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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산 Nov 04. 2020

[기고] 라벨 너머의 비거니즘

원고에 덧붙이는 생각들

나라경제 11월호 ISSUE '신념을 소비하다' 섹션에 기고한 글에 덧붙이는 글입니다. 원글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원글 확인하기


비거니즘에 관해 고민을 정말 많이 한다. 현재 진행형이다. 에코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친구와 함께 자본주의에 반하는 생태주의적 비거니즘을 어떻게 자본주의 세상 안에서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의 시야가 우리네 삶 속에서만 너무 갇혀있는 건 아닌지 꾸준히 객관화하고 스스로를 비판하려 노력한다.


나는 편협한 세상에서 살아왔다.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에 살던 어린 시절 이후에는 계획 신도시인 인천광역시 남동구, 고양시 일산동구에 살았고, 지금은 서울시 마포구에 거주하고 강남구에 위치한 직장에 다닌다. 수도권 신도시, 그리고 서울의 노른자 지역은 인프라가 잘 발달되어있고 트렌드에 매우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므로 나는 비교적 일찍 비거니즘에 대해 접할 수 있었고, 비건 생활을 실천하기에 어려움이 많지 않았다. 나의 주 생활 반경인 마포구와 강남구에는 비건 옵션이 있는 식당도 많고, 비거니즘 세미나나 마켓 등 다양한 행사도 자주 열린다.


이런 인프라 속에서 살다 보면 내가 누리고 있는 인프라들이 얼마큼 '당연하지 않은' 것들인지에 대해 종종 잊곤 한다. 언젠가 친구들과 시골 동네로 놀러 갔는데, 내가 동네 편의점이 문 닫기 전에 필요한 걸 전부 사놓자고 하자 친구들 중 하나가 '편의점이 왜 닫아?'라는 질문을 해서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만이 존재하는 서울에서만 살던 누군가에게는 편의점이 특정 시간 이후 닫는다는 건 예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개인이 정의하는 세계는 철저히 개인이 겪어온 편협한 경험으로만 구성된다.


대한민국의 모든 트렌드와 인프라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마포구와 강남구에서 생활하는 나는 편협한 시선 속에 갇힐 때면 늘 화순에서 살던 과거를 떠올린다. 화순읍에서 산다는 것은, 은행에 가기 위해서 큰 마음을 먹고 읍내로 나가 한 시간 걸리는 버스를 타고 너릿재 터널을 지나 광주광역시로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 세트장에서나 볼 것 같은 오래된 조립식 주택이 늘어서 있고 해가 뜨면 동네 사람들끼리 모여 고추를 말린 후 떡집 아주머니가 해온 떡을 나눠먹는 게 그 동네에서의 가장 평범한 일상이다.


어떤 이념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나는 늘 화순읍에서 나에게 절편을 나눠주던 아주머니들을 설득하는 마음으로 충분히 설명하려 노력한다. 이념의 출발점은 정의롭지 않은 사회로부터 발생한 분노일지라도 이를 끌고 가는 힘은 인내심 있는 설득과 너른 포용력이다. 내가 비거니즘을 처음 접했을 시점에도 이념 실천의 원동력은 모종의 분노로부터 기인했다. 왜 비거니즘을 알지도, 하지도 못하냐고 화를 냈고, 비거니즘을 무례하게 가르치려 했다. 편협한 세계 속에 갇혀 자란 자만으로부터 비롯된 무례함이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비건의 삶을 실천하려 노력하다 보니 너무 많은 장벽들을 마주했다. 돈도, 시간도, 인프라도, 심지어 '배부름'까지도 넘어야 할 장벽이었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고탄수 저단백 비건식으로는 포만감을 얻을 수 없었다. 비건 식당을 갈 형편이 되지 않은 나는 직접 요리를 해야만 했는데, 채소는 생각보다 너무 비쌌고, 요리할 시간도 공간도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아무리 많은 양의 채소를 입 안에 쑤셔 넣어도 30분만 걸으면 금방 배가 고팠다. 이런 현실에 좌절할 때가 되어서야 과거의 무례를 돌아볼 수 있었고, 이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 또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다시 고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출한 결론이 '비소비'였다. 비거니즘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지만, 모두가 할 수 있는 실천 양식이라고 생각했다.


받은 메일함에 [원고 청탁]이라는 헤더를 보자마자 '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홍보도 안 하고 조용히 운영하는 브런치의 글을 누군가 예쁘게 봐주고, 자신들의 매체에 내 글을 싣길 원한다니! 게다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주제라 내가 쌓아온 산발적 사유를 잘 정리해서 차곡차곡 써 내려가고 싶었다. 메일 바디를 잘 읽어보니 비건 소비 방식에 대해 써달라고 되어 있었다. 비욘드 미트, 비건 타이거 같은 비건 브랜드들을 열거해달라는 건가...? 하지만 나는 신념 소비의 피상적 양상보다는 신념 '소비'라는 것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주욱 써 내려가니 2500자가량이 나왔고, 이 드래프트가 매체의 특성과 글이 실릴 섹션의 의도와 다르다면 수정하겠다는 코멘트와 함께 편집자님께 드래프트를 보냈다. 편집자님께선 얼개는 충분히 좋으니 분량만 1600자 내외로 줄여달라고 하셔서 문장들을 숭덩숭덩 날린 후 저런 모습을 갖춰 발행될 수 있었다.


돈을 받고 글을 쓴다는 건 행복한 일이구나! 콘텐츠 홍수 속에서 나의 조그마한 글을 발굴해주신 편집자님께 절을 올리는 마음으로, 원글보다 훨씬 긴 후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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