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천적 비건에 대한 고민
비거니즘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돈이 많은 사람만 비건을 할 수 있는가? 서울에 사는 사람만 비건을 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간편하게 대답하자면, 대부분 그렇다. 비건은 결국 계급의 문제, 인프라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선 많은 것들이 제공되는 환경에 살아야 한다. 신념의 삶은 생존을 위한 모든 조건 - 잠자리, 먹을거리, 정기적 수입 - 이 충분히 만족된 후에야 추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비건의 삶을 추구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비건이 아니란 이유로 윤리적 비난을 할 수 없다.
비거니즘을 제대로 접한 건 2년 전이다. 닭이 산 채로 깃털 째 그라인더로 빨려 들어가는 영상을 보고, 이미지적 연상이란 저주받은 재능을 통해 닭을 사람으로 대치시키기 시작하며 신념을 세웠다. 그 누구도 산 채로 그라인더에 빨려 들어가는 엔딩을 맞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채식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간헐적 채식을 하는 flexitarian플렉시테리언, 빨간 고기는 먹지 않는 (소, 돼지는 먹지 않되 닭은 간혹 먹는) pollo-vegetarian폴로베지테리언, 육고기는 먹지 않되 해산물은 섭취하는 pescatarian페스카테리언, 동물 사체는 먹지 않지만 유제품은 섭취하는 lacto-vegetatian락토베지테리언, 계란과 채소를 섭취하는 ovo-vegetarian오보베지테리언, 그리고 철저히 동물 착취로 비롯된 모든 걸 섭취하지 않는 vegan비건으로 나뉜다. 비건 안에서도 환경 문제를 인지하여 탄소 발자국을 고려해 아보카도 등을 먹지 않은 적극적 비건 등으로 카테고리가 세부적으로 나뉘기도 하지만, 큰 카테고리는 대략 아래와 같다.
비건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주방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갖다 버려야 했다. 담배를 끊기 위해 먹었던 새콤달콤에도 돼지를 착취하여 추출한 젤라틴이, 재능 없는 요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즐겨 사용했던 조미료에도 비프 스톡 혹은 치킨스톡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요리에는 큰 취미도 소질도 없던 터라 신념을 지키며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현대의 한식에는 워낙 고기를 베이스로 한 음식이 많아서 완벽하게 착취 없는 음식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원래 고기를 잘 먹지도 즐기지도 않던 터라 너무나 먹고 싶은 것을 '참아내야 한다'라는 감각은 없었다.
내가 사는 마포구는 다행히도 채식인들의 천국이다. 비건 식당뿐만 아니라 비건 옵션이 갖춰진 식당들도 많고, 또 따로 주문하면 채식으로 요리해 주는 식당들도 꽤 있다. 비건 베이커리와 카페까지 잘 갖춰져 있다. 하지만 비싸다. 진짜 비싸다. 한 끼니에 만 원 이상을 지출해야 한다. 신념에 대한 비용이 벅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간단한 파스타 종류부터 시작했다. 버섯을 잔뜩 넣은 오일 파스타, 토마토와 콩을 넣은 토마토 파스타 등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며 요리에 재미가 붙었다. 간단한 한식도 만들었다. 고수 무침, 미역무침, 시금치나물 콩나물... 내 손으로 만들어가는 비건의 세계는 점점 넓어져 갔다. 그렇게 비건의 삶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강남구 논현동에서 회사를 다니며 4-50대 상사들과 함께 밥을 먹어야 할 땐 무엇이든 맛있게 먹어야 했다. 점심으로 먹는 부대찌개, 삼겹살집에서 하는 회식...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냥 열심히, 잘, 예쁘게 먹어야 했다. 한 번은 채식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왜 채식을 하는지, 동물들이 어떻게 잔혹하게 도축당하는지, 그것이 환경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그러더니 돌아오는 말은 단 하나.
"식물도 아파."
이 말을 듣고선 설명도 설득도 포기했다.
한 번은 철판 불고깃집에 가서 고기는 먹지 않고 반찬들만 열심히 집어먹었다. 그러더니 팀장님이 - 악의 없이 - 고기를 내 접시 위로 잔뜩 올려주었고, 그래도 먹지 않자 - 악의 없이 - 내 입으로 집어넣었다. 위계 속에서 신념을 지킨다는 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내 딴에는 굉장히 많은 타협을 하고 시키는 대로 잘 구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여전히 회사 안에서 내 명성은 '먹는 거 가리는 거 엄청 많은 애'로 굳어져 있다.
이런 사회적 충돌이 날 더더욱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내 신념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발전이 아닌 나 하나의 삶마저도 통제하지 못하는 내 한심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그리고는 어떤 글을 마주했다.
'한 명이 완벽한 비건이 되는 것보다 열 명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가두는 신념에서 조금 자유로워져서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실천하기로 했다. 나는 시장을 보러 갈 때 장바구니를 가져가고, 옷은 가능한 구제를 사서 입는다. 일회용품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가까운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간다. 여전히 육고기는 먹지 않는다. 나 혼자 식단을 오롯이 조절할 수 있는 상황에선 비건의 삶을 추구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자리에선 페스카테리언 - 해산물까지는 섭취 - 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채식의 삶이 얼마큼 할만하고 재미있는지,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육식이 아닌 사치와 유흥의 목적으로 기능하는 육식을 줄이는 거부터 시작하는 것이 얼마큼 의미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실천적 비건의 삶은 굉장히 많은 고민과 마주해야 하는 투쟁이다. 간편한 삶에서는 조금 멀어지는 선택을 해야 하고, 중독적인 향락의 삶에서 벗어나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지구에서 사는 생명체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공존의 삶을 추구해야 하니까. 우리는 잘 살고 싶으니까, 실천적 비건의 삶 - 단순 먹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일상을 영위하는 일로의 비건 - 을 고민하고 행동해보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