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get 끈적
나에게 연대는 혈연을 훨씬 뛰어넘는 관계이자 감각이다. 나의 연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어김없이 김자향, 나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혼 가정, 한부모 가정… 이름은 많지만 이런 것들이 나와 김자향을 대표하진 않는다. 사람들이 나와 김자향의 관계에 대해 물을 때, 나는 모녀보다는 연대관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김자향도 이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자향은 나를 안쓰러워하고, 이혼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나 역시 그를 안쓰러워하고, 그가 갖는 죄책감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친하면서, 너무 가까워서 때론 질리고, 질려서 생긴 거리와 공백에 대해 어찌할 줄 몰라한다. 우리의 연대는 지긋지긋하게 끈적하다.
끈적한 연대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싫어도 같이 싫어야만 하는, 때로는 지긋지긋한 연대. 그럼에도 떼어낼 수 없고, 인내하면 결국 죽고 못 사는 그런 끈적함은 어디서 시작되냐는 말이다. 김자향과 나는 탯줄로 엮여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걸까? 그러기엔 나와 정자의 주인은 스쳐 지나가는 타인보다도 못한 관계이다. 단순한 생물학적 연대로 이 끈적함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공공의 적이 있었기 때문인가? 원래 연대체는 적을 공유할 때 형성되지 않는가. 하지만 공공의 적으로 말미암아 생성된 연대는 일시적이다. 그런 연대는 마치 벽에 자국을 절대 남기지 않는다고 홍보하는 3M사의 재사용가능한 양면테이프 같은 것이다. 김자향과 나는 비슷한 특질을 공유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특질을 공유하는 완벽한 타인과 이만큼 끈적한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가?
내가 연대에 이다지도 집착하는 이유는, 나의 삶은 대부분 소수자로 분류되는 계급과 단단히 엮여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비서울 (심지어 병원과 은행조차 없던 깡 시골) 지역 출신, 비정상가정, 여성이라는 계급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장애 연구를 한다. 하지만 나는 비장애인이다.
보통 많은 장애 연구자들은 1) 당사자성을 갖고 있거나, 2) 매우 가까운 관계인이 장애 당사자이거나, 3) 직업 특성상 장애인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거나, 4) 자신의 도메인에서 장애 아니면 연구의 독창성을 가져갈 수 없어서 장애 연구를 한다. 하지만 나는 굳이 따지자면 네 경우 다 해당되지 않는다. 내가 장애연구를 하는 이유는 ‘재미가 있어서’다. 학문도 재미있고 사람도 재미있다. 이 재미는 나에게 현재로선 경제적, 사회적 보상보다 더 큰 가치이다. 나는 재미없이 못 살아 절대 못 살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불안하고 걱정된다. 내가 비장애인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 나의 아젠다가 당신들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나는 잘하고 싶고,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싶지 않다. 또 당신들이 나에게 실망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당신들이 너무 재미있고, 당신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이 흥미로워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고, 같이 웃고 화내고 싶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당신들이 나에게 실수해도, 반대로 내가 당신들에게 실수해도 쪼금은 괜찮을 만큼 관계 안에서 여유를 갖고 싶다. 다시 말해, 나는 당신들과 조금은 끈적해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직간접적으로) 당사자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나의 여성운동 역사를 되짚어보게 된다. 내가 나와 연대한다고 주장하는 남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화를 냈는가. 그들이 뺏어간 마이크에 대해 얼마나 분개했는가. 즈그 아가리로 뱉은 말 하나 못 지키고 뒤에서 더러운 짓을 하는 남자들을 보며 얼마나 화나고 실망했는가. 나는 장애 연구자로서, 장애 운동판에서 잘하고 있는가? 이런 검열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멈추지 않는 검열이 있는 한, 나는 당신들과 영원히 조금이라도 끈적해질 수 없어.
모든 소수자성이 그러하듯, 장판 내에도 교차하는 소수자성이 있다. 젠더 아젠다와 장애 아젠다가 지독하게 얽혀있다. 장판에서 몇 없는 교본과 기준, 그리고 정보는 모두 남성 장애인에 맞춰져 있다. 비남성 장애인은 정보도 없고, 커뮤니티도 없고, 그냥 뭐가 없다. 또, 많은 남성 장애인은 비장애인 여성과 결혼해서 많은 돌봄을 받고 사는 데에 비해, 여성 장애인이 비장애인 남성으로부터 보편 여성들이 제공하는 형태의 돌봄을 받고 사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몇 안 되는 장판의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남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내가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여자 장애인들한테 조금 더 마음이 많이 간다. 이 마음은 연민의 마음은 아니고, 관심이자 애정, 그리고 끈적해지고 싶다는 프러포즈와 같은 마음이다. 너는 이런 교차적인 사회에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너의 깊고 은밀한 분노는 무엇에 관한 건지, 묻고 싶은 질문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여성이라는 공유된 정체성을 가지고 웃고 화내고 공감하며 끈적해지려 한다. 그리고 나는 또 의심한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너와 나를 얼마나 끈적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 말이다.
나는 당신들에게 늘 솔직하게 말한다. 저는 가족 중에 특출난 장애인도 없고 (특출난 장애인이라 함은, 보편의 노인과 마찬가지로 나의 할머니가 겪고 있는 경증인지장애(치매)는 굳이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것) 저도 장애인이 아니라서 이런 제가 이 판에서 어디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할지 늘 고민해요. 그럼 당신들은 늘 말한다. “음! 그건 고민을 열심히 해야지! 그래도 잘하고 있어!” 하지만 답을 주지도 않고 제안도 해주지 않는다. 그럼 나는 또다시 걱정과 검열의 루프에 빠져버렷…!
당신들도 때론 장애인이라는 명찰을 떼고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신들이 쉽게 넘지 못하는 턱을 내가 너무나 무감각하게 넘을 때, 당신들이 가지 못하는 길을 내가 겅중겅중 대충 갈 때면, 어쩌면 우리가 더 가까워질 수 없다는 생각이 스칠 때가 있다는 것도 이론적으로 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들을 위해 망치를 들고 그 턱을 부수고, 굴착기를 몰고 와 그 길을 밀어버릴 심장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지금까지도 끈적한 연대가 무엇으로 생기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심장으로 너와 나는 얼마나 끈적하게 엮일 수 있을까? 오늘도 먼저 장미꽃 한 송이 내밀어 봅니다.
Join me, and together we can rule the galaxy*!
*이 인용구의 주인공이 이 대사 직후 비참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문장만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