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딸과 대화하고 싶은데, 너무 늦은 걸까?
나이 든 아빠의 속내 고백
"딸하고 말하기가 너무 어려워.
지금 시작하긴 너무 늦은 것 같지?"
한 친구가 소주 한 잔을 들이키며 뇌까리듯 뱉었다. 단단하기만 하던 평상의 모습과는 다른 낯선 친구의 모습이었다. 내 생각에 그는 빛나는 인생을 전성기로 잘 보내고 이제 부족함 없는 인생 후반을 살고 있는 친구였다.
그런 친구의 푸념이기에 더 관심이 갔다.
그 친구가 딸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딸과의 소통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고 술을 빌어 말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내게 조언을 구해 왔다.
"딸이 몇 살이야?"
"서른"
"이제 어른이니 말하기 쉽겠네."
"나하고는 대화를 안 해. 지 엄마랑만 하지."
그러면서 그는 빈 잔에 소주를 채운 후에 입으로 가져갔다.
"딸하고 소통하려는 이유가 뭐냐? 하나만 꼽으면."
잠시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
"여러 가지 많지만 그래도 가장 큰 건 딸이 시행착오로 더 이상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하고 싶어서야. 그런데 딸과 대화가 안돼."
"왜?"
"딸이랑 얘기를 시작하면 금방 내가 소리를 높이게 되거든. 그러다 하려던 말도 못 하고 끝나 버려."
"왜 목소리가 높아지는 데?"
"답답한 소리만 해서. 세상물정 모르고. 말을 해도 귀를 닫아버리고.."
친구는 소주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그리고 우린 한참 침묵을 안주로 삼았다.
"딸이 서른 살이라고 했지. 너 서른 때 생각나? 그땐 부모님 보다 니가 더 세상을 잘 본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랬지."
"니 딸이 그 나이야. 세상 다 아는 듯한 나이 말이야. 다 큰 어른인 거지. 그런데 너 대화할 때 딸이 어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아니 어른으로 대접해 말을 나눈 적이 있어?"
"..."
"난 지금도 전혀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딸은 이미 다 큰 어른이니 이성적으로 대화할 상대가 된 거고, 그러니 너만 이런저런 주변 감정을 털어내면 돼."
"..."
"니 직장생활 때 비즈니스 파트너나 직장동료와 대화할 때 목소리를 높인 적 있어?"
"당연히 없지."
"네 딸은 서른 살이야. 니 서른 살 때와 같은 서른 살. 어른으로 대접해서 대화를 시작하면 좋겠어. 그리고 비즈니스 미팅을 하듯 이성적으로 대화를 해 봐. 그러면 목소리 높일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딸과의 대화 첫 번째는, 너의 진솔한 사과였으면 좋겠어."
"그래도 어떻게.. 아빠 체면이 있는데.."
"체면이나 권위야 타인을 대할 때나 제압할 대상에게나 필요한 것 아닌가? 쓰잘데 없다는 것 니가 더 잘 알잖아. 딸에게 체면이나 권위 따위가 뭐 필요하겠어?
진정성 있게, 어른 대 어른으로, 니가 잘못 낀 첫 단추를, 본심과 달랐던 너의 말들을, 지금은 크게 후회하고 있는 것들을, 딸에게 진솔하게 말해 봐. 담담하게. 니가 먼저."
"..."
"니 속마음은 딸을 아껴서, 딸을 사랑해서 한 것인 데, 뱉어 낸 말이 그랬다고 솔직히 말해 봐. 아마도 딸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거다. 니 본마음을.
대화의 물꼬만 트면 진짜 대화를 시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럴까? 그러면 될까? 정말."
"당연하지 아빠와 딸인데.
그리고 또 하나,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마. 그냥 '내 생각은'으로 시작해서 그냥 니 의견을 툭 던져주는 식으로만 해. 니 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쓸지는 딸의 몫으로 그냥 남겨 줘.
안 듣는 듯하더라도, 딸도 속으론 아빠의 의견을 무게 있게 받아들일 거야. 딸에게도 아빠 같은 베테랑의, 경험자의, 생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 정도는 충분히 느낄 나이야. 니 딸.
그냥 던져주는 식이여야 해. 하라고 하지 말고. 그냥 전달만 하는 거야. 니 생각을."
"그래, 그렇게 한 번 해볼게."
그러더니 그는 바로 술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이 급해진 것 같았다. 그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나와 악수를 나눈 후 발길을 재촉해 멀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마디를 여운으로 남겼다.
"고맙다."