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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sory Feb 21. 2021

삐걱이의 상담일기. 제 4화.

(상담회차에 맞춰 순차적으로 쓰려하니 이런 나열식의 글이 어떤 목적성을 가지는가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인상적이었던 내용들을 바탕으로 회차에 상관없이 좀 더 자유롭게 써보고자 한다. 순서는 어지러워지겠지만 내 마음은 더 정돈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티비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클 수 있지. 근데 언제까지 부모님 탓만 할 거야. 나이 30 넘었으면 이제 그 그늘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책임지고 만들어가야지." 나한테 하는 소린가. 심드렁하게 누워서 보다가 그 말에 무지 따끔했었다. 내가 가진 것들 중 못난 모습은 대부분 엄마 탓으로 돌려버렸던 때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내게 이렇게 말해서, 그렇게 행동하라고 해서, 나의 이런 모습들은 싫어해서 안 했기 때문에. 엄마 탓은 쉬웠고 때론 의도적으로 그를 공격하기 위해 책임을 씌우기도 했다. 그에게 대항할 힘이 없던 어릴 적의 불쌍한 나를 그렇게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학창시절에는 부모님이 내게 했던 말과 행동들을 희화화하고 각색하여 연극톤으로 바꾼 뒤 친구들에게 열심히 풀어놓곤 했다. 집에서는 그렇게 싫던 그들의 행동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웃기게 표현할수록 친구들은 깔깔대며 즐거워했고 그렇게라도 주목받을 수 있다면 오히려 그런 에피소드들을 수집하고 싶을 정도로 관심받는 게 좋았던 못난 나는 한껏 오버스럽게 부모님 썰을 풀어놓고 온 날이면 밤새 죄책감에 뒤척였다. 엄마아빠를 팔아서 웃음거리로 만드는 자식놈이라니 이 얼마나 불효막시무스인가. 그런 밤은 '엄마 미안해. 아빠 미안해.'를 비밀 일기장에 깜지 쓰듯 몇 번이나 적고 주문처럼 그 문장을 속으로 수십 번 되뇌이며 죄책감을 떨치려 했다.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하지만 학창시절의 '재미난 친구'라는 칭호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라 부모님 소재삼기와 도덕성은 정말 쉽게 맞바꿀 수 있었다. 소재로는 엄마가 얼마나 나를 옭아매는지, 어떤 강압적인 조치들이 우리 집에서 시행되고 있는지가 주로 쓰였는데 불행배틀 같은 이야기였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개방적이고 멋진 친구들의 부모를 가질 순 없으니 차라리 최대한 불쌍한 아이로 비춰져서 연민이나 제대로 얻고 싶었다. '니네 같으면 이런 집에서 살 수 있겠냐. 근데 나는 이러고 산다.' 엄마아빠는 절대 바뀔 사람들이 아니라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하나. '독립'. 이 집에서 벗어나면 정말정말 행복하겠지? 나는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와 우리 가족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 독립을 해야만 했다. 그토록 바라던 자유였다. 오롯이 나 혼자. 나의 어떤 행동도 제약받지 않는 삶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삶의 만족도 최상. 집이 생각날 틈이 없었다. 통금도 없고 밤을 꼴딱 새도, 하루종일 티비만 봐도, 외박을 해도, 술을 진탕 퍼마시고 놀아도 다 괜찮다니. 딸은 영원히 집을 벗어나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행복했지만 엄마는 태어나 처음으로 떨어져 있는 자식놈이 어떻게 사는지 간절하게 궁금해 매일매일 연락을 기다렸다. 연락에 목마른 엄마와 연락에 대한 의지가 0에 수렴하는 딸의 갈등은 계속됐다. '마음만 있으면 그 잠깐 연락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와 '그 마음이 안 생겨서 연락할 생각이 안 나는 걸 어떡하라고'의 대립. 후자의 마음을 들이댈 생각은 없었지만 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연락 이슈와 관련된 우리의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이 이야기는 다시 자세히 풀어놓아야지)


상담을 하면 거의 매주 엄마가 소재로 등장했다. 엄마의 흔적이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에 존재했다. 과거에는 도덕성과 맞바꾼 불효막시우스 스토리텔러였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 감정이 희석된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랬었지(몽글몽글) 톤으로, 그치만 그때의 엄마를 이해한다는 성숙함 몇 스푼 넣어서. 30 넘었으면 이제 내 인생 내가 잘 만들어가야 되니까. 그날도 그랬다. 하지만 선생님 앞에서 와장창 무너졌고 포장은 완전히 실패했다. "K씨는 과거라고 하지만 저는 전혀 과거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K씨가 쓰는 단어들을 보면 아직도 화가 많이 나 있고 감정적이에요. 과거의 마음에서 조금도 나아져 보이지 않아요." 


안 괜찮다고? 그럼 나는 어쩌나. 부모님 탓만 하는 미성숙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그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역꾸역 열심히 살아왔는데, 아직도 그때의 나로 존재한다니. 엄마가 드리운 그늘이 이렇게까지 크고 진하다는 사실은 엄마탓을 더 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조각들이 겹겹이 쌓이게 될 때마다 엄마가 새롭게 미워졌다. 그 미움은 곧 자기연민이 되었고 당시 사람들을 만나면 요즘 엄마가 새롭게 미워지고 아직도 그 미움이 현재진형형이라는 사실이 괴롭다고 털어놓았다. 학창시절의 못났던 불행배틀처럼 엄마의 그늘에서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는 나를 더욱 가엽게 만들고 싶었던 것도, 새롭게 상기된 슬픔의 발견에 취해있었던 것도 같다. 못난 놈~~(feat.이순재 선생님) 사실 지금 '같다'라는 종결어미를 쓴 것도 나를 너무 못나게 보이고 싶지 않은 포장이다. 못난 놈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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