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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훈 Nov 05. 2021

황정은 <상류엔 맹금류>를 읽다.

누가 가족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이 소설의 제목인 ‘상류엔 맹금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위쪽에 맹금류 축사가 자리 잡고 있고 저 물이 다, 짐승들의 똥물이라고 이야기할 때까지 이러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 대신 제희네 가족이 무엇인가 이상한 가족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제희의 여자친구였던 ‘나’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식들에게 짐을 짊어지게 한 제희네 부모님이 부도덕하다고 느껴졌다. 어떻게 쌓아도 균형이 맞지 않는 짐들처럼, 계속해서 떨어지는 짐들처럼 무엇인가 맞지 않고 잘못되어가는 가족이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평범한 어느 가정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가정이다. 다섯의 자식들을 모나지 않게 잘 길러내었고, 아프신 아버지를 돌보는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가정인 것이다. 다른 가정처럼 결혼한 것을 후회하는 말을 하는 어머님과 툭하면 화를 내시는 아버지의 모습까지, 무뚝뚝해 보이지만 상냥한 가족들이었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족들이었다.


그렇다면 한순간에 잘못된 가족이라 느끼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공감의 부족이었던 것일까. 이 소설의 서술자는 제희의 여자친구인 ‘나’이다. 직접적인 가족 구성원들에서 벗어난 이러한 특수한 ‘나’의 위치는 완벽한 타인으로도, 가족 공동체 사이에서도 함께 공감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에 서있다. ‘나’는 제희의 가정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강알지만, 그들의 삶에 완벽하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며, 이러한 위치에서 제희의 가족들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여자친구의 개인적인 의견과 감정에 동조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 부분, 버려졌다는 생각에 외로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는 ‘나’와 같이 그들을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들은 서술자로 세워진 여자친구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조종당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소설에서는 철저하게 악인으로써 설정된 사람은 없다. 그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사나운 맹금류와 같은 이러한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가족일 뿐이며, 아무도 그들의 모습을 감히 재단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그들의 입장이 되지 않는 한 어설픈 동정이 될 뿐이다. 아마 소설을 읽는 동안 여자친구의 이야기에 이끌려 우리가 취한 입장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고민하게 만든다.


[네이버 영화] 한낮의 피크닉 스틸컷


상류엔 맹금류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돌아온 독립영화를 하나 덧붙인다. 2019년 서울독립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한낮의 피크닉》에 나왔던 <돌아오는 길엔>을 함께 보았으면 좋을 듯 하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바라보아지는 가족이며, 우리도 누군가의 가족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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