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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Sage Apr 08. 2022

아니 에르노의 사건

역시 칼 같은 글쓰기




#Sage의책갈피

저자 아니 에르노|역자 윤석헌|민음사 |2019.11.01 원제L'Evenement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인 임신중절 체험을 담고 있다. 에르노는 낙태가 불법이던 시절, 한 여자가 겪는 일들을 낱낱이 드러내고 얼마나 처절하게 그 과정을 통과했는지를 써 내려갔다. 그녀는 다른 글에서도 자신이 태어난 계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며 그 과정 중의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에 대해 언급했었다. 에르노는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지 못하고 가난에 빠져버리는 사회적 실패를 불법 낙태 시술로 목숨을 거는 것보다 두려워했다. 과연 그러면 안 되는 것인가. 성공과 생존을 위해 달리면 안 되는 것인가. 이 글에서 그녀가 처한 상황의 처절함과 절박성이 낙태에 대한 윤리적인 질문들을 압도한다.       


섹스라는 쾌락의 과정은 남녀가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무게는 다르게 짊어진다. 이 글이 쓰였을 때는 남자가 그저 가볍게 벗어날 수 있는 일에 여자는 인생과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 배경 속에서 에르노가 겪는 온갖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이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임신 중단을 결심하고 병원을 찾아가는데 이런 말을 듣는다. “사생아는 늘 예쁘더군요.” 또 다른 병원에서는 유산방지제를 동의도 없이 주사하고, 불법 시술을 받고 난 후 응급상황으로 병원에 실려 갔을 때에는 의사가 막말을 내뱉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의사는 나중에 그녀가 노동계층의 아무나가 아니라 (그와 같은 세계에 속할 가능성이 있는)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고 추궁한다. 자기가 그렇게 막말을 한 것을 그녀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양. 에르노는 섹스와 임신, 그리고 임신 중단이라는 경험을 하면서 몸이 까발려지고 공개되고 훼손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녀는 이 ‘사건’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표지의 인형은 전시되고 취약한 육체의 이미지로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불안과 공포를 겪는 여성의 취약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에르노는 좌절과 고통에 대해서만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생존하겠다는 욕망, 단지 숨만 쉬고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고 살아가겠다는 욕망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강렬한지 말이다. 멀리서 보고 판단하면 모를 것들을 살갗으로 느끼게 해주는 글이었다. 다른 에르노의 이야기들처럼, 이 책도 마음을 휘몰아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어린 시절의 나, 그리고 친구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나는 몸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었다. 내가 성적인 존재라는 걸 타인의 침입적이고 폭력적인 접근으로 깨달았고, 기쁘게 누려야 할 것들에 대해 수치심을 가지라고 강요받았다. 어떤 이들은 고통을 겪었고, 어떤 이들은 잘 지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혼했고 아이를 낳아서 길렀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인생 여정을 거친 사람들도 섹스와 임신 출산 등을 겪으며 몸이 전시되고 함부로 다루어지는 상황에 불편하고 분노하게 되었다. 아마도 더 이전의 젊은 나였으면 에르노의 이 책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기숙사 화장실에서 나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잉태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세대를 거듭하며 여성들이 거쳐 간 사슬에 엮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p.72)      


재능을 받았지만 낭비해 버린 듯. 경험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모든 이유를 넘어서서 무엇보다 가장 확실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하나 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p.79)     


그리고 늘 그래 왔듯 임신 중절이 나쁘기 때문에 금지되었는지, 아니면 금지되었기에 나쁜지를 규정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우리는 법에 비추어 판단했고, 법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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