크를 파는 곳이 있으려나 생각만 했을 뿐 내가 직접 만들어 볼 거라고는 감히 예상도 못했었다. (영화를 접했던 것이 2017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영화 속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나오는 장면

그 후로 몇 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베이킹을 시작하고 난 최근까지도 그 장면을 잊고 있다가 얼마 전 말차-초코 파운드케이크를 보게 되면서 알고리즘이 자연스럽게 리틀 포레스트 st 파운드케이크로 이끌었다. 보자마자 '아! 내가 왜 이걸 기억 못 했지?'라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갔다. 몇 년 전의 내가 꼭 먹어보고 싶었던 직사각형의 파운드케이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시금치와 적미 혹은 흑미로 색을 내긴 힘들 것 같고 레시피 영상이 있는 말차- 초코 파운드케이크를 만들어서 겉에 생크림을 바르는 형식으로 진행을 해보기로 했는데 베이킹 재료 상점에 가니 의외로 말차 가루가 없어서 대신 초록색을 낼 수 있는 쑥 가루를 사 왔다. 그리고 옆에 쑥이랑 어울릴 것 같은 노란색 단호박 가루도 있었는데 가격이 좀 나가서 살까 말까 고민을 했다가 결국 그 날은 못 사고 어제 1호 케이크 상자를 사러 갔다가 단호박 가루도 함께 데려왔다. 주인공과 주인공 엄마가 만든 것을 섞은 것 같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조합의 초록색 쑥 & 노란색 단호박 파운드케이크가 되었다.


기본 반죽은 계란 두 개, 버터, 박력분, 설탕 등을 넣고 한 번에 만든 뒤 가루류를 넣기 전 두 개의 보울로 나눠서 한 곳에는 쑥가루를 박력분과 베이킹파우더와 함께 넣고, 다른 한 곳에는 쑥가루 대신 단호박 가루를 섞었다. 노란색이 의외로 쨍하고 예뻐서 단호박 가루를 사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미리 버터를 발라 냉장고에 둔 파운드케이크 틀을 가져와서 아래에는 쑥 반죽을 깔고 위에다가는 단호박 반죽을 덮고 오목하게 만들어준 뒤 오븐에다가 구워주었다. 오븐에서 꺼낸 파운드케이크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식힘망 위에 봉긋 솟아오른 가운데 부분을 아래로 가게 만들어서 식혀주었는데 팬닝 양이 많아서 그런지 워낙 높이 솟아올라서 많이 평평해지지는 않았다. 겉에 생크림을 바르기 위해 충분히 식혀줘야 하는데 그 사이 오랜만에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싶어 졌다. 왓챠나 넷플릭스에는 없고 네이버 시리즈 앱에서 사 볼 수 있었는데 운이 좋게 500원이라는 이벤트 가격으로 영구 소장할 수 있어서 바로 구매를 하여 다운로드를 하고 겨울-봄 편을 재생을 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첫 음식으로 바로 나와서 많이 기다리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언제 봐도 영화의 분위기가 참 좋다. 언젠가는 나도 겨울에는 직접 만든 뱅쇼를 마시고, 케이크를 굽는 그런 날이 오겠지 심장이 도곤 도곤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반죽 색이 너무 예쁘다.

그런데 하필 오늘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온 집안에 퍼지는 단호박 냄새를 맡으니 기어코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오고야 말았다. 리틀 포레스트처럼 살기에 나는 아직 너무 게으른가 보다. 영화를 잠시 멈추고 부엌으로 가서 배를 채웠더니 그 사이 파운드케이크가 식어있었다. 크림을 바르기 위해 휘핑크림을 가져와서 계량을 하기 전 열심히 흔들어 줬다. 이렇게 흔드는 이유는 어제 밀크티 갸또 쇼콜라 케이크를 만들 때 휘핑이 너무 안돼서 베이킹 카페 글을 찾아보니 매일 휘핑크림 같은 경우는 바닥에 어떤 성분이 가라앉아있어서 흔들어줘서 사용해야지 거품이 올라온다고 했다. 내가 쓰고 있는 것도 공교롭게도 매일 휘핑크림이라서 오늘은 아주 열심히 흔든 뒤에 계량을 한 뒤 설탕을 넣고 핸드믹서로 휘핑을 해 주었다. 거품이 올라오는 것이 늦긴 했지만 확실히 어제보다 단단한 크림이 만들어졌다. 이제 파운드케이크를 옆으로 눕혀서 하얀 크림으로 덮을 차례였다. 묵직한 크림으로 먼저 투박하게 바닥을 제외한 모든 면을 덮은 뒤 스패츌러로 단면을 정리하는데 생각보다 이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정리를 하다 보면 갈색의 파운드케이크가 불쑥 나타나고, 다시 흰색으로 덮으면 면이 울퉁불퉁하고, 다시 정리하고의 반복을 했더니 겨우 단정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릇에다가 아주 조심히 옮겨 담고 인스타용 테이블로 가져갔다. 오늘은 자르는 것도 영화처럼 기록을 해 보기로 했다. 끝 쪽을 카메라 앞으로 가져간 다음 빵칼로 쓱싹쓱싹 자르는데 권장시간보다 5분 더 구웠더니 너무 바싹 구워져서 겉면이 딱딱해져서 썰기가 조금 힘들었다. 포크와 빵칼로 잘린 면을 들어서 접시에 옮기니 초록색과 노란색의 단면이 짠! 하고 나타났다. 영화처럼 단면이 깔끔하게 되지 않고 물결무늬처럼 되긴 했지만 색 조합이 너무 장난스럽고 귀여워서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르자마자 쑥 냄새도 솔솔 나고 달콤한 단호박 냄새도 났다. 겉면에 있는 생크림과 함께 쑥 부분부터 먹어보았는데 그 향긋한 쑥 냄새가 나서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맛인 것 같았고 단호박은 달달한 것이 아이들이 좋아할 맛인 것 같았는데 생크림으로 덮으니 누구나가 다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파에 누워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온몸에 휘감아져 있는 빵 냄새를 맡고 있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빵 냄새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리틀 포레스트'적인 삶을 목표로 살고 있다. 정성스레 매 끼를 짓고 (가끔은 치킨도 먹으면서) 평화롭고 안정적인 나날을 위해 홈베이킹도 하고, 최근에는 요리 학원도 다니면서 내가 목표로 하는 이상적인 삶에 다가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본다. 오늘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이상적인 삶에 한 발자국씩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쉽게 구울 수 있으면서도

단면이 너무 예쁜 파운드 케이크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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