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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sory Feb 18. 2020

자랑스러움과 존경을 온마음 가득 담아.

아빠에게 보내는 라부레타.

내가 세상에 나오던 날, 아빠는 또다른 세상에 첫 발을 디뎠다.


학창시절 아빠는 무척 공부를 잘했다. 학문에 큰 관심이 있으셨던 할아버지는 그런 아빠를 6남매 중 가장 아끼며 살뜰히 챙겼다. 당연하게도 서울대를 목표로 했던 아빠는 드라마처럼 갑자기 기울어진 집안 사정 탓에 학비가 싸고 안정적인 사대로 방향을 틀게 됐다. 당시엔 사대 역시 서울대만큼 실력이 좋아야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서울대를 포기해야 했던 슬픔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었다. 간절히 그리고 당연하게 가질 수 있었다 믿었던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렸을 때의 절망감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으니까. 내가 꽤 많이 컸을 때까지도 아빠는 종종 그 얘기를 했다. 해결되지 못한 아쉬움은 묵혀두어도 크게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았다.


사대를 다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 후엔 발령을 기다리며 아빠는 학원 강사를 했다. 금방 발령 날 거라 믿으며 학원을 임시거처 삼아 일했지만 2년이 지나도록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후에 희망이 쪼그라들어 자신도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고, 그때만큼 절망적이었던 시간도 없었다고 말하는 아빠 옆에서 그 시간들을 가늠해봤지만 그 절망을 이해하기엔 난 아직 어렸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내가 태어나던 날, 고향과 완전 동떨어진 너무도 낯선 곳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우리의 첫 대면은 조금 늦어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한꺼번에 찾아왔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 아빠는 홀로 떠나야 했던 기차 안에서 그렇게도 많이 울었단다. 가뜩이나 눈도 크고 예뻐서 별명이 소눈인 사람이 혼자 훌쩍훌쩍 울며 타지로 갔을 생각을 하면 마음이 시큰하다. 그렇게 우리는 아빠의 발령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도시에 터를 잡았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지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 아빠의 첫 발령지는 여고였다. 꼼꼼한 엄마 덕분에 과거의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우리 집에는 지금 봐도 피식피식 웃음나는 사진 가득한 앨범도 많은데, 새내기 교사였던 아빠와 학생들의 풋풋함이 곳곳에 스며있다. 잠자리 안경을 쓴 언니들이 아빠와 함께 일렬로 서서 찍은 사진, 낯 엄청 가리는 내가 한껏 인상 찌푸리고 앉아 있는데 그것마저 귀엽다며 사랑스럽게 보고 있는 언니들. 벤치, 바위에 앉아 어색한 포즈로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순수한 얼굴들.


언니들이 성장해 그때의 아빠 나이를 훌쩍 뛰어넘을 때까지 아빠는 언니들과의 인연을 놓지 않았다. 서로에게 '처음'이란 단어를 새겨준 존재들의 애틋함은 마음 가장 깊숙한 곳을 건드리니까. 첫 담임, 첫 제자, 첫 학교, 첫 발령. 인생에서 가장 미숙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처음을 나눈 이후로도 정 많고 다정한 아빠는 많은 제자들과 마음으로 함께 했다.


아빠의 전공은 불어였다. 그러나 수요가 줄어들면서 복수전공한 영어로 방향을 틀었고 이후로는 쭉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다 이렇게 평생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지쳐갈 때쯤 장학사에 도전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장학사로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으로서는 꽤 긴 경력이었지만 장학사는 처음이라 초반엔 신입사원처럼 닥치는 대로 업무를 해야했고 잦은 야근에 주말도 반납한 일중독자로 살았다. 하지만 너무 즐겁고 좋았단다. 자신이 원하는 일에 오롯이 시간을 쓸 수 있는 전문직으로서의 삶이 교사일 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했다. 하나에 집중하면 옆에서 누가 뭐라든 그 세계에서만 사는 아빠에게 딱인 것 같았다.


아빠가 장학사로서 입지를 다져갈 때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뚜렷하게 하고픈 것은 없었지만 부모님께 이끌려 진로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대입 결정 때 결국 교대에 입학하고는 한동안 정을 붙이지 못했었다. 이렇게 점수에 맞춰 교사의 길을 가는 건 무책임하다 여겼다. 교사로서의 사명감도 없이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긴 싫었는데 역시 부모님 말 들어 손해볼 건 없는 걸까? 교사로서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 나쁘지 않아졌다. 졸업이 가까워져 왔을 때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아빠는 언젠가 '사람을 키우는 것만큼 보람된 일도 없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 나도 벌써 11년차 교사가 되었다. 아빠는 늘 나를 자신의 교직경력이라 불렀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곧 아빠의 경력이라는 우연이 나를 교직으로 이끈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연결고리에 동료교사가 추가된 것이 아빠에겐 큰 기쁨인 것 같았다. 나도 내 정체성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을 아빠와 나눌 수 있어서 참 든든하고 행복했다.


2020년 2월 21일, 34년의 교직생활을 끝으로 아빠는 자신의 큰 정체성 하나를 내려놓는다. 30년 넘게 자신을 담아냈던 공간에 작별을 고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난 아직 모른다. 다만 1월 내내 많이 앓았던 아빠를 보며 34년의 무게가 고되게 빠져나가는구나 했다. 은퇴를 축하한다라고 하기도 고생 많으셨다고 쓰기도,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담아보내야 할 지 모르겠다. 다만 아빠가 삶을 건강하게 가꾸는 일을 놓지 않고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


아빠는 이제 노인복지관에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생활영어를 가르칠 예정이다. 내 나이만큼이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힘써놓고도 또 그 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니, 아빠에게 교육은 놓을 수 없는 일인가보다. 아빠가 가꿔놓은 세상에서 딸은 계속 사람과 자신을 가꾸며 살 예정이다. 그 삶이 아빠를 더욱 이해하고 아빠로 향하는 길임을 아빠도 알았으면 좋겠다.


아빠의 새로운 세상이 멋지게 꽃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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