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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Jun 12. 2024

매일, 세 시 메모

 작년 초에 가로세로 10센티쯤 되는 정사각형 일력을 받았다. 하루 단위로 묶인 365일을 덜렁, 한 손에 받으니 좀 이상했다.  

 1년이 겨우 이만큼이라고? 하는 의심에 맨 앞 장과 맨 뒷장의 날짜를 확인했 기억이 난다.


 어릴 때 할머니 방에 걸려 있던 큼직한 일력도 두툼한 책 한 권 두께가 딱 일 년이었다. 그것은 습자지처럼 얇고 잘 찢어지는 재질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제 손으로 누르고 싶어 하듯 그때 나는 아침마다 할머니의 일력을 한 장 뜯어내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하루가 아까웠을 할머니의 마음 따위 몰서 죄송합니다.)

 일력에는 매일 배정된 열두 간지 동물 그림이 있는데, 나는 의미도 모르고 그저 오늘의 동물이 뭔지 확인하는 게 재미있었다.

 

 내가 받은 일력 결이 건강해 뵈는 재생지로 만들었고 낱장마다 짧은 추천 문장이 적혀 있조그만 노트 형식이었는데 사용자에게 매일 오후 세 시에 그 순간의 마음을 기록해 보기를 권했다.

 재밌겠다 싶어 며칠 적어보다가 흐지부지 되 결국 그것은 피씨 옆에 놓인 메모지가 됐다.




 

 매일 오후 세 시에 그날의 상념을 기록하라고 판을 깔아 줬던 일력의 유효기간이 다 지나버린 지금에서야 나는 '매일 오후 세 시내 생각'을 적 보고 싶어졌다.

  사무실에서, 집에서, 학교에서 보내는 우리들의 일상은 요일을 구별하기 힘들 만큼 비슷하지만 매일의 생각은 조금씩 다르다. 밉상이던 부장님이 측은해 뵈는 날도 있고, 월급의 위안으로 인내가 가능하던 스트레스가 폭발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 날도 있다.

 일상이 늘 똑같은 것 같아도 똑같지 않다. 그러니까 오후 3시의 나는 매일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보통새로운 계획의 스타트가 내일부터 혹은 다음 주 월요일터였는데 바로 오늘부터로 정했다.

 새 스케줄을 잊지 않기 위해 휴대폰 알람을 맞추고 딸의 책상을 뒤져 적당 포스트잇 묶음을 얻었다. 외출할 때는 가방에 넣고 다니다 어디에서든 내 생각을 적어보자.

 다행히 나는 한가로운 사람이다. 매일 메모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그 생각의 파편들이 여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싶다.

  오늘 오후 세 시에 나는 어떤 생각을 적게 될 오전 열한 시인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게 재미있는 거구나.


 남편과 장을 보러 나갔다가 집으로 오는 횡단보도 앞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는데 주머니에서 알람이 울렸다. 오후 세 시였다. 첫날의 기록을 정각에 없게 되다니, 이건 예상치 했다.

 

 우리 집 앞 도로를 막고 며칠간 땅을 파서 공사를 하더니 오늘은 공사가 다 끝났는지 큰 롤러가 달린 차가 까만 아스팔트를 평평하게 밀고 있었다. 어떻게 건너야 하나 난감한데 관계자가 행인들에게 그냥 밟고 가라고 했다. 특유의 냄새와 함께 김이 폴폴 올라오는 아스팔트는 기름지고 폭신했다.

 대여섯 발자국을 밟았을 뿐인데 건너오고 나서 보니 운동화 바닥이 까맣다. 걸어가는 동안 신발에서 검은 알갱이들이 떨어진다.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밟고 이동한 석유 화합물의 흔적들이 많이 보였다.    

  

 3시 9분에 세 시의 메모를 적었다. 갓 쪄낸 아스팔트를 처음 밟아 본 느낌에 대해 쓸까 하다가 장을 보고 걸어오던 기분에 대해 썼다. 딱 정각에 쓰지 않으니 무엇을 쓸까 고민하게 됐다.

 

연필로 또박또박 시작했지만


 

 다음날은 집에 있다가 세 시를 맞이한 덕에 바로 메모를 했다.

 세 번째 날은 여름 모자를 사러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세 시가 되었다.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수첩을 꺼내 적는 것보다 휴대폰을 열어 써 두는 것이 빨랐다.

 역시 펜으로 쓰는 대신 휴대폰에 치는 게 빠르다. 혹시 '매일 n시의 메모' 비슷한 어플이 있으려나?




 

 세시 메모를 적기 시작한 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한동안은 남이 듣기에도 멋진 말을 고르다가 점점 '시원한 에이드가 먹고 싶다' 같은 아무 말이나 남기게 됐다.

 3시에 깜빡 낮잠을 자느라 못 적은 날도 있고 빨래를 널다가 알람만 끄고 까먹은 적도 있다.  

 나는 오후 세 시의 메모를 반 정도는 집에서, 반 정도는 밖에서 남긴다. 그리고 지금은 메모 앱을 이용해서 쓰거나 음성으로 남기고 있다. 이미 현대인의 내장의 일부 돼버린 휴대폰으로 언디서든 문장을 남길 수 있다.


 오늘 오후 세 시에는 붙박이장을 정리하면서 '정말 물건이 많다, 버릴 것이 많다'라는 목소리를 남겼다.

 예전에 '1년 동안 100개의 물건으로 살아보기'란 제목의 책을 보고 훌훌 넘기며 '뭐 100개면 충분하지 않나?' 했던 일을 반성한다.

 우리 집에 산신령님이 나타나서 손에 집어 들며 '이게 네 꺼니?'라 물을 때 '네'라고 대답할 물건은 천 개도 넘을 것이다.  

 

지금 내 뒤에 있는 책만 해도 몇 개냐고


  

 그러고 보면 세 시 메모는 차곡차곡 모여서 나중에 무슨 일을 한다기보다는 그날그날의 약효를 던져준다.

 주말만이라도 아니 생각날 때만이라도 세시메모를 적어보자.

 당신 안에서 뜻밖의 멋진 문장과 위트를 골라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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